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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형통한 날의 기쁨과 곤고한 날의 생각(전 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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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으면 기쁨이 생깁니다. 우리의 모든 어려운 일이 다 없어지고 속상한 일이 다 해결되어서 기쁨이 생기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이 그대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능가하는 하나님께 대한 소망과 삶의 대한 새로운 기대와 하나님을 향한 선한 의욕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삶의 장면에서 슬픈 영화를 보고 슬퍼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주를 위한 선한 기쁜 일에 너무 분주해 그 슬픈 삶의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한 순간 문득 마음에 빈 공간이 생기고 서늘한 생애의 바람이 그 빈 공간을 불어 스치게 되면 삶의 통증은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밤과 낮의 교차처럼 기쁨과 슬픔이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결해 나가고 통합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마음과 생활을 이루느냐 하는 것입니다. 삶이란 그야말로 비관적으로 생각하면 한없이 비관적이고 소망적으로 생각하면 언제나 그 가운데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주를 위한 고난의 연단이요, 주님의 뜻을 이룬다고 생각하면 견딜만한데 어려울 때 갑자기 마음이 한 순간 무너지면 그야말로 견딜 수 없고 극단적인 경우까지 가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는 우리 앞에 교차되어 결국 삶을 엮어가는 이러 저러한 삶의 다양한 국면을 맞이할 때 어떠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어떠한 자세로 해석하고 누릴 것에 대하여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우리가 읽은 문구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우리들에게 병행하여 주시는 것은 사람으로 그 장래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성경에 나온 그대로 첫 번째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형통한 날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줄 알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누리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들에게 첫 번째 의무요, 권리가 생깁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누릴 줄 아는 하나님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줄 아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맛있는 음식을 잘 먹기를 원합니다. 좋은 옷이 있으면 옷장에 넣어두기만 원하지 않고 그것을 꺼내서 입고 다니기를 원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백성은 근본적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라는 말은 우리들에게 기쁜 일을 주셨으니 너희는 그 기쁜 일을 찾아서 누리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기쁜 일을 주시지도 않고 우리들에게 항상 기뻐하라라고 주의 말씀으로 우리를 권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를 찾아서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리지 못합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고 했는데 내 주변에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백성의 가장 큰 비극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우리자녀들도 기뻐하는 것을 부모로써 기뻐하는데 하나님이 그의 자녀인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얼마나 원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마치 보물찾기에서 보물을 찾아 누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기쁨을 찾아 누리고 우리를 형통하게 하셨을 때는 걱정하지 말고 그 형통한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교회에서 학생회장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금곡이라는 곳으로 교회에서 야유예배 간 적이 있어요. 학생들 가면 보물찾기도 하고 해서 제가 마침 숨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쪽지에다 써서 나뭇가지 사이에도 끼어 넣고 나무 밑에도 숨겨놓고 했는데 너무 어렵게 숨겨도 안되고 또 너무 쉽게 숨겨도 안되니 그것이 참 쉽지 않은 것이죠. 그래서 학생들이 그것을 찾았어요. 나중에 끝날 쯤 해서 상품을 발표했습니다. 거기에는 이러 저런한 일들이 쓰여 있었어요. 꽝, 안됐습니다. 수고했지만 헛 일했습니다, 1등, 2등, 3등, 이런 것들을 학생들이 다 찾았어요. 그래서 나중에 순위를 발표했는데 1등- 꽝, 2등- 안됐습니다. 헛수고 했군요. 3등- 수고는 했지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참가상은-1등, 2등, 3등. 이렇게 줬거든요. 그랬더니 그것을 찾은 학생들 중에서 땅을 치는 학생들이 있더라고요. 꽝, 안됐습니다. 이런 것을 찢어버린 학생들이 있어요. 찾았는데 수고해도 아무소용이 없더라하고 버렸다 말이에요. 뭐 거기 1등이라고 쓴 것 반드시 1등 상품주고 2등이라고 쓴 것 2등 상품주면 너무 재미없잖아요. 그렇죠? 한번 찾아서 반전해서 웃는 것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상을 줬는데요. 결국 꽝이라고 쓰고 안됐습니다 라고 쓰고 한 것도 끝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이 1등을 하더라고요.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이들이여.

