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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은 때를 어떻게 살까? (벧전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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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절에 “육체의 남은 때“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니

”육체의 남은 때“라는 말은 우선 ”남은 생애“를 말합니다.

저희 교회에는 50대에 속한 성도들이 전 교인의 21.1%로, 제일 많습니다.
50대부터는 삶의 후반부라고 할 수 있겠는데 여기에 해당되시는 분들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50대에 속한 성도들이 제일 많다고 하니까 ‘아, 우리 교회는 젊지 못한 교회로구나!’ 하기 쉽겠는데 아닙니다, 50대가 제일 많지만 그 다음은 20대로서 18.2%, 그 다음은 30대로서 16.9%, 20대와 30대를 합하면 35.1%입니다.
목양교회는 젊은 교회이고, 젊어지고 있는 교회입니다.

“육체의 남은 때“라는 말에는 또 ‘남은 시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영어 성경(KJV)은 이 말을 “그의 시간 가운데 남은 부분”(the rest of his time) 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제 2005년이 3분의 1 남았습니다. 정확하게는 132일이 남았습니다.
여러분 올해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오늘 수험생들을 위한 안수기도회를 하는데 수능고사까지 94일 남았습니다.
수험생들, 남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대학이나 중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 남은 마지막 한 학기를 어떻게 보내겠습니까?

이 자리에는 직장에서 정년이 가까운 분들, 어떤 직책의 임기가 끝나가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 분들, 정년 때까지, 임기까지 어떻게 일하시겠습니까?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이와 같은 문제의 답을 함께 얻으려고 합니다.

본문은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원칙적이고도 간단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 매우 중요한 말이고 엄숙한 말입니다. 
그런데 간단하지 않은 말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지 못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열심히 그렇게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알게 될 때도 있습니다.
구체적인 일들을 만나서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물어야 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또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나라의 헌법과 같습니다.
나라에서 새로운 법을 만들거나 새로운 조치를 할 때 ‘이것이 헌법 정신에 어긋나지 않는가?’ 판단하기 위해서 많은 애를 씁니다.  여러모로 살피고 전문가들의 의견도 듣습니다.
이 일을 판단하기 위한 헌법재판소라는 권위 있는 기구도 있습니다.
애써 법을 만들었는데, 정책을 수립했는데 ‘위헌이다!’ 하면 헛수고를 한 것이 되고 혼란이 일어납니다.
성도들은 나의 삶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그 이상으로 애써야 합니다.
힘써 일했는데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면 역시 헛수고가 됩니다.

자, 우리는 우리 생애의 남은 부분을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일까요?
올해의 남은 시간, 어떤 일을 하는데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일까요?

첫째,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먼저 예수 믿기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1절을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말합니다.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나도 이전의 죄에 사로잡힌 나를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하는 마음을 갖고 그 마음으로 여러 유혹을 이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믿는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진리를 로마서 6장에서 세례와 연관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려주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기원 5세기에 야만족인 프랑크왕국에 클로비스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이 기독교를 잘 믿는 클로딜다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왕비는 클로비스 왕을 믿게 하려고 애를 많이 썼는데 왕은 거절했습니다.
오히려 나라나 집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하나님 탓이라고 화를 냈습니다.
왕자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왕비를 구박했습니다.
그러다가 큰 싸움에서 패해 거의 전멸 당할 위기를 만났습니다.
왕은 왕비가 그렇게 자주 말하던 하나님이 생각났습니다.
왕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이 위기에서 벗어나 승리하게 해 준다면 나는 기독교를 믿겠습니다.’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클로비스 왕은 이 전투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왕은 약속을 지켜 기독교를 믿고, 그 증표로 서기 496년 크리스마스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남편에게 전도하기 위해 애쓰는 분들이 많은데 힘써 기도하고 꾸준히 전도하면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적당한 때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왕은 혼자만 세례 받은 것이 아니라 부하군인 3천 명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군대에서 지금도 몇 백 명씩, 또는 몇 천 명씩 진중세례를 받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진중세례의 원조는 클로비스왕과 그의 군대인 것 같습니다.
클로비스왕은 세례를 받기 전에, 세례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싸움을 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전리품을 취하는 것이 사는 보람이고, 그것이 왕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세례를 받으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클로비스 왕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아십니까?
그 때는 세례를 받을 때 온 몸이 물에 들어가게 했는데 왕은 물에 들어갈 때 오른 손은 머리 위에 올렸습니다. 손은 물에 젖지 않게 했습니다.
부하들도 그렇게 하게 했습니다.
세례 받은 다음에도 오른 손을 가지고 싸움은 계속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온전한 세례라고는 하기 어렵지요.
그러나 야만족인 클로비스왕이 세례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만합니다.

