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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괴로움을 자초하지 말라 (삿 3: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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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구약성경의 사사기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고 들어간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들처럼 왕정체제를 갖추기 전까지 사이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 기간 동안 필요할 때마다 이스라엘백성을 다스리도록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세우신 이들을 사사라고 합니다.  사사기에는 열두 명의 사사가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중 7-11절에서는 그들 사사 중 첫 번째 사람인 옷니엘이 소개되고 있고 12-14절에서는 두 번째 사사인 에훗의 이름은 아직 언급되지 않은 채 그의 등장을 예고하는 정황만 서술되어 있습니다. 

  7-11절에서도 사사 옷니엘이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9절)이라는 것과, 그가 사사가 되어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과 싸워 이겼다는 것과(10절), 그래서 40년 동안 평온한 세월을 살고 죽었다는 것(11절) 외에는 그의 활동이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첫 번째 사사의 행적치고는 너무나 간단하게 서술되었다는 느낌을 줍니다.  게다가 이 옷니엘이 싸워 이긴 상대는 가벼운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강대국 메소포타미아의 왕이었습니다.  또 구산 리사다임이라는 그의 이름의 뜻이 "악하기가 두 배나 되는 구산"이라는 사실이 암시하듯 그는 웬만해서는 상대하기조차 어렵고 더군다나 그를 이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10절에서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쓰고 있듯이 정말 오직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셨기 때문에 이겼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사 옷니엘의 시대에서도 진정한 역사의 주인공은 오직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강대한 나라 메소포타미아의 포악한 군왕과 맞서 이긴 싸움이라면 이야기거리가 풍성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그친 이유는 바로 오직 하나님만이 크고 높게 드러나셔야 할 것임을 무언으로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합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의 첫 사사를 소개하는 이야기치고는 그가 행한 일에 관해서 별로 말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사사 한 사람과 그의 시대의 역사이야기보다는 사사시대 전반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와 사사시대 내내 반복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장 전형적으로 압축하여 소개하고 있다는 데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역사란 배신과 고난과 탄원과 구원이라는 순서의 반복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역사입니다.  본문을 따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7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이것은 이스라엘의 배신을 말하는 구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것입니다.  악을 행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따라 행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의 율법을 어긴 모든 행위 중 가장 나쁜 것이며 모든 악의 근원이 되는 것은 바로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 것"입니다.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이나 그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그것을 잊어버릴 백성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 가지고는 택하신 백성의 도리를 다했다고 전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도리는 그를 섬기는 것이고 오직 그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곧 그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편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과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바알과 아세라 같은 다른 신들을 섬긴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한 말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그것보다 더 큰 악은 없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억압과 중노동 때문에 신음할 때 그들을 구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온갖 기적을 일으키시며 놀라운 은혜 가운데 그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셔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크고 강한 가나안의 모든 군대를 다 이기게 해주시고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게 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다" 했는데 여기서 "자기들의 하나님"이라는 말 속에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 만유의 주인이시고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자기들 이스라엘백성에게 그토록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 그래서 자기들이 절대로 잊을 수 없고 잊어버려서도 안 되는 언약의 하나님이란 뜻이 다 녹아들어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이 그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엉터리 신들, 아니 그저 돌기둥과 나무기둥에 불과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악을 행한 것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이 다른 신에게 한눈을 팔 때에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습니다.  8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팔았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배신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을 포악한 이방나라 왕의 손에 넘겨 팔 년 동안 그를 섬기게 함으로써 고난을 당하게 하신 일로 나타났습니다.  외국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 그것도 보통 사람보다 갑절이나 포악한 자가 왕인 외국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재앙입니다.  35년간의 일제의 지배를 받아본 우리의 경험만으로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민족의 자존심 같은 건 기본적으로 짓밟히게 되어 있습니다.  제 나라 말도 마음대로 쓰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남의 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민족정신의 소멸을 가져올 수 있는 일입니다.  제 민족 고유의 이름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민족의 정체성이 상실되는 일입니다.  군사, 외교, 정치, 경제, 교육 등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지하자원이나 피땀 흘린 농사의 수확도 다 수탈당하고 맙니다.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야 합니다.  남자들은 어린 학생들까지 다 남의 전쟁터에 끌려나가 총알받이가 되어야 합니다.  젊은 여자들은 닥치는 대로 끌려가 성노리개로 전락되고 온갖 치욕과 육신의 고통을 당하며 죽어갑니다.  그러고도 배상이나 사과는 고사하고 사실인정조차 받지 못합니다.  남은 사람들도 강제노역에 동원되거나 툭하면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거나 두들겨 맞거나 협박을 당해 원치 않는 민족의 반역자 노릇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도 그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 괴로움을 자초한 것입니다.

