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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창 4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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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광복절 때가 되면 이산가족 상봉의 날이 되고 있습니다.
이번 광복절에는 남한의 여러 도시들이 그리고 북한의 이산가족들이 화상을 보면서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산가족들이 상봉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 민족은 눈물의 도가니에 빠지곤 합니다.
북에서 온 부모형제로, 남에서 온 부모 형제로, 분단 후 50여년 만에 처음으로 상봉하는 아픔과 기쁨의 눈물로 범벅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만납니다.
아버지가 딸을 부르는 울음소리, 아들이 어머니를 부르는 안타까운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형제들이 부둥켜안고 한탄을 합니다.

사연도 가지가지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상봉하지 못하는 실향민 들 중에서 혹 자신을 알고 자신의 가족을 알지는 않을까 싶어 무슨 소식이라도 전달되지 않을 까 하여 피켓을 들고 호소하는 사람들, 상봉하는 사람들을 보고 안타까움과 아쉬움과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핏줄을 한 시간거리면 만날 수 있고 얼싸안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거리가 50여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는 것에 또한 애통함을 느꼈었습니다.

이 상봉이 언제까지 이루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하루 속히 자유 민주주의의 통일이 되어야 하겠는데 아직도 갈 길은 먼 것만 갔습니다.
그 날을 기대하며 기도할 뿐입니다.

분열은 죄로 인해

인간은 분열과 아픔의 역사를 되풀이 해 왔습니다.
그것이 민족으로든지 아니면 개인적으로든지 헤어짐과 나눔의 역사 속에 살아왔습니다.
인간은 죽음으로 인해 헤어져야 합니다.
전쟁과 다툼으로 인해 분열되고 나뉘어 집니다
이념이 다르고 사상이 다르기 때문에 갈라서기도 합니다.
생각이 다르고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나눠집니다.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갈라서고 다투고 싸웁니다.
이러한 일들이 오늘도 계속도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나눔과 헤어짐, 분열과 분리 등 이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을 때 사람은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범죄 함으로 분열되고 맙니다.
이 변질된 사람들의 후손이 바로 가인과 아벨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계속해서 인간의 분리와 깨어지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분리, 에서와 야곱의 분리,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분리....

우리 민족의 분단 또한 이러한 차원에서 보아야 합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의 마찰과 전쟁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하겠지만 결국 죄의 산물입니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죄의 산물입니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결국은 그것을 인정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정신이요 사상입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쓰레기입니다.
그리고 적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벽을 쌓고, 건널 수 없는 긴 협곡을 만들었습니다.
서로 왕래할 수 없는 땅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이 죄 성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필요성에 의해서 할 수는 있습니다.
세계의 흐름은 더 이상 분열은 아닙니다.
세계가 이웃이 되고 있고, 하나 되자고 하는 판국에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민족이 서로 등을 돌리고 총부리를 겨누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교회가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어떠한 목적 수단으로서, 세계적 흐름으로 화해하고 왕래하는 것이 아니라 한 민족으로서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으로 대화하고 만나고 왕래하며 나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말씀 속으로

요셉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편애 속에 채색 옷을 입었고 아버지의 총애 속에 보호를 받았습니다.
형들은 그를 미워하였고 그를 미워한 나머지 아버지의 심부름을 온 요셉을 형들은 애굽의 노예 상인에게 팔고 맙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편애, 교만, 미움, 시기 질투라는 무서운 죄의 요소들이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사람 안에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싹트게 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특별히 질투는 무서운 무기가 됩니다.
[섹스피어]는 이 질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형인의 도끼도 질투에 비하면 그 반만큼도 날카롭지 못하다”

헬라의 [유리피테스]는 “질투는 인간의 모두든 질병 중에서도 가장 위중한 병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무기가 이 질투라는 것입니다.
이 죄의 악으로 인해 야곱의 집은 큰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우리에게 있는 많은 아픔들도 이로 인한 것이 아닌지요?

한편, 형들에게 팔린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13년간 종살이를 하다가 그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친 이유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애굽 바로 왕의 술 관원의 꿈을 해석해 준 덕분에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되고 그로 인해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애굽의 전역을 비롯한 가나안땅에 이르기까지 기근이 심해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야곱은 그의 아들을 애굽에 보내 식량을 구해오게 합니다.
그때 요셉은 바로 식량을 총괄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식량을 구하러 온 형제들을 만납니다.
형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고 놀랍니다.
처음에는 그 형들에게 자신을 숨기지만 이제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밝힙니다.

형들은 요셉이라는 사실에 너무나 놀랐습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어떠한 일인지 알기 때문에 그들은 요셉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요셉의 마음에는 형제들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의 마음이 없습니다.
원한이 없습니다.
오직 형제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사랑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는 오직 이 일이 하나님으로 되어진 일임을 고백하면서 형제들을 위로하고 형제들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야곱의 집에 화평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하나 됨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상봉합니다.
그리고 야곱의 가족들이 다 애굽의 고센 땅으로 내려와서 한 공동체를 이루어 화합과 하나 되어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가정이 하나가 되고 우리 교회가 하나가 되고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우리는 화합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 화합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1.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화합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희생이 없이 무엇인가를 얻기를 원한다면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아픔이 큰 사람이, 상처를 더 크게 입은 쪽이 먼저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환경적으로 나은 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연장자가 먼저 손을 내 밀어야 합니다.
야곱의 열두 형제 중에서 가장 아픔이 큰 사람은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노예로 13년을 살고 감옥에서 2년을 산 사람입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는 원한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택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버리는 마음, 용납하고 용서하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택했습니다.
이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화합이 되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그 누군가를 위하여 아픔을 갖고 있고, 내가 그 누군가로 인하여 억울함을 당했을 때, 아픔이 큰 여러분이 손을 내밀지 않으면 화목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상처를 준 사람이 용서를 구하고 화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한 사람이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환경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용서해야 합니다.

