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 (삼하 15:1- 6, 호 12:6)

  • 잡초 잡초
  • 322
  • 0

첨부 1


오늘은 우리 민족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지 60주년이 되는 매우 뜻깊은 해입니다. 50주년의 희년을 기념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60주년을 맞았습니다. 이제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다시금 광복 60주년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면서, 한편으로는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부분들을 반성하며 이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감당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제가 감신에서 공부할 때 구약을 가르쳐 주셨고, 지금은 대한성서공회 총무로 계시는 민영진 박사님께서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우학할 때 받았던 충격적인 이야기를 잠깐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분이 1970년대에 유학하면서 자녀들을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켰는데, 1학년은 교과서가 없이 선생님 중심으로 수업을 받고, 2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교과서를 나누어 주었는데, 제일 먼저 나누어 준 책이 국어책이었답니다.

궁금한 마음으로 자녀의 2학년 국어책을 펴 보니까 놀랍게도 첫 과의 내용이 "옛적에 우리는 이집트에서 바로의 노예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바로 신명기 1장 20~21절의 내용이지요. 그것이 이스라엘 초등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의 첫 내용이었습니다.

처음 교과서를 대하는 아이들에게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먼저 알려주고 있는 점과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강한 손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시고 해방시켜 주셨다는 신앙고백적인 내용을 가르치기에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고 민영진박사는 충격적으로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는 자랑스러운 다윗 왕의 역사도 있고, 지혜의 왕 솔로몬의 이야기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이면 그 고난의 이야기부터 가르쳤을까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광복절이 다가올 때마다 반복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반일감정입니다. 36년 동안 억압을 당했다는 부분이 잊혀질 수 없을 만큼 큰 상처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언제까지나 과거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잊혀질 듯 하면 다시 되살아나는 반일감정에서 이젠 우리도 의연하게 해방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우리가 미국과 함께 참전했던 베트남전쟁은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원수의 나라요 침략자의 한 무리라고 볼 수 있지만, 그들은 벌서 우리를 용서하고 오히려 함께 교류하고 함께 아시아 국가의 동반자로서 자리매김하길 원하는 모습을 볼때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는 것을 감출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도 자꾸만 반일감정을 자극시키는 부분을 강조하여 수업하는 일부교사들도 문제입니다만,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도 아직까지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의 동반자로서 그들을 품에 안지 못하는 이들이 있음을 부끄러워 해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세계 선교를 이야기하면서 일본을 선교하겠다고 하면 괜히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일본선교냐는 것이지요. 오늘 이 시간 혹시 그런 마음을 가진 분이 있다면 주안에서 새롭게 생각과 가치관을 바꾸시기를 간절히 부탁 드립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배우는 중요한 교훈을 한 단어로 말한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기억'이라는 단어입니다. 구약성경이 무엇입니까?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이 무엇이었는가를 성경 속에서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기억 속에는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지난 주에 다윗의 자녀들이 해서는 안될 부끄러운 내용들을 보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 자신도 정말 감추고 싶은 잘못된 부분들 까지 성경 기자는 감추지 않고 그대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진을 찍으면 다른 사람이 아무리 잘 나온 사진이라도 내가 혹시 눈을 감았다거나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는 중에 촬영된 그런 사진은 찢어 버리고 싶잖아요. 감추고 싶은 것입니다. 이왕이면 좀더 잘나온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속침 "뽀시시" 하게 만든 사진이 유행이지 않습니까? 이게 진짜 얼굴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많은 부분이 수정되거나 감추어져 있지만 자신만은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겠지요.

예루살렘 성지순례시 독일 나치정권에 의하여 핍박을 받다가 죽음을 당한 약 600만명의 유대인들의 학살기념관 "야드바셈 박물관"을 순례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치 정권이 처음에는 유럽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 중에서 어른들만 죽이다가 나중에는 아예 씨를 말려야 한다며 부녀자와 어린아이들 까지 무참히 죽였던 역사적 현장을 그들은 조용히 만들어 놓고 초등학생을 비롯한 모든 학생들에게 민족교욱의 학습현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입니다.