로마서 6장 6절을 읽어 드립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는 십자가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야합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예수 믿기 이전과 예수 믿은 이후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일을 할 때, 무엇을 결정할 때, ‘이것은 혹시 예수 믿기 이전의 나의 사고방식, 나의 습관에 따른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시기 다릅니다.
그렇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버리세요. 그렇게 하지 못하다면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서도 새 생명 가운데에서 행하지 못하고, 예전에 행하던 그대로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참 신자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또한 2005년의 남은 시간을 흘러간 3분의 2와는 다른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올해의 남은 시간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흔히 출발은 좋은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예전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아닙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끝이 제일 좋아야 합니다.
올해 계획한 것들이 있는데 흐지부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성경통독, 모든 예배에 참석, 열심 있는 봉헌, 봉사, 전도, 많은 계획을 세웠는데 그리고 처음에는 잘 실천했는데 지금은 ‘내가 그런 계획을 세웠던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매년 그런 것이지!’ ‘누구나 그런 것이지!’ 이렇게 합리화 시키지 마세요. 
‘내년에 다시 출발하지!’ 하지도 마세요.
남은 3분의 1에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힘쓰세요.
조금 조정하고 축소하는 일이 있더라도 꼭 그렇게 하셔야합니다.

목양교회 성도들은 대성전 시대라는 말을 자주하고 있습니다.
‘대성전 시대를 잘 열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대성전 시대에 합당한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성전 시대에 부족함이 없는 속회, 선교회, 교회학교, 찬양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와 같이 기도합니다.
대성전 시대의 성도는 대성전 시대 이전과 생각하는 것, 그리고 자세가 달라야합니다.

새로운 절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무더웠던 지난 절기와는 다른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새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주간과는 다른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전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 애쓰지 않는 사람은 창살 상자에 들어있는 다람쥐와 같습니다.
다람쥐가 들어 있는 창살 상자에는 큼직한 바퀴가 있습니다.
다람쥐가 그 안에서 열심히 달립니다. 바퀴는 잘 돌아갑니다.
그러나 다람쥐는 제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 달팽이보다도 못한 것입니다.
달팽이는 아주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가지 않습니까?

이전과 다른 생활, 어제와 다른 생활을 하기 위해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제까지는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좀 있었어도 오늘부터는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 나가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마지막이 가까운 것을 알고 지내야 합니다.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종말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말세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휴거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심판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신학이 여러 분야 가운데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종말론입니다.
이 종말론은 가장 어려우면서도 또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이단들 가운데는 종말에 대한 잘못된 주장 때문에 이단이 된 경우가 제일 많을 것입니다.
성경 66권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종말 문제를 말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입
니다.

