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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으면 네가 보리라 (요 11: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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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하우스(Barnhouse)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담임 목사와 아내는 첫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부흥회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 담임 목사는 말합니다. “반하우스 목사님, 아이가 ‘다운증후군’ 을 가지고 태어났답니다. 다운중후군은 염색체의 문제로 정신장애가 있으며 백치나 치매와 같은 증상을 보이는 질병이랍니다. 아내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때 반하우스 목사가 말합니다. “목사님, 다 주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로마서 8장에 있는 약속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약속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가운데는 당신의 아이도 포함되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담임목사는 곧장 아내가 입원한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여보, 다운증후군에 걸린 아이가 태어난 것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축복이랍니다.” 남편의 말을 들은 아내는 한참 동안 울다가 남편이 찾아준 출애굽기 4장11절 말씀과 로마서 8장 28절을 읽었습니다. 어느 덧 아이에 대한 소문이 병원 전체에 퍼졌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에서 근무하던 전화 교환원이 우연히 사모님이 친정 어머니에게 전화하는 내용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운증후군에 걸린 아기를 태어나게 하시는 복을 베푸셨어요. 우리는 그것이 어떠한 복이 될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분명한 복이라는 것만은 확신하고 있어요.” 그녀에게서 어떠한 슬픔이나 충격 또는 실망감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일 후에, 전화 교환원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병원에 있는 간호사와 직원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무려 70여명의 병원직원이 그 교회를 찾아와 예배를 드렸고 그중 30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순종하고, 믿음으로 전진하는 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따라서 믿음의 사람은 어려움과 낙심된 일을 만나도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성에 의해, 지식에 의해, 고정관념에 의해, 감정에 의해 신앙생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과 지식이 무너질 때 크게 역사 하시며 기적을 일으켜 주십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여 주십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믿음이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믿음이 되려면,

첫째로 아는 신앙에서 믿는 신앙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앵무새는 훈련만 시키면 사람의 말을 곧잘 흉내냅니다. 그러나 앵무새가 ‘안녕하세요’ 라고 말 한다고 누구도 그 앵무새를 가리켜 인사성이 밝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앵무새는 단지 자기가 훈련한 내용을 소리내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또 앵무새는 자기가 소리내는 내용이 무슨 뜻인지도 모릅니다. 혹시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까? 예수 믿는 믿음을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교회에도 백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냥 놀고 먹는 사람들 말입니다. 교회만 다니고 예수를 알기만 하는 사람을 ‘거룩한 백수’ 라고 부릅니다. 사실 예수 믿으면 힘이 있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 용솟음치는 기쁨이 있는데, 예수를 알고만 있는 사람들은 그런 뜨거움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본문 25절을 통해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네가 아느냐’ 고 묻지 아니하시고 ‘네가 믿느냐’ 고 묻고 계십니다.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마르다의 집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미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그러자 동생 마르다는 예수님께 말합니다. 22절에 보니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이 고백은 참으로 귀한 고백인 것 같지만, 마르다는 이 고백에서 잘못을 드러내었습니다.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아나이다’ 가 잘못된 것입니다. ‘아나이다’ 는 ‘믿나이다’ 로 고쳐져야 합니다.

아는 신앙으로는 부족합니다. 믿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알기 위해 연구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불안은 점점 깊어만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는 신앙은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에게는 믿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으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아는 것에만 그치면 기적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신앙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신앙으로 바뀌어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미래적 신앙이 현재적 신앙으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의 일화입니다. 일본에 심한 가뭄이 들어 모두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찌무라 역시 아들과 함께 “하나님, 가뭄이 극심한 이 땅에 비를 내려 주십시오. 비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잠시 후 아들이 학교에 가면서 “아버지, 우산 주세요” 라고 말합니다. 이때 우찌무라는 “맑은 날에 우산은 왜 찾느냐?” 고 하자, 아들은 “그러면 조금 전 에 기도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아버지의 믿음대로 비가 내릴 줄로 믿고 우산을 가지고 가려 한거죠” 하더랍니다. 이때 우찌무라는 하나님 앞에 회개했다고 합니다. 아들은 맑은 하늘이지만 곧 비가 올 것을 믿는 현재적 신앙이었고 자신의 신앙은 미래에 비가 있으리라는 막연한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24절에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바로 조금 전에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라고 말했던 마르다 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네 오라비가 살리라’ 고 말하니 ‘이제라도’ 의 고백은 없어지고 ‘마지막 날 부활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먼 훗날에 이뤄지리라고 막연히 말합니다. 그러나 바른 신앙은 현재적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라도 하나님께서 이루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먼 훗날 그렇게 해주시겠지’ 라고 하는 것은 막연한 믿음이며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역사하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현재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 here and now-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은 절대로 역사 하시지 않습니다. 현재의 부활을 믿지 않는 신앙을 보고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물었습니다. 2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물음의 의미는 하나님은 우리들의 실제적 신앙을 요구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고 우산을 가지고 가는 것이지 썬글라스를 끼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이 현재화되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신앙가운데 역사하시며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셋째로 환경을 보던 신앙이 하나님을 보는 신앙으로 변해야 합니다

어느 날 중국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탄 배가 바람이 없어서 육지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선장은 허드슨 테일러에게 바람이 불도록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때 테일러는 말합니다. “돛을 세워야 바람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그러자 선장이 난처한 듯 대답했습니다. “남들이 조롱합니다. 바람이 불면 돛을 세우겠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와 믿음이 없는 자의 차이입니다. 테일러 선교사는 없는 바람을 있는 것처럼 생각하라는 것이었고 선장은 바람이 있어야 있는 것으로 생각하겠다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는 것은 세상 사람도 다 잘 합니다. 그러나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나에게 비록 재능과 재물은 없어도 하나님을 믿고 자신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부족함이 없이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니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가셨습니다. 무덤은 돌로 막혀져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이루시기 전에 믿음을 원하셨습니다. 그때 마르다가 34절에 말합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의 신앙은 환경을 보는 신앙이었습니다. 환경만 바라보고 말씀을 믿지 못하는 마르다에게 주님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무리들에게 돌을 옮기라 명하시고 예수께서 큰 소리로 무덤을 향해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께서 부르시자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수족을 동인 채로 걸어나오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적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환경을 보는 신앙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환경이 점점 어려워져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에 굳게 선 자에게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 주십니다. 믿음이 없으면 작은 것도 크게 생각하여 문제가 커집니다. 그러나 확고한 신앙을 가지면 큰 것도 문제가 없습니다. 육신의 눈, 불신의 눈으로 볼 때는 문제와 환경만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가 살아 나온 것과 같은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부디 바른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후로 지적으로 아는 신앙에 머물지 말고, 믿고 따르는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막연한 먼 훗날의 믿음이 되지 말고 현재에 이루어지는 분명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과 여건을 바라보다 넘어지지 말고, 그것을 극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이 되어 언제나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영광으로 기쁘게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 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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