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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자 (신 33: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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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이 입추인데 이번 주만 지나면 훨씬 좋아지리라 봅니다. 이렇게 날씨가 더워 좀 시원하게 하는 소식이 없는가하고 신문을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소식들이 우리를 더 덥게 만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제 한 신문의 일면 톱기사가 이렇습니다. “DJ정부도 4년간 도청” 온 나라가 지금 도청사건으로 시끄럽습니다. 그 동안 소문으로만 알았던 불법도청이 국정원의 정식발표로 사실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제는 인권침해와 사회에 의심병이 커지는 상황입니다. 이런 것을 지나 좀 좋은 소식이 없나보니, 점점 더 우울하게 합니다. “경제진단 맞는 겁니까” “총기 탈취범 17일만에 모두 검거” “아시아나 교섭 성과 없이 끝나” “고속도로 주유소 피서철 바가지” 게다가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알몸노출 2명 구속” 별일이 다 일어납니다. 이제 갈데 까지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국제사회면에서는 이런 것이 눈에 띕니다. “히로시마 피폭 오늘 60주년” 전쟁의 흔적이 아픔과 고통으로 커다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우울하게 전하는 소식입니다. 이런 것도 보입니다. "존폐 기로에 선 NPT 체재“ NPT는 핵확산금지조약의 약자입니다. 핵 보유국들이 군축 약속을 불이행하고 많은 나라가 아직까지 핵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어 세계가 핵의 위험을 안고 있는 지적입니다. 이런 것과 함께 ”피 부른 가자 철수, 이 탈영병 버스승객에 총기난사“ ”블레어 테러 선동자 추방“ ”세계화의 태양이 저물어간다, 유가 160불 폭등도 가능“라는 것들이 온 신문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모습입니다. 국내외적으로 우리를 몹시 우울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도저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고, 행복을 찾을 수 없는 모습입니다. 풍요가 있어도, 평안해 보여도,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결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본문은 ‘너는 행복 자로다’라고 선언합니다. 세상에서는 행복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분명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분명한 몇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신명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모세가 광야생활을 끝내고 이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을 향해 축복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아셀 지파에 대한 축복을 선포하는 중에 온 이스라엘을 향한 큰 은혜와 축복을 선언합니다. 여수룬은 이스라엘의 애칭입니다. 그 가운데서 우선적으로 구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 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이스라엘은 어떤 민족인가, 한마디로 구원받은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애굽의 압제에서, 고통과 시련에서, 죄와 허물에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이끄셨습니다. 모세는 바로 그 행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행복 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으신 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들려오면 귀가 솔깃합니까? 믿는 자의 삶이 거북스럽지 않습니까?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내 삶에서 느껴지십니까? 바로 내가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아직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으니까 구원받은 자들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 봉사활동을 다녀온 지역이 단군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교회에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봉사하기 위해 온 우리도 거부했습니다. 우리를 만나면 교회와 예수이야기를 듣게 될까봐 집단적으로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강퍅하고 완악 한 지 모릅니다.
