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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 (요 19: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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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너무 많이 나와서 때로는 혼돈할 때도 있고, 바꾸어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저도 바꾸어서 설교한 적이 여러 번 있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주변에 있던 여인들 중에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었던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마리아이고, 막달라 마리아, 베다니 마리아,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등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과 앞으로 두 주일은 인물에 대한 설교로서 예수님 주변에 가장 가깝게 있었던 마리아를 조명해 봄으로 우리 신앙의 도움을 얻고자합니다. 아마 지금 세상에 있는 여인들 이름 가운데 제일 많은 이름이 마리아라고 생각됩니다. 서구 사회는 웬만하면 다 마리아(Mary)입니다. 남자 이름은 요한(John)이나 다윗(David)이 가장 많은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아마 성경의 이름을 갖기 원했던 아빠, 엄마들이 좋은 마음으로 자녀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에 대해 거의 만족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의 이름을 자기가 지은 것이 아니고 그냥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 됩니다. 한국인들이 외국으로 이민을 가면 이름 때문에 아주 불평이 많고 웃지 못할 일이 많이 생깁니다. 그 이유는 이민을 가면 무조건 여자들은 자기 성을 없애버리고 남편 성으로 바꿔야 됩니다. 그러면 이름의 의미가 금방 달라지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제가 아는 교인 가운데 여인 이름이 ‘이정배’이었습니다. 남편 성이 주씨거든요? 하루아침에 ‘주정배’가 되었고, 여자 이름이 ‘김성애’가 얼마나 예쁩니까? 남편이 동씨입니다. 그러니 이름의 의미가 금방 달라집니다. 마리아라고 하는 말은 ‘높다’라는 뜻이 있는 말인데 히브리어의 ‘마라’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마라’는 미리암에서 나온 말로 모세의 누나가 미리암이었습니다. 미리암이라고 하는 히브리어가 헬라화되면서 마리아가 되었다고 학자들이 보통 해석을 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한테서 탄생하셨고, 마리아들의 협조를 많이 받으시다가 마리아들이 울며 지켜보시는 가운데 운명하셨고, 마리아들에게 부활을 제일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리아들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마리아로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편을 조명해 보겠습니다.

지금 나사렛에 가보면 예수님의 아버지였던 요셉의 집과 어머니였던 마리아의 집은 붙어있습니다. 바로 이웃집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시골의 한적한 동네, 몇 가구 살지 않는 그런 빈민 마을에서 이웃집에 사는 처녀, 총각으로 만나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여 피차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 사회가 규정하는 정혼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록을 보면 정확합니다. 누가복음 1장 26~27절을 보면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라는 분명한 기록이 있습니다. 유대 사회의 정혼은 결혼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이제 앞으로 둘은 식을 올리는 잔칫날만 남아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마리아와 요셉의 문제점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전한 하나님의 소식은 이렇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많은 기도 요청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원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는 그렇게 모든 사람이 소원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한테 주어졌다고 천사가 직접 나타나서 은혜의 전달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일방적 사건이고, 나의 의사 개입 없이 하나님의 결정으로 주어지는 상태를 은혜라고 합니다. 이 같은 사람은 이 분야의 신앙 고백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소명이 일방적으로 나한테 주어졌습니다. 그 주어진 것을 받아들여서 사는 겁니다. 바울 사도의 소명관, 바울 서신의 1장 1절은 모두 똑같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나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는 내 뜻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언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겠다고 말했습니까? 그는 예수를 반대하는 열성분자였습니다. 