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세 비유 (마 25:46)

  • 잡초 잡초
  • 366
  • 0

첨부 1


  마태복음 25장에는 3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 비유가 그것입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이렇게 되어선 안된다는 경계”에 있습니다. 또한 이 비유들은 “하나님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나 어리석은 다섯 처녀나,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나 한 달란트 받은 자나, 양이나 염소나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 후에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로 나뉩니다. 그러므로 생각도 마음도 말도 행동도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깝게 살아 최후의 심판 때에 칭찬 듣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구의 65억 인구를 두 부류로 나누면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고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입니다. 반면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고, 예수 믿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정확합니다.  잘, 잘못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정확지만, 우리의 삶은 정확치가 못합니다.  삶도 심지어는 구원까지도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복음25장의 세 가지 비유가 주는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1.성경은 믿는 사람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나 어리석은 다섯 처녀나 다 믿는 사람입니다. 교회만 다니면 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 양이 아닙니다.
2.성경은 믿는 자 중에서 구원 받는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를 나누고 있습니다.

  1)열 처녀 비유 : 등은 다 가지고 있는데 기름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습니다. 등은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기름은 성령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행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행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  마25: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등만 가지고 기름 없는 자, 교회만 다녔지 성령 받지 못한 자,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 교회 다닌 다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 자는 천국을 못 갈수도 있다고 하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2)달란트 비유 : 내게 준 달란트를 묻어 놓으면 안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본질(순종)에서 벗어나 현상(이윤)만 추구하게 되면 욕심과 거짓말이 생깁니다.  마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은 지옥입니다.  묻어둔 달란트 빨리 캐내어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3)양과 염소 비유 :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그분께 한일이 됩니다. 

  원종수 권사의 간증에 보면, 원 권사는 주님 주신 지혜로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 의대에 다녔습니다. 그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었는데 그 모친께 고기 사드리고 싶어 고향집에 찾아갑니다. 가는 도중에 버스에서 그는 불쌍한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종수야 너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 그 할아버지에게 주거라,” 그래서 순종을 했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설날 바로 전날에 그 모친이 어떤 노숙자 할아버지를 한분 모셔 왔습니다. “종수야 이 할아버지 목욕시켜 드려라” 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그는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옷을 벗겨드릴 때, 도저히 더러워 만질 수가 없어서 막대기로 그 옷을 벗겨놓고 목욕을 시켜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또, 설날 입으려고 아껴놓은 옷을 입혀드리라고 해서 또 그렇게 순종했습니다. 그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병원에서 인턴을 할 때, 무릎이 퉁퉁 부운 할아버지가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는  “내 월급에서 제하고 이 할아버지를 고쳐주세요” 라고 말하고 그 할아버지를 치료해주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기도할 때 이 세 가지 일이 환상처럼 기도 속에 보여 지면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that was me' “내가 바로 그였다, 그가 바로 나였다. ”

  눅16:19 이하에 나오는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거지를 돌보는 삶을 살지 않았으니 그의 삶은 염소 같은 삶이었습니다. 딤전5:6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계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살았다는 이름은 있지만 죽은 자가 교회 안에 너무 많이 있습니다.  한국교회 전체가 그렇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산 것과 죽은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물고기로 비교해 본다면,  죽은 물고기는 아무리 커도 물살에 떠내려가지만,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무엇을 의미 합니까?  살아있는 성도는 세상을 거슬려 올라갑니다.  그러나 죽어있는 성도는 세상 물결 따라 떠내려갑니다. 꽃으로 비유한다면, 산꽃은 향기가 나지만 죽은 꽃은 악취가 납니다.  나무로 비유해 본다면, 산 나무는 열매를 맺고 모습이 푸르지만, 죽은 나무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으로 표현해 본다면, 살아있는 사람은 변화가 있지만, 죽은 사람은 변질되어 갑니다.

  의인과 양은 마25:34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라는 말씀과 같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면 염소는 어떻게 될까요?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눅19:1 이하에 나오는 삭개오는 분명히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26장에 나오는 가롯 유다는 분명히 지옥 간 사람입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생활에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눅16장의 부자가 이 설교를 들어야 했듯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설교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성경은 외치고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린다고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며, 달란트를 받았다고 해서 다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하고,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충성스럽게 일하고, 양처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확실히 구원을 받습니다. (장 경 동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