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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 (막 11: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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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목사님이 선배가 목회하는 교회를 방문했다가 경험한 일이다.
예배당엘 들어 가는 순간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려와서 귀를 의심하면서 소리를 따라 지하로 내려 갔더니 지하 교육관에서 여성들이 열심히 에어로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목사님은 충격을 받았다. 기도하는 곳에서 요란한 음악을 틀어 놓고 춤추는 그 광경을 보고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교회는 얼마 가지 않아 문제가 생겨서 교인이 많이 줄고 그 선배 목사님도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교회에서 스포츠센타를 따로 운영하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예배실이 함께 붙어 있는 장소에서 세상 음악을 틀어 놓고 에어로빅을 한다는 것은 분명히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 교회를 방문하셨다가 그 광경을 목격하셨다면 어떠하셨을까?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달라져서 의견의 대립이 생길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도 함께 뛰어 들어가 에어로빅을 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화를 내시고 야단을 치시며 내어 쫓으셨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 우리는 사사시대와 같이 혼란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성전의 개념이 달라졌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활동하는 예배당이라는 공간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어져야 하며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것이 아름답고 합당한 것인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공관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통 “예수님의 성전청결”이라 부른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 가셨을 때 성전 마당에서 해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 고함소리, 짐승 우는 소리, 오물냄새 - 영락없는 가축시장과 같은 모습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시고 매매하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시고, 장사아치들과 우양을 내어 쫓으셨다. 예수님의 행동은 너무나 과격하셨기 때문에 감히 그 앞에서 말리거나 저항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크게 분노하셨는가? 그 이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막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7절의 말씀은 사56:7과 렘7:11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1)“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사56:7의 말씀은 성전의 본질을 가르키는 것이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성전에만 계시는 것은 아니다. 온 세상에 편재하시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하는 장소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배드리기 위해 성전에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은 거룩한 곳이요 구별된 곳이다.

솔로몬 왕이 성전을 다 짓고 봉헌식을 할 때 성전 안에 구름이 가득찼었다. 그 자리에 모인 왕과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눈으로 몸으로 경험했었다. 다음은 솔로몬왕이 성전 봉헌식에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 내용의 일부분이다.

대하6:18-20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성전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는 백성들이 기도하는 곳이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와서 기도할 수 있는 곳이었다. 성전 봉헌과 함께 성전의 의미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쳐져야 한다. 백성들이 성전에 나오는 것, 제물을 드리는 것, 제사장의 하는 일, 모든 일들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쳐졌다. 그곳은 만민이 기도하기 위해 지어진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기도가 약화되고 식어진 것이다. 성전에서 기도가 약화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자기의 욕심을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백성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기도하지 않을 때 불신앙적인 요소들이 성전 안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2)“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라는 말씀은 렘7:11의 인용이다.
렘7: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너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수님께서 “강도의 굴혈”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성전 안에서 돈 벌이를 위한 매매 행위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행위는 대낮에 강도질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표현이다. 이것은 그 당시 유대 종교가 극히 타락했다는 사실을 보여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성전이 기도하는 경건한 장소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도적의 소굴로 변질되는 통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성전 안에서 이와 같이 매매하는 일들이 성행하게 되었는가?
시작은 선한 의도에서 출발하였다. 유대인들이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멀리서 온 방문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 였다.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가장 좋은 우양을 직접 끌고 올 수 있었지만 수 백리 수 천리 떨어진 곳에서 우양을 몰고 올 수는 없었다. 예루살렘에 와서 제물을 살 수 밖에 없었다.

본문 15절을 근거해서 본다면 성전 안에서 3가지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1)돈 바꿔 주는 일 -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20세가 되면 일년에 한 번씩 은전 반세겔의 성전세를 내야 한다. 특히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은 세겔로 환전해야 하기 때문에 비싼 환전 수수료를 내야만 했다.
2)소, 양, 염소를 매매하는 행위 - 제사장들이 제물을 검사하는데 성전 뜰에서 사는 것만을 합격시켰다.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살 수 밖에 없었고 장사아치들은 폭리를 취했다.
3)비둘기 파는 자 -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제물이다. 그러나 성전 안에서 팔렸기 때문에 장사꾼들은 비둘기를 팔면서도 폭리를 취해 가난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 갔다. 그들의 행동이 칼만 들지 않았지 강도짓과 같은 것이었다.