야곱이 형을 찾아갈 때 야곱이 먼저 화해를 요청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형의 환심을 사 보려고 자기의 재물을 나누어 앞서 보내고 자기의 가족들을 앞서 보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에게 속임을 당하고 장자의 명분, 장자의 축복을 빼앗겼던 에서가 달려와 그를 포옹할 때 비로소 용서가 되고 화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죄에서 자유를 누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된 것은 주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들을 향하여 용서를 선포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나님의 희생이 있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사이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여러분이 아픔을 당했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찾아가십시오.
여러분이 조금 더 낫다면 먼저 찾으십시오.
여러분은 화평케 하는 자가 될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나아갈 때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셉이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5)
요셉은 자신이 당한 일과 지금 형제들을 만나는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기에 용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지금 현실에서 당하는 일이 어떤 일이든지 간에 이 말씀을 확실히 믿고 붙들고 있다면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되어진다, 협력하여 결국은 선을 이룬다.’는 믿음을 가진다면 그 일을 극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겸손하게 행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그 고난을 극복하면서 오히려 연단하고 준비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축복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셨는가를 생각하면서 겸손히 하나님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전교인 수련회 때 있었던 일입니다.
대개의 성도들이 잘 몰랐을 것입니다만 사실은 조그만 안전사고가 났었습니다.
둘째 날 오후 프로그렘을 진행하는 중에 여선생님 한 분이 넘어지면서 그만 무릎에 인대가 늘어나는 사고였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기부스를 하고 그 날 저녁으로 귀가하게 되었습니다.
진행부에서는 무척이나 염려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가정적으로 시험거리가 되지나 않을까 해서입니다.

2박 삼일의 일정을 다 마치고 교회에 돌아와 모든 짐을 다 정리하고 사고를 당한 선생님께 전화를 통해 연락을 해 보니 아무 이상 없고 쉬면 되겠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아달라고 하시면서 이곳 집에 있으면 교회나 선생님들에게 짐이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친정어머니께서 시골에 내려와서 있으라고 해, 내일 내려갈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그 소식에 선생님의 마음에 안정을 찾은 것 같아서 조금은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그날 밤에 남편 집사님을 만난 교육부장 장로님께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사랑하셔서 우리 부부의 사랑을 더 든든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섭리하여 주셨으니 친정에도 보내지 않고 내가 직접 간호하면서 돌볼 것이니 교회에서 조금도 염려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를 하더랍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사랑으로 빚어지는 우리교회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듣는 마음이었습니다.

요셉에게 원망과 불평의 마음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경륜을 믿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마음을 누르고 애굽에서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기대하면서 인내하고 준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원수와 같은 형들을 만났을 때 - 그 만남은 요셉의 일방적인 권위 안에서 이루어진 절대 강자로서의 만남입니다.- 요셉은 이것이 하나님의 일로 인한 것임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 믿음 안에서 요셉은 형제들을 용납하고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 속에 나는 있다’
하나님은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현실 가운데서 우리 앞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앞서 인도하시듯이 우리를 앞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앞선다는 의미는 미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5절)
하나님은 우리 시간을 초월하여 이미 우리 앞서 행하셨습니다.
야곱과 그 70인의 가족들이 앞으로 애굽으로 갈 때에 하나님은 이미 430년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그 시점에 계셨었습니다.
아니 그 이전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은 그 시간에 계셨었습니다.

창 15:13-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3-14) 때문에 이 일련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간섭과 진행이 있음을 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개인으로나 우리 민족으로나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어떠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그 분을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존심 싸움, 이것으로 화목할 수 없습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로는 하나님나라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분단, 그리고 그로 인한 동족간의 갈등, 싸움, 이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큰 슬픔이요 분노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겸손히 하나님의 일을 보십시다.
만약 우리나라가 분단되지 않고 해방이 되었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했을까?
과연 지금만큼 교회가 이 땅에 서고, 지금과 같은 신앙의 열정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살아가는 나라가 되었을까요?

현실에 대한 애석함과 아픔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의 현실을 바라볼 때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아픔의 역사를 통해서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겸허히, 겸손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앞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요셉의 불행에 앞서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와 그의 집을 위하여 크게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행하셨습니다.
우리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서 행하십니다.
나 개인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그리고 이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은 앞서 행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고통이 있고 고난이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인내하고 연단되어 지면서 준비한다고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시는 계획과 뜻을 펼치실 것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집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교회를 위하여, 이 민족을 위하여 이제 우리는 겸손히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그 일을 향하여 말입니다. -아멘- (박 영 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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