그가 소원한 일, 뜻이 있었다면 당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을 없애버리고 잔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생각하고 선택 자유를 행사할 여유도 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벼락같이 주어져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일방적으로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치리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런 은혜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자신이 소원하지 아니한 일방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천사가 와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좋은 것일까?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그의 일생에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일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니라.” 마리아는 그 당시 유대 사회의 문화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후손에게 주어진 율법적 생활 윤리는 성 도덕에 잔인할 만큼의 엄격 규례를 적용합니다. 성경에 수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아버지 모르는 잉태가 발견되었을 때 의논할 시간도 없이 내리는 시아버지의 결정은 “끌어다 불사르라.” 그것이 성윤리입니다. 수없이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도 어떤 여자의 간음현장의 발각에 마을 사람들이 돌을 가지고 나와 쳐 죽이려는 장면을 예수님이 보시게 됩니다. 수없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제 그 당시의 성 윤리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시겠지만 그런 일은 지금도 있습니다. 사우디나 파키스탄 같은 나라는 명예 살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부모가 정해준 남자가 아닌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하거나 사랑을 하는 것, 혹은 임신이 발견되었을 때, 그 처녀의 아버지나 오빠가 가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죽여 버립니다. 이것이 명예 살인입니다. 파키스탄의 경우 2,003년 일 년 동안에 명예 살인된 처녀가 1,261명이나 됩니다. 상상이나 되십니까? 현재 대통령 페르베즈 무샤라프가 안 되겠다고 입법을 추진해서 명예살인자는 7년 이상의 감옥, 아니면 최고 살인에 처하는 법률을 통과한지 채 2년 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법은 통과했을지라도 명예 살인은 계속되고 있고 가차 없이 죽여 버립니다. 21세기 문화 안에서도 이렇게 무서운 문화가 존재하는데 2,000년 전 유대 사회는 이 문제가 얼마나 엄격했는지 성경에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이런 입장이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마리아가 말합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의 순결성에 대해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마리아 자신이며 둘째는 정혼자 요셉입니다. 정상적으로 성장한 결혼 적령기 처녀는 성교육 없이도 어린 아기 잉태의 과정은 자연 법칙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마리아는 그 당시의 사회법으로 불태우던가 돌로 쳐서 죽이던가 둘 중 하나의 명예살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마 이때 마리아의 마음에 가장 신경이 쓰였던 사람은 정혼자 요셉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나사렛 시골에서 약간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목수로서 평범한 총각에 불가합니다. 나름대로 마리아와 결혼에 대해 설계하고 행복을 성취하려는 희망 속에 결혼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알 수 없는 아기를 잉태한 마리아를 본다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어떻게 막겠습니까? 지금 여기서 예배드리는 모든 남자 분들 가운데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10대에 세례 받고 성령 충만의 체험을 했고 주일 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 새벽기도 열심히 하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나는 순교까지도 각오한다.’ 하시는 분이 많이 계실 겁니다. 그렇게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사는 나에게 어느 날 내 약혼녀가 나타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린 아기가 생겼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했을 때 믿으실 분이 계십니까? 성경에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뭐가 의롭다는 겁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로운 사람도 이것만은 참고 넘어갈 수가 없어서 끊고자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요셉이 의롭다는 것은 마리아의 머리채를 끌고나가 불태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끊고자 했다는 말은 명예 살인은 안하겠다고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요셉의 이해와 동의는 얻었습니다. 