  스스로 초래한 괴로움을 견디다 못한 이스라엘백성이 결국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탄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9절의 첫머리 부분을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이스라엘이 아무리 묵과할 수 없이 악하고 악한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들이 살려달라고 부르짖을 때에는 그 탄원을 외면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백성을 이방 압제자에게서 구해낼 인물을 세우십니다.  그래서 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새롭게 평온한 삶을 회복시켜주십니다.  9절 이하를 계속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그러나 이스라엘은 한 차례의 쓰라린 역사의 체험을 통해 영원히 하나님과의 언약에 성실하고 충성된 백성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한두 세대가 지나고 나면 또 다시 과거의 조상들의 전철을 밟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악을 행하곤 했습니다.  12절 앞부분을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이 새롭게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면 또 다시 하나님의 진노와 이로 말미암은 괴로움의 역사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12절 이후를 계속해서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열여덟 해 동안 섬기니라."  이스라엘은 새 이방지배자에 의해 또 괴로운 세월을 지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렇게 두고두고 배신과 고난과 탄원과 구원그리고 또 다시 배신이라는 순서로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반복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이 깨달아야 했던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인간의 불신앙적 본성과 끊임없는 배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그 많은 복을 깨닫지 못하거나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그것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금방 망각하며, 헛되고 거짓된 것들에게 끊임없이 마음을 빼앗기는 죄악입니다.

  둘째는, 이로 말미암는 괴로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의로운 고난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려고 함에 따른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때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람이나 백성을 특별한 일에 크게 쓰시려고 일정한 연단을 주시는 일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오는 고난은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오는 고난이 아니라 스스로 불러들이는 괴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괴로움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초래하는 것들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언제나 평온하고 만사가 형통하리라는 약속을 받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이 당한 외침과 외세의 지배와 그로 인한 괴로움은 모두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여 자초한 일들이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을 향하신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당신의 백성의 배신의 죄를 결코 묵과하시지 않으시나 그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용서하시며 은혜의 구원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끝없이 끝없이 범죄하는 백성을 한없이 한없이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채찍을 드시되 그 채찍으로 인한 상처를 친히 싸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사사기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나아가 성경전체의 이야기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갖기를 원하신 근본적 관계입니다.  이렇게 사사기는 하나님의 율법과 함께 복음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이 본문이 대표하는 사사기 전체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신앙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는 이스라엘처럼 언제나 쉽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의 은혜를 망각하며 세상의 헛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악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며 근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괴로움을 당할 때 먼저 우리 자신의 죄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쓰고 그 안에서 복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에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용서와 은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찾을 유일한 구원자이시고 피난처이시며 방패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고 특별히, 사랑과 은혜와 용서의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오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사랑과 은혜와 용서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질투의 하나님이시고 정의의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채찍을 들 줄 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사랑하시는 당신의 자녀들의 죄악을 그대로 묵과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불필요한 괴로움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월과 삶을 최대한 하나님께 충성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되게 살아야지 쓸데없이 괴로움을 자초하여 낭비하며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녀를 반드시 용서하시고 구원의 손길을 거두지 않으시지만, 그렇다고 회개할 일을 알면서도 일부러 저지르며 살아서는 안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괴로움을 자초하지 말라", 이것은 바로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용서하시는 은혜의 하나님"과 함께 사사기의 주된 메시지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우리들 개개인에게 주시는 메시지이기도 하며 또한 우리 민족에게 주시는 공동체적 메시지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괴롭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괴로움을 드리지 않는 착하고 지혜로운 백성들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수 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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