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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서 세우신 집 (시 1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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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0편에서 134편까지 열다섯 편의 시에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성전의 교육관 입당을 두 달 정도 앞에 두고 성전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해지도록 계속해서 이 시들을 본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123편이 본문이었는데 오늘 왜 127편으로 뛰었을까?" 하는 성도가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성도가 계시다면 먼저 "감사합니다"하고 싶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의 본문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는 것입니다.
전에 소속해 있던 교회에서 주일 오후 예배의 설교를 맡았는데 문답을 많이 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거의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본문은 어디였습니까?" 대답이 없습니다. "내용 가운데 기억나는 것 하나만 말씀하세요" 침묵이 흐릅니다.

이 문답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지난 주일 설교에서 실천에 옮긴 것, 또는 실천에 옮기려고 힘쓴 것은 무엇입니까?"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묻기 위해서 제목도 물어보고 내용도 물어보는 것인데 제목과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니 실천 여부는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 되고 맙니다.
나중에는 성도들이 지난 주일 주보도 미리 펴놓고 설교 내용을 필기도 해서 대답을 잘 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서라도 설교 내용 가운데 하나는 실천하려고 애쓰게 되었다는 유익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주일 설교가 화해를 주제로 한 것이었다면
교회 오기 전에 사이가 서먹해진 사람을 찾아가 만나고 오는 성도도 있었습니다.

여하튼 지난 주일 본문을 기억하는 성도들에게는 "감사합니다" 하고서 그 다음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주일 예배에만 나오지 마시고 다른 예배도 빠짐없이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하는 것입니다. 수요예배에서 124편, 금요합심기도회에서 125편, 오늘 아침 남선교회 조찬기도회에서 126편을 본문으로 설교했기 때문입니다.

광고의 효과는 반복에 있다고 합니다. 반복해서 광고를 대하다보면 물건을 살 때 자기도 모르게 그 상품에 손이 간다는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반복해서 말씀 드릴 때 새 성전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지기 바랍니다.
시편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인데 목양교회의 새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지어 부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이 붙은 열다섯 편 가운데 열 편은 지은이를 모릅니다. 네 편은 다윗의 시이고 한 편은 솔로몬의 시입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127편이 바로 솔로몬의 시입니다. 다윗이나 솔로몬이 직접 지은 것이 아니고 뒤에 사람들이 다윗의 이름, 솔로몬의 이름을 갖다 부쳤다고 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만 우리들에게는 솔로몬의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마음으로 이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특별한 감회를 가지고 이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가 이 성전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연세가 많고 깊은 병을 앓고 있는 어느 유명한 화가가 자기의 대표작을 모아 전시하는 전시회에 참석해서 자기 대표작들을 돌아보는 사진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자기가 심혈을 기울여 그린 작품들을 돌아보는 그 화가의 표정이 아주 흐뭇해 보였습니다. 솔로몬의 심정이 그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성도 여러분도 나중에 신축 성전 앞에 설 때 솔로몬과 같은 감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때가 아니고 성전신축공사를 할 때 목양교회 성도로 부름 받고 목양교회에 출석하며 이 일에 동참하고 있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기관의 가장 고통스러운 때 고통스러운 일들에 동참한 사람이 애정도 갖고 긍지도 갖게 됩니다.