우리 삶에는 엉뚱한 해석을 많이 해요. 우리는 언제나 고정화된 사고관념을 가지고 내게 있어서 이건 기쁨이야, 이건 슬픔이야, 이건 어려움이야, 라고 늘 고정 관념화시켜서 마침내 그것이 바뀌어 우리들에게 슬픔이 기쁨 되고 기쁨이 슬픔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해두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전까지 내게 있어서 기쁨이라고 누리지 못했던 것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내게 기쁨을 주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아서 그것을 누릴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형통함을 주셨을 때 우리는 그 형통함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어야 되요. 저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권리는 기쁠 수 있는 권리입니다. 우리는 마음껏 그 기쁨을 누려야 되요. 우리는 예수 믿는 순간 금욕주의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예수 믿는 순간 우리는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들에겐 기쁨과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느혜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고 이제 마침내 예루살렘 수문 앞에 모이죠. 학사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가르칩니다. 그때 백성들이 울며 통곡하며 금식할 때 뭐라고 얘기합니까? 지금은 기뻐할 때이다. 너희가 음식을 먹고 기뻐하라고 그들에게 권면하고 있죠. 바로 이와 같이 형통할 때는 우리는 기뻐하는 거에요. 기쁜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닥칠 고난을 예상하여서 눈물로 우짓고 지낸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쁨의 날을 누릴 수 있는 거예요. 기쁨을 누릴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못 사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기쁨을 마음대로 뿌려놓고 우리들에게 그 기쁨을 누리라고 말씀하셨어요.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예배드릴 수 있는 큰 특권과 기쁨과 축복을 주셨는데 얼마나 기쁜 것입니까?

우리의 누림은 힘을 다해 선을 쌓아두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기쁨을 누리는가? 소리를 지르는가? 노래를 부르는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기쁨을 누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사람마다 그 기쁨을 누리며 발산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은혜의 기쁨으로 선을 쌓으며 우리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현재의 누림을 불안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형통하게 하셨을 때는 그 형통함을 누리면 되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 된다 이 말입니다. 오늘 성가대가 참 너무나 아름답게 찬양을 잘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성도들이 박수도 치고 또 이렇게 마음이 기쁜 것 같아요. 그런데 성가대가 잘 한 것을 보고 다음 주에 못하면 어떻하나, 조마조마해서 되겠습니까? 오늘 잘 했으면, 그냥 아 참 오늘 잘했다. 연습도 잘하고 오늘 아주 훌륭하게 했구나 라고 생각하면 그것으로 우리는 기쁜 겁니다. 기쁠 땐 기쁜 것을 누려야 되요.

우리는 언제든지 내 삶에 있어서 슬프고 어두웠던 시기를 꺼내어서 그것을 가지고 곰곰이 곱씹으면서 괴로워하고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쁘게 하실 때는 ‘아, 나에게 즐겁고, 기쁘고, 누리라고 한 것이구나.’ 라고 누릴 수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사람이요, 누릴 수 있는 것은 누릴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겁니다. 그것조차 누리지 못한다면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우리에게 피할 길을 내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어제 저녁에 설교를 쓰다 보니 굉장히 졸립더라고요. 그래서 잠자리에 누워서 너무너무 감사해요. ‘하나님 이렇게 졸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졸린 것 굉장히 감사하죠? 이 나이 되어 보세요. 여러분 졸린 것 감사한 거잖아요. 밤에 자려고 하는데 잠이 안오고 정신이 멀똥해지고 그러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졸린 것이 너무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하나님 이렇게 졸려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무슨 마음을 가져요? ‘아 내일 새벽에 일어나야 돼’ 그런 걱정 할 필요가 없잖아요. 졸리면 그냥 졸린 상태로 여러분 그냥 깊은 잠속에 빠져가면서 행복함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좋아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밤에 자면서도 ‘아, 내가 내일 또 일어나야 하는 구나.’ 그런 생각하면 굉장히 괴로운 거예요. 우리 삶은 기쁜 일이 있을 때 그냥 기뻐하면 되는 거예요. 휴일이라는 것은 쉼을 통해서 새로운 힘을 재충전해서 또 우리들에게 새로운 일을 맡겨 주셨을 때 그 일을 잘하기 위해서 쉬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월요일이 되면 아주 오전에는 푹 자는 것 같아요. 그래야 한 주간 동안에 잘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아요. 월요일 오전에 늦게까지 푹 잔 날하고 그렇지 못한 날하고 그 주간이 틀린 것 같더라고요. 어떤 때는 쉬면서 제 마음에 들어요. 우리 성도들 중에 고생하는 분들 많은데 내가 이렇게 쉬어도 되겠는가 하는 마음이 목사로서 많이 들어요. 