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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을 사랑 합시다 (요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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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9)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 제2막에 나오는 대사에  "가난한 백성들도 지금쯤 잠들었거니 아 잠이여, 아 밤이여  그대는 사랑스런 간호사이건만 나는 그대를 얼마나 두려워했나 그러나 밤이여 그대는 더 이상 나의 눈꺼풀을 닫을 순 없다 내 감각을 망각으로 몰아넣을 순 없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 대사는 밤과 싸우는 헨리 4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합니다. 그는 밤을 사랑스런 간호사와 죽음을 재촉하는 악마의 이중적 세계로 보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셰익스피어가 인간의 정신세계를 파헤친 것으로서, 인간은 밤이라고 불리는 어두움 속에서 살지만 그 흑암과의 투쟁 여하에 따라서 어두움을 밝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라는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어두움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불 분명 하나 빛이 임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땅 속에 깜깜한 어둠의 나라가 있었대요. 그 곳에는 이처럼 눈부시고 환한 해님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물론 달님도 별님도 없었어요. 온통 어두움뿐. 무엇하나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겠죠? 어쩌면 이 답답한 어둠 속에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은 환한 빛이 무엇인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캄캄한 그 생활이 오히려 편안했을지도 몰라요. 자기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 남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 세상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볼 수도 알 수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이 어둠 속 나라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검은 돌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아유, 심심해, 뭐 재미있는 일이 좀 없나? 이 깜깜한 세상엔 친구도 없다니까." 검은 돌은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검은 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어요. 그 캄캄한 속에서 무엇이라도 찾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거예요. 어둠 속을 걸어 나가는 검은 돌은 자꾸만 넘어졌어요. 아팠어요. 그리고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어요. 검은 돌은 크게 소리쳐 보았어요. "거기 아무도 없나요? 저 좀 도와주세요." 검은 돌의 목소리는 멀리멀리 가더니 글쎄 메아리만 보내왔지 뭐예요. 하지만 검은 돌은 실망하지 않고 다시 큰 소리로 말하였어요."누구든지 대답 좀 하란 말예요." 으응?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어디선가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는 대답소리가 검은 돌의 메아리와 함께 들려온 거예요. "어! 누가 있잖아?" 검은 돌의 귀가 번쩍 뜨이는 것 같았어요. "누구세요?" "난 흰 돌이야."  "난 검은 돌이야." 검은 돌과 흰 돌은 참 반가웠어요. 하지만 어디쯤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어서 둘 다 참 답답했겠지요? 검은 돌과 흰 둘은 소리 나는 방향을 따라 발길 닿는 대로 한참 뛰어가다, 그만 서로 부딪쳐 넘어지고 말았어요. "아유, 아파." "나두야." 어둠 속에서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른다니까!(요12: 35-36) "누가 아니래." "그런데 흰 돌 너는 어떻게 생겼니?" "으응, 하얀빛이야." "하얀빛?" 검은 돌은 가깝게 다가가서 흰 돌을 만져 보았어요. "오라 너는 둥글넓적하게 생겼구나." "검은 돌, 너는 참 날카롭고 거칠게 생겼구나. 그런데 검은빛이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쟎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검은 돌과 흰 돌은 마주 앉아서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이 궁리 저 궁리를 해보았어요. "참 검은 돌,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우리보다 오래 살아온 바윗돌은 혹시 우리의 빛깔을 잘 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 맞았어. 그럼 우리 바윗돌을 한번 찾아가 보자." 검은 돌과 흰 돌은 더듬거리며 이곳저곳을 찾아 다녔어요. "누가 우리를 밟는 거야?" "어! 안녕하세요? 우린 검은 돌과 흰 돌이어요. 지금 바윗돌 선생님을 찾아가는 길이어요." "내가 바윗돌인데 무슨 일이지?" "저, 사실은요. 검은빛 흰빛이 어떻게 생겼는지 여쭈어 보려고요." "아, 그거야 내가 잘 알지, 검은 것은 검은 것이고, 흰 것은 흰 것이지." "그건 우리도 알아요. 그런데 어떻게 생겼냐구요?" 바윗돌은 참 난처하게 되었어요. 자기의 눈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남을 가르쳐 주어요? 바윗돌은 자꾸 헛기침만 했어요. 그때였어요. 어디서 무슨 소리가 들려 왔어요. 그것은 무엇인가 무너지는 소리 같았어요. 아! 그 동안 깊은 땅 속 어둠의 나라를 막고 있던 흙더미가 무너지는 소리였어요. 한 줄기의 빛이 어둠 속 나라에 들어왔어요. 검은 돌, 흰 돌 그리고 바윗돌은 눈이 부셨어요. 하지만 그 빛 때문에 서로를 비로소 볼 수 있게 되었어요. "검은 돌, 난 이제 너를 보았어. 그리고 나도 보았고, 바윗돌도 보았어. 빛이란 이처럼 편안하고 아름다운 것인 줄 이제 알게 되었어." "흰 돌, 우린 빛 때문에 자기도 남도 볼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세상도 바로 보는 거야. 이제 우린 넘어지지 않을 거야." "그래 맞았어." "그래서 우린 친구야." 어둠 속 나라는 한 줄기의 그 빛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었데요. 이제 빛의 세상이 되었겠죠!