이 사업은 제사장들과 결탁되어서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관행으로 정착되었다. 참배객들은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제물을 비싸게 주고 사고, 환전할 수 밖에 없었다. 선한 뜻으로 시작된 제도가 장사꾼들과 제사장들의 농간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기도하는 거룩한 장소를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두 가지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성전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될 때 세상적인 편의주의와 물질주의가 성전 안으로 파고 들어온다는 사실이다.
제사장들은 이미 돈 맛을 알았고, 제사장들과 결탁한 유력한 장사꾼들은 경건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말이 매매하는 자들이지 실상 그들의 행동은 강도짓과 같았다.

두 번째는 성전이 세속화될 때 예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거룩한 장소를 오염시키는 세속적 행동을 용납지 않으셨다. 채찍을 만들어서 사정 없이 내리치셨다. 우양과 함께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셨다.

이 소식을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전해 들었다.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는가?
막11: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

그들은 자신들의 돈 벌이가 예수님에 의해 저지 당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분노했다. 성전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 부조리한 일들에 대하여 개혁할 생각을 하기 보다는 도리어 예수님을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내 집은 만민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오늘날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그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솔직한 고백은 교회마다 기도 소리가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당이 영적 재충전의 발전소와 같은 기능을 감당하기 보다는 일반적인 문화센타와 같은 기능을 감당하는 기관으로 변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일부의 사람들은 교회가 시대적 변화를 잘 수용하는 선각자적 태도라고 선동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주장을 거부하지 않는다. 선교적 차원에서 종교적인 색채를 배제하고 불신자들이 출입하기에 거부감이 없는 환경과 시설을 만드는 것은 지혜로운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도 선교적 차원에서 예배당 건축에 그런 부분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에 놓쳐서는 안될 대단히 중요한 전제 조건이 있다. 그런 선한 목적을 달성하려면 교회가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하게 감당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의지가 없다면 그런 결심이 없다면 아예 중세 교회와 같은 모습으로 종교성 짙은 예배당을 짓는 것이 나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감당하지 못한 채 시설과 환경만 바꿔 논다면 머지 않아 교회당에는 기도 소리는 들리지 않고 에어로빅 음악이나 커피를 제공하는 까페로 전락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우려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불신앙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난 주간 역대기를 묵상하면서 가슴을 쳤었다. 유다의 3왕, 요아스 - 아마샤 - 웃시야. 처음에는 믿음으로 잘 나가다가 나중에 우상을 섬기므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비참한 생애를 마쳤다. 요아스와 아마샤는 신하들에 의해 살해 당했고, 웃시야는 문둥병에 걸려 별궁에서 거해야만 했다.

신앙의 정절을 지키고 성경적인 삶을 구현해 보려고 유럽을 떠난 청교도들이 미국에서 교회당을 짓고 신학교를 세웠다. 대표적인 학교들이 예일대학이나 하버드, 프린스턴이다. 이 학교들도 처음에는 성경학교 신학교로 출발했었다. 그곳에서 많은 믿음의 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연세대학이나 이화여대도 기독교 신앙으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거의 신앙적 요소가 퇴색된 상태이다. 마귀의 전략을 알아야 한다.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할 환경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날이 갈 수록 마귀는 신자들의 모임 속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도 한국교회는 예배당에서 장사한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하신다면 예루살렘 성전에서와 같이 격분하지는 않으시겠지만 예전 보다 훨씬 더 적어진 기도 소리에 근심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초로 교회가 태동할 때 뜨거운 기도의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행1:13-15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혼자 기도하기 보다는 여럿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아무리 잘 달궈진 숯불이라 해도 한 덩어리를 따로 떼어 놓으면 오래지 않아 꺼멓게 죽고 만다. 그러나 죽은 숯 덩어리도 숯 가마에 던져 넣으면 다시 시뻘겋게 달아 오른다. 혼자 기도하기 보다는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일이 중요하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이다. 바리새인도 나와서 기도하는 곳이고, 세리도 기도하는 곳이고, 남자 여자, 이방인 유대인 할 것 없이 만민이 다 나와서 함께 기도하는 기도의 집이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장로나 권사 집사만 나와서 기도하고 나머지는 기도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다 함께 나와서 기도해야 한다. 문제 있는 사람은 당연히 나와야 하고 문제 없는 사람도 나와야 한다. 교회당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기능을 감당하도록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부모님의 생신날이 되었다. 그런데 아무도 찾아 오지 않았다. 전화도 오지 않았다. 부모님들은 근심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면 화가 난다. 어두워져서 자녀들이 찾아 왔다. 와서는 별로 말도 없이 봉투만 하나 내놓고 갔다. 부모의 마음은 찢어질 듯한 통분을 느끼게 된다.