우리 성도들 중에서 정말 쉬지 못하고 어렵고 고통스럽게 지내는 분들이 많이 계시거든요. 그런데 또 제 마음에 한편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잠잘 때 잠자서 차라리 어려운 성도 있을 때 기도해주고 또 그 마음에 위로해주고 하는게 더 낫지 않겠는가? 정말 쉬지 않고 있으니까 결국 병이 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병이 나면 시간상으로 더 손해를 보는 것 같더라고요. 정말 병나서 성도들의 마음에 걱정과 근심을 끼치거나 또 정말 성도들이 필요로 할 때 내가 달려갈 수 없다면 그것은 더 어려움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쉬는 것에 대해서 그저 마음속에 편안한 마음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실 때 그 은혜를 기쁨으로 우리는 누려야 되요.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형통까지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기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제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뭔지 아세요? 여러분 바꿔서 생각해 봅시다. 자녀가 부모를 제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뭡니까? 자녀가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자녀가 행복하게 살면 그 부모는 가장 기쁜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쁘게 살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기쁘게 만드는 이런 기쁨의 은혜가 넘치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겁니다. 내가 기뻐서 밖으로 철철 넘치는데 그 기쁨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거예요. 내가 행복해하는 것이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우리는 따라서 성도는 기뻐해야할 의무가 있는 겁니다.

어떻게 해석하면 기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해석의 방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어떤 운동선수들이 끝까지 운동을 잘 할까요? 자기가 하고 있는 운동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일거에요.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운동을 해야 돼.’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오래 잘하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자 우리 옆에 사람에게 한번 얘기 합시다. ‘나는 기뻐해야할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자 다시 한번 따라합니다. ‘내가 우울할 때 나를 깨우쳐주세요.’ 여러분 우울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사단은 항상 우리 마음을 우울질로 만들어서 우울하게 만드는데 이것은 사단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기쁘게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우리들에게 뭐라고 하셨어요. 자, 모든 만물을 관리하도록 하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라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기쁨과 은혜의 권세를 주셨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기쁘게 해드려야 되요. 저는 목사로서 성도들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성도들에게 힘이 나드리게 해드리고 싶어요. 예수 믿는 것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지만 결국 그것은 기쁨의 생활이라는 것을 우리 성도들에게 꼭 전달해 드리고 싶습니다. 하물며 목사도 이러한데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어하시지 않겠습니까? 기쁜 날에 걱정으로 우울해 하지 말고 그 기쁨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누려야 합니다.
앞일에 대한 지나친 걱정 이것은 불신앙이에요. 내 앞에 어떤 걱정이 일어날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내게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와 축복을 주실까? 그것을 나는 어떻게 기뻐하고 누릴 수 있을까? 어떻게 효과적으로 그것을 사용하여 주의 기쁨을 더 크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생각이라 이 말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내 앞길을 인도하시겠지 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로 우리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이 믿음의 백성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하나님이 결국 내 길을 인도할꺼야. 따라합시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하나님이 내 길을 인도하실꺼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나는 행복할 수 밖에 없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쁨을 주실 때, 형통함을 주실 때, 그 기쁨을 누리고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 앞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두 번째는 오늘 본문에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깊은 묵상을 통해서 삶의 깊이가 깊어지는 겁니다. 왜 우리 삶에 곤고한 날을 주셨을까요? 그 곤고함을 통해서 우리 삶의 폭을 넓히고 우리 삶에 깊이를 더하게 하고 우리 삶에 깊은 숙성함이 있도록 하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우리의 삶은 고난 속에 묵상으로 인하여 더 깊어지고 성숙됩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 훌쩍 크죠? 