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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쟁의 승리자 믿음 (창 1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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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도 싸움이 있습니다. 가정에도 싸움이 일어나고, 직장에도 알게 모르게 싸움이 일어납니다. 세상에서 뿐만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발생합니다. 더 나아가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사람, 개인 안에서도 이 싸움이 일어납니다. 지금도 미국은 전 세계 곳곳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서로 서로 동맹을 맺고 네 편 내 편을 가르고 있습니다. 이거도 역시 지금이나 옛날이나 같습니다.

아브람 시대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돌라오멜이라는 맹주를 중심으로 한 네 나라 연합군과, 소돔과 고모라를 중심으로 한 다섯 나라 연합군과의 싸움입니다. 그돌라오멜은 그 아홉 나라 중 가장 힘이 센 나라였습니다. 여덟 나라로부터 12년 동안 해마다 조공을 받고 그 나라들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13년 째 되던 해에 소돔과 고모라를 중심으로 한 나라들이 그돌라오멜을 배반하고 세금 안내겠다고 선포를 한 겁니다. 그러자 그돌라오멜은 주변의 가까운 나라 세 왕을 불러 함께 싸우러 가서 혼을 내주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4나라 연합군과 5나라 연합군이 염해에 모였습니다. 염해로 오면서 그돌라오멜은 그 주변 나라들을 공격하면서 파죽지세로 점령하면서 왔습니다. 이 전쟁에서 그돌라오멜은 5나라를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5나라 사람들은 죽거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재물도 빼앗기고 종들도 잡혀갔습니다. 이 때 소돔성에 살던 아브람의 조카 롯도 함께 잡혀갔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자기 군사 318명을 데리고 가서 조카와 그 가족과 종과 재물과 가축을 도로 빼앗아 왔다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모든 전쟁과 싸움의 시작은 죄에서 출발합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속에 있는 욕망과 욕심이 더 가지려 하고 상대방의 것을 탐내고 빼앗으려다가 싸움이 일어납니다. 비밀 고백을 하나 해야겠습니다. 쌍둥이가 올 해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같은 학교에 들어가기를 기도했는 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는가 봅니다. 아이들이 학교가 결정되자 마자 핸드폰부터 사달래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공부 잘해서 5등까지 올라가면 사준다. 그렇게 해서 일단 입을 막았습니다. 그런데 도훈이 녀석이 기훈이 핸드폰을 자기 것처럼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을 해요. 그래서 필요할 때마다 연락을 하고 하는데 갑자기 신훈이가 학교에 적응을 잘 못하는지 입학을 하자 마자 아프고 이틀을 병원에 다니고 하면서 고생을 합니다. 새벽기도까지 아이들에게는 힘이 들었는가 봅니다. 그래서 안스럽기도 하고 필요할 때 얼른 연락을 할 수도 있어서 하나를 샀습니다. 아이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엄마가 필요해서 샀습니다. 저녁에 저더러 사왔다고 하길래 저거 또 도훈이가 샘을 내고 뭐라고 하지 않나 하면서 걱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훈이에게 단단히 다짐을 받았습니다. "너 도훈이에게 자랑하거나 약오르게 하지마." 그랬는데 의외로 도훈이가 잘 넘어가 주었습니다. 탐내고 욕심을 부리면 싸움이 될텐데 잘 넘어갔습니다.

자기 입장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맞고 건너방에 가면 며느리 말이 맞다고 합니다. 싸울 때는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 주장이 있고 상대방의 주장과 잘못도 서로 다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어느 한 쪽만 잘못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싸움은 양쪽을 다 들어봐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싸움은 피해야 합니다. 안 하는 것이 지혜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본문의 싸움도 서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돌라오멜은 네가 나를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조공은 받지만 너를 지켜주고 전쟁이 나면 싸워주지 않느냐 하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편에서는 12년이나 섬기고 바친 것도 억울한데 계속 받치라고 하니 이제는 억울해서 더 이상 못 바친다는 말입니다. 이러니 싸움이 됩니다. 여러분은 누구 편입니까? 대부분이 싸움에서는 약자 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편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손들어 주시는 쪽에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정확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자하고는 안 싸우기로 했습니다. 싸워서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슬그머니 져주면 모르거니와 백전 백패입니다. 그리고 내가 잘했던 잘못했던 싸우면 머리가 아파서 싸우는 것 자체를 싫어  합니다. 그냥 좋게 살아도 힘든 세상을 왜 싸우며 삽니까? 골치 아파서 긴장관계로 살기가 싫습니다. 상대방하고 못 풀면 나 혼자라도 풀고 기쁘게 삽니다. 그리고 상대방 입장을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상대방 사정도 이해가 되고 수긍이 갑니다.

그러나 세상의 싸움 나라와 나라의 싸움은 좀 심각합니다.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습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합니다. 또 우리가 이겨야 내가 삽니다. 우리가 지면 다 죽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전쟁이 이와 같습니다. 영적인 세계는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중간 지점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니면 사단이고, 죄 아니면 의입니다. 지옥 아니면 천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창세기의 전쟁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어느 편엔가 서야 합니다.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해야 합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어느 쪽에 서시겠습니까? 그것은 자명합니다. 하나님 쪽입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또 이기는 쪽입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이해관계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이기는 쪽도 하나님 쪽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체면과 이 땅에서의 따돌림을 무서워 해서 교회는 이름만 걸어놓고 체면유지만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이 더 매력적이고 자극적이고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는 다니는 것이고 언제라도 좋은 곳에서 부르면 달려나가고 싶어하지는 않습니까? 오늘 저녁에 친구가 한잔하자고 나오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져버린 전쟁

창14:10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군사가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전쟁에서 소돔군대가 졌습니다. 힘으로는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세상사람들과 대결해서 이길 줄 아십니까? 못 이깁니다. 돈으로나 힘으로나 꾀로나 못 당합니다. 왜입니까? 그들에게는 사단의 세력, 공중권세의 세력, 마귀가 다스리는 권력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설픈 믿음을 가지고 그들을 향해 나간다면 우리가 당해 내지 못합니다. 정말 당당한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승리를 합니다.

