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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아버지의 한 모습 (창 1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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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에서는 소위 “X 파일”이라는 이름의 사건이 사회적인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한국의 안기부에서 사회의 저명인사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몰래 도청하여 녹음한 테잎(tapes)이 공개되면서 생겨진 파장이 무척 크다고 합니다. 이 “X 파일”이란 이름은 몇 달 전, 연예계에 종사하는 배우들의 사생활을 폭로한 일에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번에는 주로 정치와 경제계 그리고 언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해당되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만나 어떤 정치적인 일을 꾸미고, 자기들의 기업의 성장을 위해 정치인들을 돈으로 매수하고자 하는 일들이 도청되어 녹음되어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문과 방송에 관계하는 사람들까지도 이 일에 끼어들어 사회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정치적인 공작도 서슴지 않은 일들도 많이 있을 것이라고 한 관계자는 폭로를 합니다. 이외에도 사회 저명인사들의 여성 스캔들도 적잖이 끼어 있어서 도덕성에 큰 흠집을 가져올 사건들이 녹음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일에 관계한 정보원의 말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지각을 흔들만한 일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이 테잎이 공개된다면 엄청난 사회적 소용돌이가 휘몰아 칠 것이라고 합니다. 몇 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방송국의 프로듀서(Producer)들에게 잘 보여서, 방송에 많이 출연하기 위해 남자 탤런트(talents)들은 돈을 갖다 바치고, 여자 탤런트들은 성을 상납하는 일을 누군가가 언론에 공개를 함으로 들통이 나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일입니다. 그 당시, 우리는 TV에 나오는 많은 남녀 탤런트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들이 과연 이런 일들을 했을까 하고 의아해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의 많은 연예인들이 이 일에 관계했다고들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들의 출세나 인기 유지를 위해서 그리고 정치적인 야망이나 경제적 부를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을 꾸미고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일들이 밝혀지지 않아서 그렇지, 만일 이러한 일들이 빤히 드러나게 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울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여론조사기관에서 여론조사를 해 본 결과, 약 70% 이상의 사람들이 이번 “X 파일”을 다 공개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공개하여, 사회적으로 피해를 입힌 사람들에게 거기에 따르는 적절한 책임을 묻고, 앞으로는 이런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자는데 동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오늘 본문의 아브람(Abram)도 꼭 이런 모습은 아니지만, 비슷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온 아브람입니다. 하지만, 도착한 그 가나안(Canaan) 땅에 마침 흉년이 들어, 나그네 된 이 아브람의 가족들은 생계를 유지하기가 아주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애굽(Egypt)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애굽은 부유한 나라였기 때문에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당시 아브람은 자기를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별로 깊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현실의 필요를 따라 무작정 애굽으로 갔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아브람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의 믿음을 견주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아브람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 아브람의 모습을 봅니다. 뿐만 아니라, 큰 낭패를 당하는 아브람의 모습을 봅니다. 낯선 외국 땅에 나그네로 가게 된 아브람은 거기서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의 아내 사래(Sarai)가 어여쁜 여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러한 아브람의 아내를 탐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아브람은 애굽 사람들이 자기 아내를 빼앗기 위해서 자기를 죽일까봐 전전긍긍을 하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아브람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결국 아브람이 생각해 낸 것은 자기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이었습니다. 아내를 누이라 속임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던 중, 이러한 사실이 애굽의 왕 바로(Pharaoh)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바로는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려가 자기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아내로 삼고자 했던 바로 왕은 아브람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나귀와 약대를 결혼 지참금으로 아브람에게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렇게 아브람은 비록 자기의 생명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결국 아내를 빼앗기게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왕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이러한 재앙들이 바로 아브람의 아내 사래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이러한 잘못을 알려 주었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이러한 재앙은 바로 왕으로 하여금 사래를 데려온 일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해 주는데 충분하였다고 봅니다. 그래서 바로는 아브람을 불러서 크게 꾸짖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우리는 여기서 바로 왕이 아브람에게 한 말 중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라는 말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라는 바로 왕의 말의 표현이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상식적인 도덕의 시각으로 볼 때, 이러한 아브람은 어떤 타입의 사람입니까? 세 가지의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나약한(비겁한) 사람 : 살기 위해서 아내를 이용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2) 뿐만 아니라, 비도덕적인 사람이기도 합니다.