본 회퍼라는 독일의 신학자가 미국에 유학을 갔는데 히틀러의 독재가 날로 심해 간다는 소식이 계속해서 들어옵니다. 본 회퍼 목사는 유학을 중단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친구들이 강력하게 말렸습니다. 이 때 본 회퍼 목사의 대답이 "조국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으면 뒷날 조국에 대해 할말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독일에 돌아와서 고백교회 운동을 지도하다가 순교 당했습니다.
본 회퍼 목사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가르침은 독일뿐만 아니라 현대교회 전체에 지금도 아주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뒷날 신축성전 앞에서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이 성전이 지어질 때에" 하는 질문이 들릴 때 "예, 저는 거기 있었습니다" 대답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건축한 성전에 올라가면서 솔로몬이 강하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것이다"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혜가 뛰어난 왕입니다. 지혜 가운데 으뜸이 되는 지혜가 무엇입니까?
"내 힘으로는 안 된다. 내 지혜만 가지고는 안 된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다 할 수 있다, 내 힘 가지고, 내 지혜 가지고 할 수 있다"고 하면 미숙한 지혜이며 헛된 지혜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내가 온전히 내 힘으로 이 성전을 세웠도다" 했다면 솔로몬은 성숙한 지혜의 소유자라고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노래를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이렇게 노래했기 때문에 솔로몬의 지혜가 감동을 주는 지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노력은 무익한 것입니다.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애써 수고해도 헛된 것이 됩니다.
하루의 일이 그렇게 되고, 애써 추진한 프로젝트들도 허탈한 것들이 됩니다.
요즘 어려움을 겪는 재벌들이 많습니다. 경제정책이 바뀌고 경제발전의 양상이 변화함에 불가피하게 겪어야 할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재벌을 일으키고 불철주야 노력을 해서 오늘이 있게 한 창업주들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적으로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그 재벌들이 한국 경제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수고는 내용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그렇게 됩니다. 힘쓰고 애씀이 넘칠지라도 그것이 밑 터진 항아리에 붓는 물과 같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요즘 바다 밑에 가라앉은 타이타닉 호를 건져 올리는 것이 좋으냐, 그대로 바다 밑에 두는 것이 좋으냐 하는 논쟁이 있다고 합니다. 타이타닉 호는 그 당시 사람의 기술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걸작이었습니다. 아주 튼튼했고 초호화 고급 여객선이었습니다. 선체 길이가 269m였고 무게가 46,328톤이었습니다. 배 밑창을 이중으로 했고 배를 열두 칸으로 막고 칸마다 칸막이를 했기 때문에 별명이 불침선(不沈船), 침몰하지 않는 배였습니다. 이 배를 선전할 때 "하나님도 가라앉힐 수 없는 배"라는 선전문구를 썼습니다. 그러나 1912년 4월 10일 2224명의 승객을 태우고 영국에서 뉴욕을 향해 첫 항해를 떠났다가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했습니다. 구명정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1513명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않으면 인간의 기술로 아무리 완벽하게 무엇을 해 낸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여기서 잠은 믿음의 순종을 통해 얻어지는 마음의 평안을 말합니다. 하루종일 수고하고 그로 인해 육신이 피곤한 가운데서도 평안을 얻지 못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평안한 마음으로 달게 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독일 담스타트라는 곳에 마리아 부흥자매단이라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이차대전 이후 독일이 폐허가 되었는데 건물들이 다 파괴된 폐허도 문제였지만 정신적인 폐허가 더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이 의욕을 잃었습니다. 바실레아 슈링크라는 루터교의 여성신앙지도자가 신앙으로 소망을 심어주기 위해서 여성들만의 힘으로 이 자매단을 만들었습니다. 공동체 안의 예배당, 숙소, 식당, 인쇄공장 그 밖의 시설도 모두 여성들이 직접 건축했습니다.
그 건축과 관련되어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자매단 안에 불화가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일을 하는데 일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재료를 가지고 벽돌을 찍어도 금이 간 벽돌이 생산됩니다. 규격을 아무리 엄격하게 지켜도 이쪽과 저쪽이 서로 어긋납니다.독일 사람들이 규격을 얼마나 엄격하게 지킵니까? 그래도 소용이 없습니다. 레일을 깔고 밑에 바퀴가 달린 수레로 흙을 나르는데 이유도 없이 수레가 탈선을 합니다. 사고도 자주 일어납니다.
바실레아 슈링크 여사는 공사를 중지시켰습니다. '이대로 공사를 계속해서는 의미가 없다. 이런 상태로는 건물이 완공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자매단의 자매들을 다 교회에 불러모았습니다. 우리 안에 불화가 있어서 주님이 함께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우리 다 참회의 기도를 하자고 했습니다. 자매들이 참회의 기도를 하고 화해를 한 다음에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일이 이상하게 쉽게 잘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쉽게 건물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설교를 연구하는 목사님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모여 지난 주일 자신의 설교를 내놓고 서로 토론을 합니다. '이 설교에서 좋은 점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족한 점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의견을 나눕니다. 좋은 설교라고 알려진 설교문을 가지고 '이 설교를 왜 좋은 설교라고 하는가?' 분석도 합니다.
가끔 특정한 주일이 되면 본부에서 설교문이 오는 수가 있습니다. 은급주일, 평신도 주일, 이럴 때 설교문이 옵니다. "이 설교문 대로 설교하십시오" 또는 "이 설교문을 참고해서 설교하십시오" 하는 주문이 따릅니다.
다음 주일이 통일 기원주일인데 통일 기원주일에도 설교문이 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설교문 대신에 한국기독교총연합과 교회협의회의 평화통일 기도문이 왔는데 그 기도문을 교독문 대신 사용하려고 합니다.
어느 날 이 설교연구모임에서 한 목사님이 "어제 본부에서 온 설교문을 가지고 그대로 설교했는데 성도들의 반응이 그저 덤덤했습니다. 아마 그 설교문이 신통하지 않았나 봅니다"라고 했습니다.
또 한 목사님은 "나도 그 설교문을 가지고 설교했는데 성도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토론의 주제는 "같은 설교인데 왜 반응이 다른가?"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같은 설교라도 처지와 환경, 성도들이 은혜를 사모하는 정도에 따라서 반응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그 설교문을 가지고 기도를 얼마나 했습니까?" 성도들이 덤덤했다고 한 목사님은 "기도를 많이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내가 애써 준비한 설교가 아니고 그저 전달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한 두 번 읽어보고 단에 섰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한 목사님은 "다른 때보다도 더 많이 기도했습니다. 내가 준비한 설교가 아니기 때문에 소흘하게 여기지 않도록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이 이 말씀 가운데 함께 계셔서 성도들이 은혜를 많이 받도록 기도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들은 그 날 '아, 같은 설교라도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고 기도를 얼마나 간절하게 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는구나! 하나님이 함께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설교의 성패를 결정짓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구나!'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합니다.