주일날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이 하품 쩍쩍하다가 헌금봉투 한 장 달랑드리고 돌아 간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부모가 떨어져 있는 자식들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기도 소리를 듣고 싶어 하신다. 자주 자주 날마다 전화로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자식들이 있다면 그 부모님은 기뻐하고 행복할 것이다. 부모님의 생신날 자녀들이 한꺼번에 몰려 와서 선물도 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하루 종일 대화하다가 돌아가면 큰 기쁨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날마다 성도들의 음성듣기를 원하시고, 모여서 함께 부르짖는 소리 듣기를 기뻐하신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함께 모여 부르짖을 때 응답의 역사가 크다.

미국 뉴욕의 부르클린 태버너클 교회의 담임목사 짐 심발라의 책, “새 바람 강한 불길.”
20여명 모이는 빈민가의 허름한 교회에 부임해서 처음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교회 운영비가 없어서 다른 교회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는 살기 위해서 열심을 내기 시작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화요일 저녁 기도회를 시작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회에 기름부어 주셨다. 뉴욕의 빈민들, 마약, 알콜중독자, 성매매자들이 새로 거듭나는 역사가 그 기도회를 통해서 나타났다. 교회는 크게 부흥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목회에 열심을 내다보니 큰 딸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 아이가 점점 반항적이더니 결국 가출하고 말았다. 아내는 이 도시를 떠나야 한다고 요구했다. 성공적인 목회가 딸의 가출로 인해 벽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그가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교인 한 사람이 목사님의 딸을 위해 화요기도회에서 중보기도하기로 제안했다. 정상적인 순서를 멈추고 그 자리에 모인 교인들과 함께 목사님의 딸을 위해 합심해서 기도했다. 그후 정확하게 32시간 후 목요일 저녁 딸이 돌아왔다. 딸의 마음이 녹아져 내린 시간이 바로 화요일 저녁 중보 기도의 시간 딸을 위해서 함께 부르짖을 때 일어났던 것이다. 그 딸은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서 신학대학에 진학했다.

영국의 부흥사 촬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다.
“교회의 상태는 정확히 기도회로 진단된다. 기도회는 은혜의 척도요, 하나님이 그의 백성 가운데 얼마나 역사하시는지 판단하는 기준이다. 하나님이 교회에 가까이 계시면 교회는 기도한다. 하나님이 교회에 안 계시면 그 첫째 징표는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것이다.”

나는 기도의 능력을 믿는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모여 합심해서 기도할 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응답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다른 교회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듣고 은혜만 받을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모인 이 자리가 기도의 용광로가 되어서 미지근한 심령들이 뜨거워지고 상처받은 심령들이 치료되며 병든 자가 나으며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되어 간증하는 무리가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기를 소홀히 하면서 세상 일에만 몰두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기도하는 대신 편하게 좀 더 잠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TV나 인터넷에 빠져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나의 삶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은 경험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고도의 산업화된 시대에서 물질적 풍요와 향락, 편의주의적 환경에서 살고 있다. 기도 소리는 점점 적어지고 예배순서에 따라 적당히 움직여 주고 편리한 시간에 맞춰 예배드리도록 .. 이렇게 해서 종교적 의무를 다 수행했다고 자족하는 사상이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망하는 길이다.

교회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 예배당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동안 태만했다면 기도의 고삐를 당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 바란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기 위해 새벽에도 나오라. 주중에 시간이 되는 분들은 화요일 중보기도회에 나오라. 그리고 금요심야기도회에 나오라. 주께서 여러분의 음성 듣기로 기다리시며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원 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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