어려움을 당하여 그 어려움을 극복해 냄으로 말미암아 훌쩍 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성숙은 결국 깊은 삶의 묵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시험을 그렇게 어려워하지 마세요. 여러분 시험 치르는 이유는 점수 매겨서 사람 순위별로 등수 매기는 것이 시험의 원래 목적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희 교회에서도 우리 교역자들이 연초가 되면 늘 시험을 봐요. 뭐냐하면 교구 성도 이름 다 외우는것입니다. 얼굴하고 사진하고, 사진 쭉 놓고 거기에다 이름을 쓰는 것을 시험 봐요. 점수가 낮으면 재시험도 봐요. 여러분 왜 그러냐 하면요,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그 빨강 원피스 입은 그분을 위해 기도하오니 그 분에게 축복을 주십시오. 노란 머리를 축복하옵소서.’ 좀 이상하잖아요. 그렇죠? 얼굴하고 이름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것이 더 마음속에 은혜가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머리에 삔 꽂았던 그분, 노란 넥타이를 축복하옵소서.’ 뭐 이렇게 한다는 것은 좀 마음에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최소한 이름이라도 외우고, 또 얼굴도 외워야 우리가 기도라도 하는데 마음에 은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시험보는 거죠. 시험점수 못 맞았다고 괜히 벌 줄라고 시험 보는 것이 아니죠. 시험을 통해서 수준을 높여가는 거예요. 시험을 통해서 유익을 주는거라 이 말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곤고한 날을 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그랬어요. 우리 인생을 생각하는 겁니다. 내 삶을 생각하는 거예요. 내 삶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 가운데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그 문제를 해결할까를 생각하므로 말미암아 그 한순간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훌쩍하게 크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곤고를 통해서 우리는 더 큰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테너 가수 중에 안드레아 보첼리라는 사람을 여러분 아시죠? 델 모나코나 아니면 카루소나 이런 테너 가수의 뒤를 이어서 아주 아름다운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를 압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안타깝게 나중에 후천적인 시각장애인이 됐어요. 이 사람은 법학을 공부해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성악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서 그 사람은 성악을 공부하려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을 받아주지 않았어요. 어떻게 맹인이 성악을 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어떻게 무대에서 이와 같이 연주를 할 수 있겠느냐 해서 그가 배우려고 했을 때 그를 가르칠 사람이 없어요. 또 배울 돈도 없었고요. 그런데 그는 노력해서 결국 최고의 성악가가 되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쓴 책을 제가 봤는데요.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나는 불행에 적응하는데 일주일이면 충분하다.’ 나는 내게 주어진 불행에 적응하는데 일주일이면 충분하다. 일주일이면 나는 불행에 적응하고 이제 그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하고 누리고 즐긴다. 그래 우리는 누구든지 어려움이 있는 거예요. 누구든지 어려움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의 때에 깊은 묵상을 통해서 어려움이 주는 의미를 생각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를 생각하며 주의 뜻을 이루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이에요.

어려운 사람 없다고요? 세상에 추위와 더위 있죠? 추위 더위 없는 나라 있다고요? 제가 언젠가 좀 시간이 오래 됐는데요 인도네시아에 가본 적이 있어요. 선교회의가 있어서요. 선교 총회가 있어서 전세계에서 선교사님들이 120명 정도 2년마다 한번씩 모여서 이렇게 총회를 하는데요. 갔더니 인도네시아 반둥이라는 곳에서 하더라고요. 좀 오래된 얘기인데요. 제가 2월에 간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굉장히 덥더라고요. 여기는 겨울이잖아요. 2월이면. 그래서 가서 회의를 했는데 아침부터 시작해서 저녁까지 하루 종일 발표하고 회의하고 하니까 낮에는 시간이 없고 다 끝나면 11시쯤 되는데 11시쯤 해방 되잖아요. 그래서 11시쯤에 거기에 풀장이 있어서 그때 가서 막 수영도 하고 그랬어요. 밤 11시에 다 끝났다고 선교사님들하고 다 수영도 하고, 너무 더우니까요. 근데요, 호텔 프론트에 들어오니까요 거기에 있는 인도네시아 직원들은요 파커를 입고 있더라고요. 춥다고, 춥다고 이 두꺼운 파커를 입고 입더라고요 긴팔, 그래서 제가 물어봤어요. 왜 저람 저기서 저렇게 하고 있냐고, 여기는 지금 이 날씨 정도면 추운거라네요. 그러니까 우리는 다 더워서 겨울이고 여름이고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거기 사람은 그때가 추운가봐요. 그래서 밤에 파커를 입고 있더라고요. 추위와 더위가 있는거에요. 아무리 열대지방이라도 그 사람들이 느끼는 추위와 더위는 있는 겁니다. 우리가 느끼는 밤과 낮이 있고 추위와 더위가 있고 우리의 삶은 삶의 순환이고 삶은 이와 같은 흘러감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곤고할 때에 우리는 곤고를 받아들이고 곤고를 통해 삶의 진리와 이해와 배려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파보고 실패해보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슬픔의 날에는 우리는 그 슬픔 자체를 역시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슬픔이 주어졌을 때 이 슬픔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것을 누릴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사회가 날마다 코미디 영화만 봐야 즐거운 것은 아니에요. 