우리가 애써 수고합니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되고 참아도 안 되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일이 임마누엘의 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이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 임마누엘의 하루가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일(7일)이 수능고사 백일 전이 되는 날입니다. 수험생과 그 부모님들, 이제 기도를 더 열심히 하는데 남은 기간의 시험준비에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함께 하도록 특별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학생 예배에서는 수능고사 수험생들을 위한 말씀이 선포될 것입니다.

솔로몬은 시편 126편에서 세 가지에 하나님이 함께 해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성전과 국가와 가정입니다.
1절 앞부분.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기의 집은 성전을 말합니다. 자신이 깊이 체험했기 때문에 이것부터 말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세우셔야합니다.

아버지 다윗이 성전을 짓기 위해서 그렇게 애썼습니다. 준비를 다했습니다. 역대상 22장을 보면 석수를 시켜 돌을 다듬게 했습니다. 못을 만들기 위해 철을 많이 준비했고 놋을 준비했습니다. 백향목도 뱃길로 많이 날라 왔습니다. 금 십만 달란트와 은 백만 달란트를 준비했습니다. 역대상 28장 11절과 12절을 보면 설계도도 자세하게 다 그렸습니다. 설계가 완성되면 건축은 반쯤 다 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니까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허락하셔서 자기가 성전공사에 착수할 수 있었습니다.
착공을 했는데 두로 왕 히람이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 필요한 기술자들과 물품들이 차질 없이 공급된 것, 하나님이 도와 주신 일이지 자기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백향목을 베어 나르는 사람이 삼만, 짐꾼 칠만, 산에서 돌을 뜨는 자가 팔만, 사역을 감독하는 관리가 삼천삼백, 솔로몬 당시 국력이 아무리 왕성했어도 쉽게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이 아닙니다. 요즘도 이십 만 가까운 인력을 동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요즘 노사분규같은 것을 일으켰다면 퍽 어려웠을 텐데 성심껏 일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그렇게 된 것이지 자기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지 아니하면 내가 아무리 애썼더라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이다' 솔로몬은 이것을 깨닫습니다.

요즘 교회에 자꾸 인간적인 기법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세상의 평가기준을 가지고 교회를 평가하려고 합니다. "교회도 경영이다"라고 말하는 목사님도 계십니다.
그런 것들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참고가 되는 한계 안에서 필요한 것이지 그런 것들이 교회의 중심부분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들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교회의 부흥은 반짝 부흥입니다. 부흥 같아 보이는 일시적인 흥왕입니다. 그런 교회들이 오래 지속되는 부흥, 진정한 의미의 부흥을 이루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교회는 교회이어야 진정한 부흥을 하는데 교회가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입니다.

2절 뒷부분,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지켜 주셔야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의 기초가 되어 주셔야합니다.
솔로몬 당시에 전쟁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큰 전쟁은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아마도 아버지 다윗의 사례를 깊이 연구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거둔 수많은 승전의 원인이 무엇인가 분석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하는 것은 그 결론이었을 것입니다.
솔로몬 당시에 나라가 매우 번영했습니다. "솔로몬의 영화"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제나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의 영화가 하나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미국이 요즘 우리 나라에서 많은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실수도 하고 있습니다. 너무 자기들의 이익만 챙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대해서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가도 이번에 세상을 떠난 홀트 여사의 생애 같은 것을 보면 "그래도!"하게 됩니다. "그래도 미국은 신앙양심 위에 세워진 나라로구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않는 나라, 하나님의 기초 위에 세워지지 않은 나라는 "역시나!"입니다. 좀 변화되는 것 같고 잘 되어가는 것 같다가도 역시 주저 않고 맙니다.

솔로몬은 특별히 가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5절까지는 가정에 대한 내용입니다.
교파에 따라서는 유아세례 대신에 헌아(獻兒)예배를 드립니다. "이 아기를 하나님께 바칩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시편 127편 3절에서 5절까지를 많이 읽습니다.

성전과 국가에 대한 내용은 한 절에 담고 가정에 대해서는 왜 석 절에 걸쳐 말하고 있을까?
솔로몬의 뼈아픈 체험이 여기 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후궁이 천 명이었습니다. 그런 집안이 편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방 출신 여인들이 많았습니다. 문화배경이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을 가지고 와서 이걸 섬겨야 한다고, 이것을 섬기게 해 달라고 아우성을 쳤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얼마나 골치가 아팠을 것입니까?
'아, 하나님 한 분을 섬기는 가정이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수고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세워 주시는 교회가 되어야됩니다.
우리 나라는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나라가 되어야합니다.
우리 가정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가정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수고가 되어 보람을 느끼고 열매가 많고,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나라가 되어 평안함이 있고,
우리 가정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가정이 되어 기쁨이 있고,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세우시는 교회가 되어 교회 가운데 교회의 모습을 보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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