더 이상 불행한 사건 없이 둘은 결혼에 성공했는데 마리아는 이때로부터 은혜로 인한 고난의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천사가 일러준 임마누엘의 탄생!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 출생의 권위가 나타나야 마리아의 마음과 의로움이 나타날 텐데 낳자마자 어린 아이 학살 명령을 내린 헤롯으로 인해 외국으로 떠나가야만 했습니다. ‘출생의 장소가 마구간이 된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낳자마자 죽음에 직면해 애굽까지 피난살이 떠나야 되는 것이 메시아 탄생의 권위인가?’ 이런 생각을 왜 안 하겠습니까? 아무리 믿음이 좋고 의로운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에 대해 의심이 가게 되어있습니다. 더구나 요셉은 마리아의 순결과 성령의 잉태를 꿈을 통해서 믿고 이해를 했는데 그런 과정을 보고 요셉은 ‘내가 헛꿈을 꾼 것이 아닌가?’라고 이런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라면 그 신적인 권위가 빨리 나타나야 되는데 30년이 넘도록 아무 소식이 없다고 할 때 과연 마리아는 편했는가? 성경의 기록만 가지고 보면 요셉은 일찍 죽은 듯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활동시기에서 십자가 사건까지 어머니 마리아는 계속 등장을 하는데 요셉은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한 아무 사인도 확인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30년 동안 마리아는 어떤 마음으로 남편 요셉을 보았으며 또 예수를 보았을까? 성경에 나타납니다. 30년 평범한 나사렛 시민으로 가난한 생활을 합니다. 이제 하늘나라 복음의 반포 시기가 되어 처음으로 반포하기 시작하셨을 때 마리아와 다른 자녀들은 예수를 미쳤다고 인정하고 집안 망신 좀 그만 시키라고 잡으러 온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마리아는 이미 30년 전의 성령 잉태 일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왜 정상적으로 가정생활을 하고 일을 할 것이지 사람을 몰고 다니면서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 빨리 집에 가자. 창피해서 못 견디겠다.”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 탄생 후 30년, 또한 그 후 3년 동안은 마리아에게 더 큰 고통을 주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의 십자가 밑에서 처참한 죽음의 고통을 바라보며 견디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마침으로 마리아의 생애는 가브리엘의 말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인가?

오늘 우리들은 끝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자 하는데 과연 내가 좋은 것을 구하고 있는 것인가? 정리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두 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하나는 일반적 은혜의 개념입니다. 이것은 내 소원의 성취 부분을 말합니다. 내 소원의 성취 부분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일반적 은혜도 주님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건강 회복이라든가 물질의 풍요라든가 평화로운 가정생활이라든가 사회적 명성이나 출세가 모두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것도 아름답고 선하고 이런 것들 가운데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의는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것도 얼마든지 구원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 기도의 제목으로 당연합니다. 그런데 아주 분명한 것은 일반적 은혜의 개념 속에는 고난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될 수만 있으면 고난에서 멀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반적 은혜 개념입니다. 날마다 기도하시는 여러분의 마음을 한번 살펴보세요. 고난 받기 원하십니까? 절대적으로 고난이 내게서 멀리 가라고 기도합니다. 그것이 일반적 개념입니다. 두번째는 특별 은혜가 있습니다. 이 은혜의 개념은 나의 개인적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계획의 성취만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은혜 속에는 나의 고난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특별 은혜로 출애굽의 지도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모세의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못하겠다고 하나님과 맞섰던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예수에 대한 핍박자였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다는 것은 꿈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의 모습에서도 동일하게 표현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그냥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서 예수님의 뜻은 십자가 없는 인간 구원의 성취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개인적 소원은 어떻게 처리가 되었나? 모두가 무시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생각하시고 선택하시고 하라는 대로 모두 행해진 것이 특별 은혜의 개념입니다.