때로는 비극적인 영화를 봐도 그 가운데 우리는 삶의 마음의 정화시킬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슬픔을 해석해야 해요. 도대체 이 슬픔이 나에게 주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어떤 길로 인도하실까?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사람두요 그 사람에게 정말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거에요. 그리고 그 사람 평생 무엇인가 좋은 것을 해주고 싶은 거에요. 심지어는 내가 죽어도 나 때문에 그 사람이 평생 행복하고 무엇인가를 누릴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것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대한 마음이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간에 대한 마음도 이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어떠하시겠느냐 이 말이에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기쁨을 주시길 원하시는데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길 원하시는데 우리에게 슬픔을 주셨을 때 그 슬픔만 가지고 우리를 완전히 망하게 하시겠느냐 이 말이에요. 슬픔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유익을 주셔서 마침내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슬픔을 해석하여 슬픔의 유익을 찾고 그 슬픔을 통해서 우리는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생각을 합니다. 십자가의 쓴 잔을 피하기를 원했어요. 그러나 마침내 기도 중에 깨닫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십자가에 달릴 때 또 예수님을 절규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모든 일을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다 이루셨다 이 말입니다. 이와 같은 고통의 절규 속에서도 결국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완성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곤고한 날이 있을 때 우리는 깊은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생각하며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유익을 삼고 우리 삶속에 기쁨과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믿음의 백성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여건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 말이에요. 너무나 표피적인 것만 보고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거죠. 여러분 여기 차가 있다고 합시다. 차를 한잔 가지고 왔는데요 그것을 물 먹듯이 꿀꺽 꿀꺽 마시면 안 되죠? 그렇죠? 차를 마시면 향기도 그 다음에 그 맛도 음미하면서 마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참된 진리를 마치 차 가지고 왔는데 꿀꺽 꿀꺼 물 마시는 사람하고 똑같이 우리의 삶 가운데 표피적인 것만 보면 안 돼요. 기쁨이 있을 때 하나님의 기쁨의 세미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더 큰 기쁨을 주실까?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슬픔을 주셨을 때 그 곤고할 때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원하실까를 깊이 생각하며 우리는 우리 인생을 깨달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가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원하심 속에 우리를 놓아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미래를 알지 못하게 함으로 오히려 우리 삶의 현재 소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미래가 정해져 있고 우리가 그 미래를 안다면 우리에게는 큰 복인것 같으나 재앙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우리 내일을 알 수 있다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재앙이라 이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미래가 정해져 있고 우리의 미래를 다 안다 하면 뭐든것이 잘된다 생각하면 우리는 나태해 질 겁니다. 노력도 안 할거예. 결과적으로 망가질 겁니다. 뭐든 것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해봐야 소용없는데 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기대와 소망도 없이 우리는 그대로 그만두게 될 것이라 이 말입니다. 삶의 기쁨도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없어질 것이고 우리는 어차피 이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에게 돈 보다는 지식과 지혜를 주길 더 원하실 겁니다. 왜냐하면 돈은 주면 그만이지만 지식과 지혜는 그 돈을 벌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지식과 지혜보다 여러분들이 더 주기 원하는 것은 삶의 진실과 성실일 것입니다. 진실과 성실을 가질 때 그 사람은 지식과 지혜를 쌓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을 주고 싶으면 우리 삶의 근본인 믿음을 주기를 소원하실 것입니다. 