  어두움에 익숙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빛을 싫어하나 빛의 가치를 인정 하면 빛을 좋아 하게 됩니다.

테레사 수녀(Mother Tersea)가 젊었을 때의 일이라 합니다. 그녀는 어느 날 빈민굴 어두운 방에 사는 환자를 발견합니다. 더러운 방에서는 냄새가 지독했으며 그 남자는 방에 램프(등잔)가 있는데도 켜지 않고 있었습니다. 테레사가 방 청소를 끝내고 램프를 켜자 사나이는 소리를 지르며 불을 껐습니다. 수녀가 지지 않고 불을 다시 켜자 환자는 램프를 던져 버렸습니다. 그는 "난 등불이 없는 것이 좋아. 1년 내내 나는 램프를 켜지 않았어!"라고 고함쳤습니다. 그는 육체의 질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 심했습니다. 이튿날 테레사 수녀는 새 램프를 사다가 불을 켜주고 돌아왔습니다. 그 후 10년이 지났습니다. 젊은 수녀들이 빈민굴의 사나이에 대한 보고를 했습니다. 그는 같은 빈민굴에 살고 있지만 깨끗이 개조된 집에서 의젓한 직업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수녀들에게 "그 키 작은 수녀님께 전해 주시오. 당신의 등불이 지금도 내 생활 속에 불타고 있다고(Your light is still burning in my life.)."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빛은 어둥움을 물리칩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설교가 한 사람이 관목 숲에 있는 한 작은 교회에 설교하러 갔습니다. 그가 그 곳에 도착했을 때 날은 어두워져 있었으며 불빛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였습니다. 그 때 관목 숲 여기저기에서 움직이고 있는 불빛들을 보았습니다. 회중들이 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폭풍우 때 사용하는 램프를 갖고 있었고, 예배당에 들어 와서는 예배당 벽 둘레에 있는 선반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자 곧 온 예배당 안은 불빛으로 가득 찼습니다. 각 사람마다 어둠을 쫓아버릴 빛을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빛은 질병을 치료 합니다.

계절병 SAD(Seasonal Affective Disorder)는 우울증의 일종이라 합니다. 크리스마스와 연초에는 무슨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가 어긋날 때, 우울해지고 졸음이 오고 식욕이 저하되는 증세라 합니다. 로젠탈 박사는 이 병에 대한 기발한 치료법을 개발했습니다. 전등을 평소의 10배 정도로 밝게 해서 하루 다섯 시간씩 그 불빛 아래에 있게 하면 우울증을 해소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처방이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낮을 연장시키는 방법이라 합니다.

  빛은 변화를 시킵니다.

  어떤 의료선교사의 간증을 소개한 글이 있습니다. 의사로서, 선교사로서 동남아시아에서 사역하는 분으로 예수를 믿게 된 동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간증을 합니다. 제가 몹시도 공부에 지쳐서 피로한 몸을 이끌고 학교 식당에 들어간 어느 날. 그 식당의 한 구석에 평소 존경하던 교수님 한 분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분은 식사를 하기 전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평안해 보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가지고 있는 그 안식이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 없었습니다. 또 그 분이 가진 청결한 삶의 모습이 제게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문득 저도 그 교수님처럼 예수님을 믿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에게 다가가서 신앙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 교수님을 통해서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교수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의 빛을 갚기 위해서 의료선교사로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교수님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의 삶을 간증하는 일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어두고 있었다면 그와 같은 열매를 맺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억지 쇼를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분이 내 삶을 지배하기 때문에 성령의 지배하심을 받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배어 있어서 참으로 드러나고 있어야 합니다.(디럭스 바이블- 빛 된 삶) 