전쟁에서 지면 모든 것을 다 빼앗깁니다. 심지어 생명까지도 빼앗깁니다. 처음 롯이 왜 소돔을 택했습니까? 살기가 좋아 보이고 땅이 좋고, 문명이 발달하고, 에덴같은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눈에 보기 좋다고 해서 덜컥 선택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이미 전쟁에서 지는 선택입니다. 그것은 결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기는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물질과 돈을 가지고 사단은 나를 빼앗고 나를 이용합니다. 실은 물질도 하나님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지만 사단은 그것이 자기 것인 양 자랑하면서 사람들을 끌어 들입니다. 그것만 가지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너의 행복을 위해서 어떤 짓도 거침 없이 서슴없이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악의 길입니다. 악이 나를 기다리고 결국 악과 함께 멸망합니다.

독일의 펄학자 칸트의 아버지는 폴란드 사람이었습니다. 고향인 폴란드의 슐레지엔으로 가기 위해서 말을 타고 산을 넘는데 강도들이 나타났습니다.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말도 빼앗겼습니다. 강도가 물었습니다. "숨긴 것은 없겠지?" "없습니다." "그럼 가거라. 해치지는 않겠다." 무사히 목숨을 건지고 빠져나온 칸트는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바지춤에 무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꺼내보니 비밀히 감추어둔 금덩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강도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회개합니다. 조금 전에는 너무나 무섭고 당황해서 정신이 없어서 숨긴 것이 없느냐고 물을 때 없다고 했습니다. 가다보니까 이 금덩이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금덩이를 강도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빼앗았던 물건과 말을 돌려 주면서 엎드려 말했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당신이 두렵습니다." 하더랍니다. 바보같은 순결함에 그 강도들도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믿음의 행위는 우리에게 어리석어 보이지만 결국 승리하게 하고 나를 높이 들어 줍니다.

속 시원하다

창14:11-12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12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아브람을 버리고 떠나버린 조카 롯. 잘 갔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브람은 한편으로 롯 때문에 미움과 아쉬움을 간직했을 겁니다. '삼촌에게 좋은 곳을 넘겨주지. 녀석하고는...' 섭섭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롯이 전쟁에서 잡혀 갔다고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고 녀석 잘됐다. 나를 버리고 배반하고 떠나더니 당했구나. 싸다 싸.' 할 겁니다. 고소하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조카가 아파할 때 자기도 아파합니다. 이번 "여호와의 행적 찾기"는 서로가 함께 고난과 기쁨을 나누자는 기도회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내 고난으로 생각하면서 내 잠을 드리고 내 정성을 주님께 드리겠다는 결심을 하는 기간입니다.
이웃이 안될 때 속 시원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잘되면 같이 기뻐해 주고 축하해 주십시오. 그리고 누구와 비교하지 마십시오. 비교해서 누군 어떻고 누군 어떻다고 하는 것은 사단의 방법입니다.

믿음의 행동

창14:13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롯이 위기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아브람은 즉시 자기의 군사를 동원합니다. 지체하면 어떤 어려움이 생길지 모릅니다. 조금 지나면 조카가 죽을 지도 모릅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믿음이란 행동하는 것입니다.

속으로는 한편 밉기도 하지만 믿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구출하러 갑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히11:1-2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눅18:42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은 소경이 예수님께 소리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이 그를 부르십니다. "네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실 것을 믿지 못하면 구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셨습니다.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브람이 즉시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318명. 창14:14-15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아브람을 움직이게 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돌라오멜은 무서운 왕입니다. 함부로 나섰다가는 죽음을면치 못합니다. 그에게는 더 많은 군대와 싸움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는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갔습니다. 밤에 갔습니다. 이것은 지혜요 작전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작전을 세웁니다.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주시는 지혜로 행동합니다. 이것이 믿음 가진 자의 결단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렇게 보입니다. 군대의 숫자로나, 실력으로나, 경험으로 볼 때 아브람이 이길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미 포기하고 자기 합리화를 시켰을 겁니다. 그러나 그가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믿음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과학을 뛰어 넘습니다. 환경을 능가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없다고 할 때 두 손들고 나를 포기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하나님은 손을 들어 주십니다.  이성과 상식으로 생각했다면 아브람은 조카를 포기했을 겁니다.

상식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님도 십자가를 포기하고 살기 위해 다른 길을 선택했을 겁니다. 얼마든지 이유가 타당합니다. 전도를 더 많이 하기 위해서, 도와줄 사람이 있어서,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아직 때가 돼지 않아서. 등등...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합리화, 자기 상식을 포기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내 생각은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버릴 수 있는 마음, 내 유익이 아니라 타인과 하나님을 위해서 구하고 간구하는 믿음. 그래서 아브람은 그 믿음으로 성공을 합니다. 창14:16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더라 빼앗겼던 모든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부녀들, 그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다 데려왔습니다. 잃었던 재물과 짐승도 다 가지고 왔습니다. 할렐루야!!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안되는 일이 되었고,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무엇이 이런 일을 일으켰습니까? 상식입니까? 경험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한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사람이 한 것은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상식과 경험으로 한 일에는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기도를 안하는데 어떻게 응답을 주시며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최 진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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