삶의 본질을 해결해 주는 것, 어떤 경험과 어떤 해결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길 원하시니 우리는 믿음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시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어차피 나름대로 자신의 위치에서 위험과 위기를 당합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을 붙잡고 우리 삶의 위기를 극복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의 지경에 일어서는 것이죠. 내게 한 번의 위기가 왔을 때 그 위기를 이겨내면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의 날개를 다는 것이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내일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내일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래를 알지 못함으로 우리이게 지금과 같은 기회나 상황이 없을지 모르니 지금 최선을 다해 잘해야 합니다. 제가 늘 하는 말이 있죠. 자 오늘도 합시다. ‘현직에 있을 때 잘합시다.’ ‘힘 있을 때 잘합시다.’ ‘뭔가 있을 때 잘합시다.’ ‘남이 나에게 기대할 때 잘 합시다.’ 현직에 있을 때 잘하세요. 힘이 있을 때 잘하세요. 뭔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을 때 잘하세요. 뭔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남이 나에게 뭐가 도움을 바랄 때 여러분 잘하셔야 되요. 힘이 있을 때 헌신하고 뭔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을 때 헌신하고, 여러분 현직에 있을 때 헌신하고 여러분 다른 사람이 여러분 좋아할 때 헌신하셔야 되요. 나 지금 너무 바빠서, 나 아직 해야할 일이 많아서, 여러분 그러면 나중에 여러분들이 헌신을 해도 소용이 없어요. 아무 의미가 없어질 때가 있단 말이에요. 여기 힘이 없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이 자리에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다 힘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다 소용되고 필요한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오늘이 가기 전에 여러분 하나님께 헌신하세요. 이 날이 가기 전에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날이 가기 전에 다른 이들에게 기쁨으로 여러분의 모든 것들 다 하나님의 은혜로 같이 나누고 같이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은혜를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 가운데 주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죠? 내게 있는 지금의 이 상태가 없어질지도 몰라요. 기쁨이 없어질지도 모르고요. 또 슬픔이 없어질지도 몰라요. 모든 일은 흘러가니까요. 그러니까 있을 때 우리는 잘해야 되요. 있을 때 헌신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장래 일을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신 것 우리에게 큰 축복입니다.

현실은 항상 우리의 상상보다 어렵죠. 우리는 따라서 소망 속에 살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현실은 흘러가니 내게 있는 것 가지고 우리는 다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미래를 알지 못하게 함으로 우리는 현재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교차되고 흘러가고 또 다시 옵니다. 따라서 어차피 없어질 것이니 이것 가지고 누리고 선한 일을 하자. 슬픔의 때도 곧 지나갈 것이니 내가 슬픔의 때에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아름다운 기록과 효과를 남길 것인가를 생각하여 슬픔을 초연히 맞이하고 후회 없이 잘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기쁨의 때에도 초연히 보내야 되지만 위기와 어려움과 슬픔의 때에도 초연하게 보내야 합니다. 내가 이런 어려움을 한번 극복함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 어려움을 극복할까하는 이와 같은 아름다운 사례를 이룰 수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 좋을 때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려울 때 잘하는 것이 더욱더 중요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세상에는 좋은 사람보다 어려움 당한 사람이 더 많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남이 간증하는 것을 들어보세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모든 것이 잘되고 이제까지 어려운 것 하나 없고 나는 축복만 받고 살았다. 은혜 받습니까? 당신이나 그렇지 우리 마음에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우리는 어려움을 겪고 고통을 겪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도 어렵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할 만한 마음에 소망을 가지고 산다라고 하면 우리는 은혜를 받아요. 왜 그렇죠? 내가 그러니까. 그 가운데 소망을 삼는 겁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내가 슬프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가 있어요. 내가 슬픔을 극복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요새 무슨 생각을 가지냐 하면요 요즘 그냥 내게 주어진 현재를 가장 잘 누리자라는 생각을 해요. 이건 당장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현재를 가장 잘 누릴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에요. 내일 또 어떤 날이 주어지면 그 날 가운데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내일 고통이 다가오면 고통가운데 해결할 은혜를 주세요. 자 따라 합시다. ‘기쁠 때 마음껏 누리고 고통이 다가오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길로 또 해결합시다.’