  (3)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아브라함의 과거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이 예를 들어 가룟 유다(Judas Iscariot)의 과거의 모습이었다면 “그러면 그렇지”하고 인정할 수는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Abraham)의 과거라는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딘가 우리 마음 한 구석에서 용납하기 어려운 모습이 있기 때문에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이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성경은 왜 이러한 아브라함의 언짢은 과거를 분명히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택받은 자도 약점을 지닌 사람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하신 장래를 이러한 인간적인 실책에도 불구하고 열어주신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런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인간적 근거가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분명이 “없다”는 것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인간적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믿음의 아버지”가 되게 하였을까요?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였습니다. 처음의 아브라함의 인간적 조건으로는 우리들이 본받을 만하거나, 믿음의 조상으로 추천할 만한 모습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결국 믿음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의 섭리를 가르쳐 준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의 섭리는 우리 인간의 역사 속에서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Paul the Apostle)의 경우, 그의 생애의 처음 부분과 그의 마지막은 어땠습니까? 그의 처음 생애는 예수를 비난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모습에서 아브라함의 패턴(pattern)과 같은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고전 1:26-29).

또 사도 베드로(Peter the Apostle)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할 뿐만 아니라, 이 예수를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했던 베드로였습니다. 이렇게 비겁하고 용렬한 그가 어찌 사도를 대표할 수 있는 예수님의 수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근거를 베드로 자신에게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과 섭리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애창하는 찬송가 405장인 “Amazing Grace”을 쓴 존 뉴턴(John Newton)은 원래 노예 상인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사냥하듯 잡아다가 배에 태워 미국과 유럽 등지에 팔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배에서 이들을 쇠사슬에 묶어둠으로 혹시 배가 침몰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이들이 살 수 있는 길을 완전히 막아버린 잔인하고도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그가 회개하고 후에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양하는 많은 찬송을 씀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꾼이 되었다.

이 외에 모든 하나님의 종들을 볼 때, 그들의 훌륭함은 인간적으로 흠모할 만한 그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 부르심과 은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깊이” 그리고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이러한 인간적인 비겁함이나 잘못들을 악용하는 사례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크리스천 중에는 자신이 방탕하다는 사실을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의 경우를 들어 악용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젊었을 때 꽤나 방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어거스틴이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교회에 지도자가 된 모습을 악용하면서, “어거스틴도 젊었을 때에는 그러지 않았느냐?”고 어거스틴을 악용하는 그러한 경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역시, 우리의 현재적인 부족함과 잘못된 점을 이런 식으로 오용하거나 합리화시키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깊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인간적인 부족함과 잘못된 모습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불러 주시고, 우리를 여전히 사랑해 주시며,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심으로, 우리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귀한 작품이 되게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를 인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혹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잘못됨이 나타나더라고, 여기에 얽매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이러한 모습을 회개하고 새 힘을 간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과거는 우리의 미래에 달려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하나님의 선하고 위대한 작품으로 나타난다면, 우리의 과거는 용납되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란 칭호를 얻었기에, 그의 비겁하고 나약하고 처량했던 과거가 이해될 수 있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쳐지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가 형편없는 그리고 불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우리의 과거 역시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식으로 해석될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오늘’ 이라는 현재를 잘 그리고 바르게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나 자신의 지금의 모습을 잘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재의 모습은 얼마 못 가서 곧 과거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겠습니까? 부끄러운 과거로 밝혀짐으로 우리의 미래를 또 망가뜨리겠는가? 아니면 우리의 미래로 과거를 용납 받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이 두 상반된 결과는 바로 나의 오늘의 모습에서 결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지금 여기서(Here and Now)”란 말이 있습니다. 이 용어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말씀에 근거합니다. 고후 6:1~2,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 말씀은 구원의 은혜를 지금이 아닌 내일에서, 그리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여기서 은혜 받지 못하면, 지금 여기서 회개하지 않으면, 다른 날에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은혜 받지 못하고 회개치도 못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렇게도 살기를 바라던 ‘내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하거나 의로워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 많고 비겁한 우리들이지만, 이런 우리들을 부르셔서 믿음과 진리로 단련시키심으로 선한 일꾼이 되게 하심으로 우리의 못난 과거를 하나님의 영광의 부르심으로 재해석되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자신의 생애를 통해 피부로 깨달은 사도 바울은 롬 8:30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의 사건은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우리에게 알게 함으로, 우리도 이러한 자리에 나아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계통을 잇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하십시다. (노 강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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