600만명을 죽인 히틀러 정권은 수용소에서 총으로 죽이다가 감당을 못하자 유대인 스스로 웅덩이를 파게 해놓고 거기에 생매장을 하기도 했고, 목욕탕을 독가스실로 개조를 해놓고 목욕을 시킨다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벌거벗겨서 운동장에 줄을 세워놓고 차례로 독가스실에 들어가게 하는 수법으로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는 등 그들의 학살 방법은 이루말할 수 없는 천인공로할 방법이었습니다만, 그 잔인한 내용들이 놀랍게도 사진으로 촬영되어 전시 되어 있음이 또한 놀라울 따름입니다. 역사에 있어서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드바셈 박물관의 모든 과정을 관람하고 나서 출구에서 우리는 아주 놀라운 문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억은 우리를 구원하고, 망각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포로가 되게 한다"는 문구였습니다. 히틀러 정권 당시의 독일을 향하여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 그리고는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야드바셈 학살기념관에 데려가 과거 조상들의 고통의 현장을 보여주며 새롭게 마음가짐을 다지게 해 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키워드는 바로 "기억"이라는 단어입니다. 구약성경을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1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 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들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그 날이 오면 이집트 사람과 앗시리아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 이 세 나라가 모든 나라의 복을 주게 될 것이다. 만군의 하나님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며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백성 앗시리아야, 나의 백성 이스라엘아 복을 받으라 라고 하실 것이다" 성도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현재 우리 삶으로 적용을 해 보면 남쪽으로 보면 이집트와 같은 일본이 있어서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삼국시대 이후에 괴롭혀 왔습니다. 요즘에 이순신이라고 하는 드라마가 최고의 인기를 끄는 이유도 일본과의 반일감정들이 작용을 해서 이순신이 이기는 장면을 보면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껴요. 나쁜 놈들, 죽어야지. 당연히 죽어야지. 그러면서 신이 나는 거예요.

앗시리아와 같은 북쪽에 중국이 있어서 삼국시대 이후에 끊임없이 우리 나라를 억압하고 힘들게 했어요. 군신관계를 요구해서 우리 나라를 왕을 하나 세워도 그 북경 자금성에서 몇 달 씩이나 기다리면서 황제를 만나면 그것도 쉽게 쉽게 허락해 주는 것도 아니고 이런 저런 이유로 왕의 임명을 늦추고 사신을 보내 조사한다고 그러면 우리는 그 사신 앞에서 절절매면서 아첨을 하고 아양을 떨면서 왕 하나 세우는 것도 허가를 받았습니다.

앗시리아 같은 중국, 이집트 같은 일본이 우리나라도 이스라엘처럼 남북으로 그렇게 수백수천년 동안 그렇게 힘들게 했었습니다. 일본 없어지면 좋은 나라, 중국 오랑캐 같은 나라 그러면서 우리는 해가 오면 그런 감정을 되새기는 것이 애국인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너무나도 우리는 부끄러운 우리의 역사 의식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 하십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 중심으로 해서 교류가 되고 더 나아가서 나의 백성 앗시리아야,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백성 이스라엘아 복을 받을 지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집트를 복을 주시고 앗시리아도 복을 주시겠다.

하나님께서 일본도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중국도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대한민국도 복을 주시고, 모두가 더불어 함께 하는 복된 나라의 통로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들 삶 속에 소망이 되시고, 기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수치스러운 역사를 기억하자는 이유는 적개심을 길러서 보복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지요. 다시는 적대관계를 맺지 않고, 긴장관계에 있던 나라가 동반자가 되고, 나아가 복을 나누어 주는 복의 통로가 되자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 때문에 일본이 복을 받고, 일본 때문에 우리가 복을 받고, 우리 때문에 중국이 복을 받고, 중국 때문에 우리가 복을 받는 복의 통로가 되자는 것이지요.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산주의 국가의 사회주의적인 체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토록 모택동은 기독교를 억압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 이후에 계속해서 중국의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비판했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핍박당하고 순교당한 중국의 크리스찬들의 수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지하에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를 비롯해서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고통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제는 3자 교회를 중심으로 그들의 교회가 국가의 공인을 받고, 인정을 받지만 지금도 수틀리면 중국의 공안들을 동원해서 중국의 교회 지도자들을 감옥에 가두는 그런 일들을 그들은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와중에서는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의 통로자들가 되는 자들을 통해서 중국의 크리스찬들이 무려 7000만명이나 되었습니다. 남북한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물론 중국 전체에 13억의 인구로 본다면 아직도 5%에 지나지 않은 그런 %가 숫자로 보면 굉장한 숫자입니다.