이들을 위한 우리의 사명이 분명합니다. 구원받는 백성을 만드는 일입니다. 지역과 나라와 세계와 열방을 향해 이 일을 신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여기 구원이란 말을 역사적 관점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 삶에 직접 개입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할 때까지 하나님은 잠잠하셨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셨고, 모세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개입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멀리 계셨고, 나와 상관이 없었고, 나는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내 의지대로 살았지만 이제 하나님이 내 삶에 개입하여 하나님과 연관을 맺고 하나님이 내 삶에 간섭하시게 된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행복 자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깊이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 없이, 주님 없이, 은혜 없이 살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평생 이 은혜를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지치고 고단할 때마다,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도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성경은 이스라엘을 행복자라고 선언하시면서 그 분명한 직접적인 이유를 하나님의 도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9절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 시로다” 라고 말합니다. 26절에서도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 도다” 라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인간을, 택한 자를 돕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 이 사실을 잘 깨달았던 시인들은 이런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특히 시편 121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사실 사탄도 우리 삶에 개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순간부터 사탄은 더욱 우리에게 접근하여 내 삶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려고 합니다. 전에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는 잠잠하던 사탄이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가까이 붙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내 삶에 개입하여 결코 나를 돕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떻게 해서든 방해합니다. 내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을 막습니다. 내가 깊은 깨달음을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내가 전처럼 죄악의 길에 서지 않는 것을 보면서 몹시 분노합니다. 내가 고난을 받는 것을 고소해 하고, 내가 잘못하면 여지없이 찾아와 지적합니다. 나의 약하고 부족한 것을 보면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참소합니다. ‘네가 그렇게 믿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느냐고, 너는 안돼, 너는 아니야’ 라고 우리를 약하게 만듭니다. 내가 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바르고 참되게 사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것이 내 삶에 개입한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나를 돕기 위해 개입하십니다. 아무리 내가 약해도, 아무리 사탄이 방해해도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도우시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능력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개입하여 되지 않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개입하면 문제는 해결되고, 난관도 극복되고, 어려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지신 힘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능력을 위해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이 도움을 주는 분이기에 우리는 순간마다 그분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 되어야 하고, 이것이 남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도움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는 행복자라고 고백하시고, 하나님의 신실한 도움을 구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행복자라는 것을 하나님의 강력한 책임의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29절에 묘사된 ‘영광의 칼’이란 말을 보십시오. 이 말은 승리하게 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명예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26절에 나오는 ‘궁창에서의 위엄’도 역시 하나님의 위엄을 보여줍니다. 특히 27절에 언급된 ‘영원하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아주 잘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원입니다. 변함없이, 한결같이 그 이름과 명예를 걸고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이 모두에서 우리가 보고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을 세상에서 그리고 저 세상까지 영원토록 책임지시는 분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부른 행복의 노래였습니다. 그들이 행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름의 영예를 걸고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하다는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책임을 지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지신 속성이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은 책임이라는 것이 가장 귀한 인격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타락한 이후 책임을 회피하는 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의 대표적인 현상이 아담과 하와의 범죄이후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을 물으실 때 어느 누구도 자기의 책임이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가장 크게 책임을 가져야 할 아담이 이렇게 발뺌을 합니다. 하와는 실제적인 죄를 그가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뱀에게 죄를 뒤집어씌웁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사건도 이런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마땅히 그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그 일을 추궁할 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면서 오리발을 내밉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세계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런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을 보십시오. 분명 어떤 일에 원인이 있고, 사건과 내용과 결과가 있는데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모두가 발뺌을 합니다. 누구라도 속 시원히 ‘내 책임입니다’ 라고 말하는 자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이 풀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 없기에 이토록 시끄럽고 어지러운 것입니다. 아마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영예는 얻고, 권위는 가지려고 하지만 책임은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은 자기에 대해서도 책임을 못 지는 경향이 강한 존재입니다. 만약 내가 책임지려는 의지가 강하다면, 결코 우리가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을 알고,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아는 우리가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로 산다면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훨씬 좋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도 책임을 못 지는 존재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되는 인물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만약 책임지는 존재였다면 주님 앞에 그렇게 호언장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만약 책임 질 줄을 알았다면 그 자리에서 그렇게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나를 책임지고, 다른 것을 책임질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요, 솔직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름의 명예를 걸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한번 구원하신 자를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설령 내가 잘못해도 하나님은 이런 나를 책임지십니다. 내가 부족해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내가 실패하고 잘못해도 하나님은 나를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세상에서 나를 보존하시고, 영원한 하늘나라로 나를 이끄십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의 명예를 걸고 내 삶을 책임지십니다. 우리의 어려움을 담당해 주시고, 고난과 아픔의 때에 우리를 위로하시며 내 모든 것을 전적으로 책임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 ‘주만 바라볼찌라’는 그것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자한 귀로써 귀를 기울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하나님 앞에 순복 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기고,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의 이름이 ‘영원’이시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끝까지, 영원까지 나를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금년 초에 세상을 떠난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죽으면서 유언한 마지막말이 모두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시오’ 어쩌면 이것이 이 땅에 사는 우리가 고백할 말이요, 우리가 죽을 때 마지막으로 해야 할 말이기도 합니다. 나는 행복 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으시고,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나의 부족과 연약함을 아시고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를 끝까지 책임지시며 선한 길로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모두 이런 하나님을 날마다 고백하고 굳게 믿으면서 승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 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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