모세도 출애굽 지도자로 느보산에서 고생스러운 40년 순례 여정을 완수했으며, 바울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로마 감옥에서 순교자의 생을 마쳤고,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대로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 속에 선택받았기 때문에 자기 의견은 다 무시가 되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이 “은혜를 받은 자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특별 은혜자는 자기의 소원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계획과 소원에 맞는 사명의 길을 가야하기 때문에 자기의 개인적 소원의 성취 면에서 평가하거나 세상 기준으로 말하면 오히려 망하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가 아니었으면 당시 세계 최대의 강국인 바로 궁전의 왕이 보장되어 있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특별 은혜가 아니었으면 유대 나라 최고의 정치실세가 보장되었던 인물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특별 은혜는 아브라함 때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훌륭한 생활기반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던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하나님의 특별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 은혜의 구체적인 방향 제시는 무엇이냐? “너는 본토 너의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그러면 그것은 행복한 것인가? 그날부터 아브라함은 고난에 들어갑니다. 창세기 에덴동산에 나오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중심으로 이루어진 최초 문명의 넉넉한 혜택자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 때문에 그날부터 고난의 먼 길을 떠납니다. 이라크 바그다드 근처에서 출발한 사막 여행이 터키 하란을 거쳐 지금의 이스라엘 서쪽 텔아비브 부근까지 고난스러운 순례의 길을 떠났고, 가나안 땅에 들어오자마자 제일 먼저 만난 고난은 땅에 기근이 심한지라 먹고 살 양식이 없어 두 식구가 밥을 먹기 위해 애굽으로 동냥을 떠나는 그런 고난의 삶을 시작합니다. 애굽 땅에 갔을 때는 그 나라 왕에게 자기 아내를 빼앗기는 씻지 못할 아픈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아내가 죽었을 때 헷 족속에게서 은 400세겔을 주어 묘지 하나를 구입한 것이 아브라함의 소유였습니다. 순교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를 받은 자만이 가는 길이 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평가하면 이것은 주님의 사명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는 기쁨인데 세상적으로 보면 제 명도 못살고 죽는 거란 말입니다.

나사렛 시골 처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를 받고 말할 수 없는 수난의 생애를 살아갔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얻어진 것인가? 지금 나사렛의 마리아 생가에 가면 기념 예배당이 건축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세계 각 국의 여인들이 자기 나라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 그림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한복을 입은 여인도 거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왜 세계 여인들의 그림을 여기에 놨는가? 마리아는 세계의 어머니 역할을 하였다는 뜻이며, 인류의 어머니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이 마리아를 통해 메시아를 탄생시킴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특별 은혜 때문에 무한한 고통이 뒤따랐지만 마리아는 인류의 어머니이다.” 얼마 전에 천국으로 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미국에 오셨을 때 제가 뉴욕에 살았습니다. 뉴욕에 있는 수녀들이 모임을 가지고 교황을 초대해 항의식 질문으로 요청을 했습니다. “왜 신부는 남자만 되는 겁니까? 우리 수녀들도 다 신부되게 해주세요. 성차별이 아닙니까?” 미국 같은 나라에서 당연하지요? 교황이 대답했어요. “가톨릭의 수녀란 남녀평등이라든가 여권신장 이런 문제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말을 한다면 수녀님은 모든 사람의 어머님이요 신부의 어머니요 교황의 어머니요 인류의 어머니 뜻으로 수녀가 있는 것입니다. 아기들이 훌륭하게 되는 것을 보고 질투가 나서 여권 신장만 부르짖는 어머니가 어디 있습니까? 당신들은 교황의 어머니요 신부들의 어머니, 세계의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그 귀한 자리를 물리치고 신부가 되시겠소?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주셨는데  가톨릭의 수녀는 그런 의미입니다.” 수녀들이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정혼한 처녀 마리아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특별 은혜 때문에 33년의 긴 시간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수난의 순례자로 살아와 예수님의 마지막 사명의 완성 장소인 갈보리 십자가에 운명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 은혜의 개념 속에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고난 없이 다 잘 되는 길이 우리의 받고자 하는 은혜의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려면 특별 은혜의 사명이 내게도 주어진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할 때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져 갑니다. 그 길은 험난하고 고난스럽고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대 실패자의 모습같이 보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 목걸이를 왜 하고 다니십니까? 왜 교회는 안이나 바깥이나 이렇게 십자가에 선명하게 빛을 밝힙니까? 뜻은 하나입니다. “나도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 은혜, 즉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특별 은혜와 고난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나도 동참하기로 오늘 이 주일 아침에 믿음의 고백으로 동의하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날마다 사치스러워서 무엇이든지 다 잘되는 일반적 은혜의 개념 속에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류 역사에 나타난 수없이 많은 인간 구원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들은 모두가 고난스러운 특별 은혜자들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하나님의 고난의 특별 은혜에 동참하는 믿음의 고백으로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  필 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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