중국을 복음의 둥지로, 복음의 동역자로 생각하고,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야 하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누려야 할 동반자로 생각한 믿음의 선각자들에 의해서 중국에는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일본은 인구가 약 1억5천 정도 되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일본의 기독교인들은 약 1%가 되지 않아요. 120만에서 150만 정도의 기독교인들이 일본은 종교적으로는 자유이지만 우상은 얼마나 많은지, 일본의 우상을 800만 가지의 우상이 있는 나라라고 말합니다. 세계에서 우상이 가장 많은 나라가 일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우상이 우글거리는 일본 안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일본의 어느 목사님은 그 일본의 신앙을 이야기 하는데 어려움을 말합니다. 목사인 자기의 아이들도 어렸을 때는 함부로 교회를 나오지 못했대요. 미성년에서 이제 성년이 되면서 가족회의를 해서 이제 내가 일본의 신도를 믿을 것인지, 일본의 어떤 불교를 믿을 건지, 너의 아버지가 믿는 기독교를 믿을 것인지 너가 선택을 하라고 할 때 기독교를 믿겠다고 선택하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만 우리 가문에서 너를 제한다고 하는 아픔을 겪는 것이 일본의 현실입니다.

자유로운 민주주의 같지만 종교적으로는 얼마나 신앙을 가진다고 하는 것이 어려운 나라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일본에도 하나님의 축복을 누려야 한다고 하는 그런 신앙의 선각자들이 일본선교를 끊임없이 해 온 이래 일본도 150만 가까운 크리스찬들이 생겨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일본이나 중국같은 나라를 생각하면서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나누어야 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의 백성 앗수르야, 나의 백성 이집트야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나의 백성 일본아, 나의 백성 중국아 하는 음성을 들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화해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줄 믿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하나가 될 수 없는 그들의 사고, 그들의 민족의식, 그들의 종교적인 우월, 이런 것들을 주님을 깨뜨리시기 위해서 그 원수된 그들을 깨뜨리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십자가의 피를 흘리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는 담을 허무는 능력이었습니다. 원수된 자를 가해자고 가로막힌 하나의 관계로만 만들어가는 통로였습니다. 에베소 2장은 말씀합니다.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드셔서 평화를 만드시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할 능력이 곧 십자가의 능력이 된 줄 믿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을 고백하면서도 화해하지 못한다고 하면 아직도 십자가의 은혜 속에 거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광복 60주년을 맞이한 지금 이제는 일본에 대해서 우리가 그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이제 그들을 축복의 동반자로, 파트너로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 달 한일목회자 교류세미나에서 삿뽀로에서 열렸을 때 수많은 일본목사님들이 우리와 함께 세미나를 하면서 그들은 의식이 깨어있는 목사님들은 세미나에서 발표할 때나, 잠깐 나와서 인사할 때도 우리 한국목사님들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우리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우리가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일본의 역사학자들, 정치가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우리가 우리 한국 목사님들에게 먼저 사죄를 합니다. 우리가 이제 그 이야기 좀 그만 해요. 이제 그 이야기 안 해도 됩니다 라고 주문을 해도 그 분은 나와서 순서가 있을 때마다 그 이야기를 빼 놓지 않았어요.

이제 우리는 그들을 벌써 용서 했어요. 이제는 그들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야 할 축복의 동반자로 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광복 60주년이 되어서 이제는 일본과 화해와 축복의 동반자로 나아가야 하는데 우리의 정치세계는 자꾸만 방해요인들이 생깁니다.

일본 검인정 교과서의 역사왜곡,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 일본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강제 징용자들의 마을 우또르에 대한 억압등 이런 문제들이 자꾸만 우리를 화해의 무드를 깨뜨리고 오히려 반감을 가지게 하는 방해요인들로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도 시련이요, 시험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것들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백성 앗수르야 하고 선포하는 것처럼 그들을 만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함께 가야할 축복의 동역자로써 그들을 품에 안을 때 진정한 광복의 의미는 우리에게 다가올 줄로 믿습니다.

광복절이 다가올 때마다 반일 감정이 일어나고 그것이 곧 애국인 것처럼 조장되는 잘못된 사회 분위기를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광복 60주년을 맞는, 이제는 주님이 화해의 주장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화해의 사명을 맞겨주신, 화해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해방을 주신지 60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진정한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욕심 때문에, 우리의 완악함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화해자로 오신 주님, 이스라엘과 이방을 화해 시키셔서 은총에서 멀어졌던 그들을 품에 안으셨던 것처럼,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 민족을 화해의 공동체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젠 우리가 그들에게 진정한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 요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