미래를 모르는 것 불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고 현재에 충실하라는 뜻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두 가지를 다 준비해요. 어려움이 있을 때도 준비하고 그 다음에 기쁨이 있을 때도 준비해서 어떤 경우든 준비한 것을 사용해요. 어리석은 자는 한 가지만 준비하고 다른 것이 왔을 때 거기서 고통을 겪으며 후회한다 이 말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하나님께서 늘 병행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기쁠 때는 어려울 때를 예비하고 어려운 때는 기쁜 때를 생각해서 위로받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삶에 겸손해지며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병행케 하심으로 말미암아 늘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려울 때 너무 마음 아파할 필요가 없어요. 삶의 사건과 시간은 다 흘러갑니다. 좋은 일도 흘러가고요. 어려운 일도 흘러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삶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따라서 겸손해 지는 거죠. 좋다고 해서 교만할 일이 없으며 어렵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왜 내게 이런 어러움이 있을까? 왜 내게 이런 기쁨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여 어려움을 해결할 대책과 기쁨을 초청하기 위한 삶의 방향에 힘을 써야 합니다.

필연적으로 삶의 기쁨과 곤고가 교차 병행된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내일을 준비하게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지금의 날이 흘러가요. 두 가지가 병행되니까 기쁨이면 어려운 때가 온다는 뜻이에요. 어려우면 반드시 기쁨의 때가 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이고 신정적이고 실제적인 적을 쌓아가야 되요. 저희 집이 6남매인데요. 제가 6남매 중에 막내거든요. 제일 위에 있는 형제와 제가 20살 차이가 나고 그렇게 5살씩 차이가 나요. 제가 이렇게 막내로 자라다 보니까 학교 다닐 때 제가 용돈 걱정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가끔 가다가 주기적으로 번갈아 가면서 한번씩 들리면 되더라고요. 아무 말 안해도 그냥 가기만 하면 알아서 하더라고요. 집에 동생들 오면 알아서 하세요. 아셨죠? 그래서 제가 학교 다질 때 참 잘 지냈어요. 그런데 요즘 조카애들이 집에 오면 제가 그래서 후하게 용돈을 줍니다. 그리고 뭐라고 얘기하냐 하면 “너희 엄마 아빠가 아빠 학교 다닐 때 용돈을 줬어. 그래서 삼촌도 너희에게 이렇게 용돈을 주는거야.”라는 얘기를 꼭 합니다. 이거 엄마 아빠가 나한테 준건데 삼촌이 너한테 갚는거야. 그리고 네가 그런 얘기 해요 너도 이 다음에 다른 사람 줘라.

우린 어차피 심는 것 아닙니까? 심으면 또 받게 되잖아요. 우리는 내가 기쁠 때 내가 형통할 때 우리는 내게 또 어려움이 닥칠 때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또 아니면 누군가를 위해서 심을 것을 생각하며 우리는 그것을 심는 거예요. 잠언 27장 1절을 보면 ‘너희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상대적으로 우리는 아무리 슬픈 날도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요. 잠언 11장 24-25절을 보면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라고 애기하고 있습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우리는 내가 기쁠 때 내 기쁨의 날도 어느 덧 사라질 거예요. 어차피 사라질 것이니까 또 곤고한 날이 닥칠거니까 그때를 생각해서 우리는 기쁨으로 선을 베푸는 겁니다. 전도서 11장 1-2절을 보면요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식물을 물 위에 던져놓으면 여러 날 후에 다시 찾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거시적인 투자에요. 우리는 당장 거둘 수 없는 것 같지만 멀리 보고 뿌리는 겁니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찌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분산투자를 얘기하고 있는거죠?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그러니까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누어 주라는 거예요. 여러 사람에게 나눠주면 언젠가 어려움이 있을 때 그 나눠준 한사람이 내게 결정적인 도움이 돼서 내가 어려웠을 때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겁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항상 두 가지가 병행되서 온다는 것을 생각하고 기쁨의 때는 슬픔의 때를 예비해서 무엇인가를 투자하고 뿌려두고 무엇인가 나눠두는 겁니다. 또 곤고한 때는 하나님 앞에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 가운데 훨씬 더 숙성되는 겁니다. 우리의 삶 속에 뿌려둔 것은 언젠가 거두될 것이고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물위에 뿌렸고 얼마나 여러 군데에 나누어 주었고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우리의 삶의 역사를 이루셨습니까? 심은 데로 거둔다고 하셨는데 여러분들이 심으셨으면 반드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두지 못하면 그 후손이 거두게 될 것입니다.