  기독교로 개종한 한 인디언 추장이 예배 시간에는 매우 열렬히 기도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극진히 대접하고 선물도 드리며 목사님의 일을 열심히 도와드리곤 하였습니다. 그 인디언 추장의 이런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던 목사는 그에게 "기쁨에 넘친 헌신을 하며, 자신에게도 친절히 대해 주고 또한 그렇게 후한 선물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인디언 추장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어둠 속에서 해매던 절망적인 심정을 잘 모르실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나를 그 어둠 속에서 구원이 있는 환한 빛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월 스트리트(뉴욕의 금융 재정의 중심가)에 화제의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모빌(Mobil) 회사의 최고 경영진 중의 한 사람인 윌리엄 그랜빌(William Granville)씨입니다. 그는 흑인으로 세계 실업계의 정상에 올랐습니다.  윌리엄 그랜빌의 십대 소년 시절, 그는 트렌턴(뉴저지 주청 소재지)의 흑인 갱단 두목이었습니다. 그가 교도소에 갇혀 있을 때 상담 교사인 베시 힐 선생이 자기가 책임진다는 각서를 쓰고 그를 빼내어 공부 시켰습니다. 그의 부모는 공장 노동자였으나 몹시 가난해서 처참한 흑인 빈민굴에서도 여기저기로 이사를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가 거리에서 본 것은 마약 판매자와 창녀 소개자와 폭행뿐이었습니다. 그는 1983년 트렌턴에 그랜빌 학교(Granville Academy)를 세웠습니다. 그랜빌 학교는 8학년 흑인 학생을 받아 3년 간 훈련시키는 일종의 방과 후 학교입니다. 이 학교의 교훈은 그의 유명한 저서의 이름과 같은 <할 수 있다고만 말하라(Just say yes)>입니다. 이 교훈처럼 아이들의 마음을 어두운 데서 밝은 쪽으로, 부정적인 데서 긍정적인 쪽으로 돌려놓는 훈련을 이 학교에서는 끊임없이 시켰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랜빌 학교 출신이 100% 대학에 진학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학교에서는 컴퓨터, 회계학, 재정 관리 등을 가르치는 동시에 미국의 유명한 회사들을 학생들에게 견학시켜 밝은 세계를 보게 하고 원대한 꿈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이미 그랜빌 학교는 미국 내 19개 도시에 그 분교가 설립되었으며, 계속 확장되어 아마도 수십 년 뒤에는 그곳 출신들이 미국 흑인 실업계를 주름잡게 될 것입니다. "힐 선생님의 기도와 정성으로 나 같은 깡패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셨으니 나도 어두운 뒷골목의 아이들을 밝은 세상으로 옮겨 주는 것입니다."라고 그랜빌 씨는 말합니다. 사람은 변화할 수 있습니다. 빛을 던져 주기만 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밝은 세상으로 인도하기)

  빛은 나눌수록 많아집니다.

하나의 촛불로 다른 불을 초에 붙이려고 할 때 빛을 나누어준다고 해도 잃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불은 나누어주어도 잃지 않고 오히려 그 밝기가 두 배로 늘어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어두운 구석구석에 나누어 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수 세기 전, 잠언서의 저자는 영감을 받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주님의 등불이니라."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빛을 가지고 세상으로, 각각에게 주어진 작은 세상으로 나아갈 때에, 그와 마찬가지로 어둠을 쫓아내고 인생의 거짓된 이론들을 고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나라를 되찾은 날을 광복 곧 빛을 찾았다고 합니다. 이 빛을 기뻐하며 사랑하여야 하는데 세상은 어떠합니까?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9)

어두움(스코토스)은 빛과 반대되는 완전한 어두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나라 잃은 상태가 어두움이었습니다. 신령적으로는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어두움 속에 처해 있는 자는 빛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다만 외부로부터 빛이 적극적으로 비춰들 때 비로소 그 빛을 인정합니다.

'빛'(포스)은 달빛이나 별빛, 불빛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태양 빛'을 의미합니다. 나라를 되찾으므로 환한 태양 빛이 비취는 광명 천지가 되었습니다. 신령적으로는 그리스도에게 적용 시킬 때 '유일한 빛'(the one light), '참 빛'(1:9)이신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국가적으로는 빛을 회복한 나라를 사랑하고 신령적으로는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두가 됩시다.
(강 성 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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