종말론은 이렇게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것인데 여러분, 종말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종말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조금 더 말을 붙이면 ‘종말이 가까웠으니 언제 종말이 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종말론의 전부를 아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은 종말론의 알맹이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내 삶의 종말입니다.
우리는 내 삶이 언제가 마지막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주일의 끝은 토요일, 8월 27일이고, 8월의 끝은 8월 31일이고, 2005년의 끝은 12월 31일이라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내 삶의 끝이 언제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나를 부르실 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이 언제 나를 부르셔도 좋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름에 응하겠다.’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떤 분야에서 크게 성공한 것으로 알려진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하는 일은 정년이 70세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분은 ‘나는 65세까지만 이 일을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더 일할 수 있는데 일찍 물러서겠다는 것은 가장 겸손한 말인 것 같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분은 이렇게 말해야 맞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65세까지만 이 일을 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나에 대해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저도 모릅니다.
언제까지 살게 하실 지도 모릅니다.
어제 오래간만에 푸른 하늘을 보았습니다. 하늘이 좀 높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저녁 9시 KBS 뉴스 시간에 캐스터가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이제 여름이 끝났습니다.’ 이것이었습니다.
‘여름이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가 아닙니다. ‘여름이 끝났습니다.’였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끝날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알고 언제가 마지막이라도 좋으니 근신하며 기도하며 성실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면 경건하게 살지 말라고 해도 경건하게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3절에 있는 음란, 정욕, 술 취함, 방탕, 향락, 우상숭배 같은 것들, ‘저리 가라!’ 하게 됩니다.
7절에 있는 대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
여러분,  먼저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데,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미워하는 일에 그 귀한 시간을 쓰지 마십시오.
베드로 사도는 뜨겁게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지근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뜨겁게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삶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주신 귀중한 것입니다.

수험생들, 수험생 생활을 사랑하세요.
이 불안하고 긴장된 생활, 어서 지나가버렸으면 하고 있는 생활을 사랑하라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수능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다는 한 가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거기에 집중하면서 치열하게 살고 있는 생활은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십자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가 조금 가볍게 느껴집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일을 자랑하게 됩니다.

고칠 수 없는 것이라면 자신의 약점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LPGA 투어 브리티시 여자 오픈에서 우승한 장정 선수는 키가 작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키가 153cm라고 합니다. 현재  LPGA 투어에서 활약하는 선수들 가운데 가장 작다고 합니다.  키가 작다는 것 때문에 서러움도 말할 수 없이 많이 겪었다고 합니다.
기자가 인터뷰를 하면서 키가 153cm라는 사실을 그대로 써도 좋겠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장정 선수는 웃으면서 그대로 쓰라고 하더랍니다.
장정 선수는 ‘남들이 뭐라든 별로 신경 안 써요. 그렇다고 키가 더 커지는 것도 아닌데요. 뭐.“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선수는 자기의 약점인 작은 키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알면 에베소서 5장 16절 이하에 있는 것과 같이 우리는 때를 아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기 위해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술 취함이나 방탕을 멀리하기 위해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기 위해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기에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남은 생애를, 남은 시간을 이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종말이 가까운 것을 알고 경건과 사랑에 힘쓰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은사를 활용해서 봉사에 힘써야합니다.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은사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값없이 주신 선물을 말합니다.
곧 다양한 능력이나 재능을 말합니다.

우리는 먼저 내가 어떤 은사를 받았는지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몇 주일 전 금요 심야합심기도회에서 한상균 목사님이 파터 와그너 박사의 성령의 은사 스물일곱 가지를 소개했습니다.
예언, 섬김, 가르침, 권면, 구제, 지도력, 긍휼, 지혜, 지식, 믿음, 병고침, 기적, 영분별, 방언, 통역, 사도, 도움, 행정, 전도, 봉사, 독신, 청빈, 순교, 대접, 선교사, 중보, 축사, 스물일곱 가지입니다.
이것만 해도 많은데 빠진 것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당장 그 날 심야기도회가 끝나자 찬양대원 몇이 찬양의 은사를 뺐다고 항의를 하더군요.
피터 와그너 박사가 뺀 것이지 한상균 목사님이 뺀 것이 아닙니다.
저희 교회 여선교회에는 주방 봉사의 은사를 받은 분들이  많습니다.
주방 봉사의 은사, 참 귀한 것입니다. 아나바다 봉사, 도서실 봉사, 모두 귀한 것입니다.