형통과 곤고를 병행케 하심으로 우리에게 균형잡힌 삶의 인식과 인격을 이루게 합니다. 어느 한쪽만 앎으로 삶의 편협과 왜곡을 벗어나 삶의 전체를 이해함으로 균형과 조화와 인식과 인격을 갖추고 이해의 범위를 넓혀가는 것입니다.
배가 고파서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켰어요. 그래서 어리석은 군주가 뭐라고 얘기해요? 빵이 없어서 폭동을 일으키면 고기를 주어라. 전혀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삶의 균형이 없어요. 자기 혼자 호위 호식하니까 어려운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몰라요. 우리의 삶 가운데 곤고한 날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삶의 균형을 이루지 못한 사람입니다. 삶의 기쁨을 겪지 못한 사람도 균형을 이루지 못해요. 사도 바울은 뭐라고 얘기했죠? 내가 가장 빈한한데도 처할 수 있으며 내가 가장 부유한데도 처할 수 있는 나는 삶의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가 어떤 어려움에도 처할 수 있고 내가 어떤 부함에도 처할 수 있다라고 그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경우에 처할 수 있는 자신감을 필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드린 적이 있는데요. 밥상을 하나 착 받았어요. 그런데 거기에 반찬이 여러 가지가 있어요. 그런데 여러 가지 반찬 중에서 여러분 어떤 반찬을 먼저 먹겠습니까? 여러분의 취향이에요. 어떤 사람은 야 밥을 먹는데 밥상에 여러 가지 음식이 있으니 이거 다 한 번씩 먹어야 되니까 일단은 맛이 없는 것부터 먹자 맛있는 거 아껴뒀다가 맛 없는 것부터 먹어요. 아이 맛이 없다. 빨리 먹어두고 맛있는 것 먹자 그리고 맛있는 것 맨 나중에 먹어요. 1번. 2번은 뭐냐하면 이왕 먹을 거 맛있는거부터 먹자 하면서 맛있는 것부터 다 먹어버려요. 여러분 1번이 좋겠어요, 2번이 좋겠어요? 우리는 교육이 되어 있죠? 이미. 제가 설명해 드릴께요. 맛 없는 것부터 먹는 사람은 이것도 맛이 없고 이것도 맛이 없고 계속해서 맛이 없는 것부터 먹어버려요. 그리고 나서 배가불러서 맛이 있는 것도 맛이 없어요. 맛이 있는 것부터 먹는 사람은 이왕 먹는 거 맛있는 것부터 먹어야지, 음식 잘 차렸다. 맛있는 것만 먹어요. 맛있는 것 먹다보면 또 색다른 것 먹고 싶으니까 먹어요.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데 근본적인 시간이 필요해요.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나는 왜 이렇게 날마다 안되는 일만 생기나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을 풀이하면 결국 우리에게 기쁠 때 그 기쁨을 통하여 힘을 비축하고 비축된 힘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겁니다. 그런데 내게 있어서 늘 고통만 있다고 생각하면 고통스러워도 고통스럽고 기쁨이 있어도 고통에 절어서 기쁨을 기쁨으로 누리지 못해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간장 한숫가락 퍼먹고 맛있는 음식 먹어봐요. 맛이 있겠습니까? 입에 짠기가 남아서 아직까지 맛이 없어요. 우리의 삶을 그렇게 살면 안 돼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내셨을 때 기뻐하라고 내셨겠습니까? 고통하며 살라고 내셨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고통중인 세상 속에서도 기쁨으로 살라고 우리를 허락하셨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고통 중에 놔두게 하신다면 우리를 세상에 내실 리가 없어요. 그리고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실 리가 없다고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비록 어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의 역사를 누리고 은혜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자 우리 오늘 한번 따라서 합시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갑시다.’ 여러분 오늘부터 뭐든지 기쁜 마음으로 한가지 한가지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기쁜 일도 누리시고 슬픈 일도 누리시고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 누리시고 그 가운데 기뻐하고 사는 주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최 종 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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