저는 좀 특별한 은사를 받았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땜질의 은사입니다.
이 땜질의 은사가 무엇인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아는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은사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 시각 장애인입니다.
그 다음에 이 은사를 나에게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좋은 은사를 주셨는데 나에게는 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은사를 주셨나?’ 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그 사람, 내가 부러워하는 그 사람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나를 보면서 하나님께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좋은 은사를 주셨는데 나에게는 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은사밖에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잘 것 없는 은사는 없습니다. 내가 욕심이 많아서 보잘 것 없이 느낄 뿐입니다.
‘저 사람에게는 왜 저렇게 많이 주셨는데 나에게는 조금 밖에 주시지 않았습니까?’ 해서도 안 됩니다.
세상에는 작은 은사를 크게 사용하는 사람이 있고 큰 은사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서로 비교하는 것은 자기를 스스로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곁눈질 하지 말고, 나에게 이런 은사를 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나에게 주신 은사를 활용해야 합니다.
은사를 활용하지 않은 사람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종과 같습니다.
주님은 이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막 25: 26)
은사를 사용하는데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합니다.
서로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봉사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10절에 “선한 청지기”라는 말이 나옵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맡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를 발견하고, 그 은사에 감사하고, 그 은사를 하나님을 위해, 서로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 은사의 선한 청지기입니다.
여러분, 은사의 선한 청지기로서 여러분의 남은 삶을, 올해의 남은 시간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십니다.

여기 교사, 속회 인도자, 그밖에 말하는 직무를 가지고 있는 분들, 11절 앞부분의 말씀을 꼭 마음에 새기셔야 합니다. 우선 목사님들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이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표준새번역성경」은 이것을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고”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할 때, 성경을 가르칠 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아니 설교할 때, 성경을 가르칠 때만 이런 것이 아니라 일상대화도 이 원칙에 따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오고 있다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기 위해 더욱 힘써야합니다.
회의를 끝내야 하는 시간이 얼마나 남지 않았는데 길게 말하는 사람, 중언부언하는 사람, 횡설수설하는 사람, 그것도 자기자랑,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어느 회의나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 정말 밉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교수가 세계적인 석학으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강의 중간까지는 느릿느릿, 농담, 잡담, 이런 것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시계를 힐끗 보고 강의 끝날 시간이 10분쯤 남았다하면 그 때  중요한 것들을 몰아서 강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할 때입니다.

여선교회 회원들, 교회의 여러 분야에서 말없이 봉사하는 분들, 사회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분들, 11절 중간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봉사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닌데 하나님이 힘 주셔서 잘 감당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도대체 저 분은 어떻게 저렇게 열심히 봉사할 수 있을까?’ 궁금하게 여기다가 ‘아,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저렇게 열심히 봉사하는구나!’ 알도록 해야 합니다.
처삼촌 무덤 벌초하듯 대강대강 봉사하면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어디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고 ‘이 사람은 여기에서 이와 같은 봉사활동을 몇 시간 했습니다.’ 하는 봉사확인서를  받아야합니다.
학생들이 이 확인서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몇 시간’ 이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을 채워야 하니까요.
봉사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런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이런 것이 형식적이 되지 않도록 잘 지도해야합니다.

그리고 이제 11절 뒷부분을 보세요.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함이니”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육체의 남은 때를 생애의 남은 부분을, 이해의 남은 3분의 1을, 정해진 임기의 남은 기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수험생들도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좋은 대학에 가려고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수능고사에서  좋은 점수가 필요합니다.’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특별히 잘 도와주어야지!’ 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며 마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십시오.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사십시오.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알고 경건과 사랑에 힘쓰십시오.
은사를 활용해서 봉사에 힘쓰십시오.

이 모든 것이 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육체의 남을 때를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 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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