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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웃을 판단하지 말라(고전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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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판단하지 말라

본문: 고린도전서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 칭찬이 있으리라"

어느 날 나귀가 등에 짐을 잔뜩 싣고 길을 걷다가 그만 연못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나귀는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때 연못가에 있던 개구리가 소리를 쳤습니다.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연못에 좀 빠졌다고 뭘 그리 엄살이냐! 나는 너보다 몇 십 배나 몸집이 작지만 연못에서 헤엄치고 논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개구리는 바로 우리들 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표준으로 삼고, 자신과 다른 언행을 하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데 써버립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1-12)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14:10)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은 다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입니다.(10인 10색)
세상에는 천 가지 만 가지의 직업이 있습니다. 화가나 소설가의 경우처럼 혼자서 고독하게 작업을 해야하는 직업이 있는 가 하면 교사나 목사처럼 늘 많은 사람들과 접촉해야 하는 직업도 있습니다.
또한 일반대중에게 노출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가수, 탤런트, 배우 등의 직업도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직업이든 여러 사람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직업에 종사하게 되면 그 관심도에 비례하여 행동은 그만큼 더 부자연스러워지게 됩니다. 특히 교사라든지 목사의 경우는 그 직업의 성질상 바르고 참되게 살도록 교육하고 훈계해야 하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이에 따른 인간적인 고충이 더 많게 마련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그가 가지고 있는 고충을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심방에 주력하면 설교가 서툴다고 합니다. 공부를 하면 교인 하나 하나의 시중을 들어주지 않는 다고 합니다. 목사부인이 나서서 말하면 저래서 야단이라고 합니다. 집 속에 들어앉아 있으면 목사부인이 아무 것도 안 한다고 합니다. 아이가 없다면 인정을 모른 다고 하고, 다섯이나 여섯 있으면 지나치게 많다고 불평을 합니다."
이웃을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한 사실을 소개합니다.
어느 목사 사모님이 아주 내성적이고 말이 없어서, 심방을 가면 가만히 앉아 있지말고 그 집에 대해 무엇이든지 칭찬을 해주라는 권고를 받았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집에 심방을 갔는데 참으로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어느 것도 칭찬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예쁘게 수 놓은 책상보였습니다. 그 사모님은 수를 참 잘 놓았다고 한참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그날 저녁, 그 집에서 선물이 왔는데 그 책상보를 잘 개어서 다리고 포장을 해서 보냈더랍니다. 그러자 소문이 돌기를 사모님이 얼마나 탐심이 많은지 그 가난한 집의 책상보를 빼앗아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사모님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어서 거동을 못하고 말도 잘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사모님을 고의적으로 해치고자 말한 것이 아니고 아무 생각 없이 쉽게 말한 것이지만, 이와 같이 사건의 내용을 모르는 채 얼마든지 남의 가슴을 찢어 놓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때의 상황과 형편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웃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 특별히 교회 안에서 성도들간의 대화에 조심해야 합니다.(잠20:19, 마12:36)
무고한 비방에 대한 결과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징계를 받게 된다.(민12:8-13)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 도다...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 도다"(시50:20-21) 둘째, 악을 낳게 된다.(요삼1:10) 셋째,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벧전3:16) 넷째,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다.(롬1:28-32)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기보다는 서로가 연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를 세워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은 잘못 판단하기 쉽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틀려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도 있고, 현재는 틀려 보이지만 나중에 옳은 것이 판명되기도 하고, 겉으로는 좋아 보여도 속으로 나쁠 수도 있습니다.(잠14:12) 또 내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남의 눈에 티를 빼라고 하기도 쉽습니다.(마7:1-2, 롬14:1, 벧전2:1)
이웃에 대한 험담을 잘하는 아낙네가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든 단점을 먼저 들춰내 헐뜯어 친구가 별로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집에 친정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역시 아낙네는 창가에 앉아 어머니에게 이웃집의 불결함에 대해 험담을 해댔습니다. "저기 봐요, 옆집 빨래 줄에 널린 옷들이 너무 더러워요. 세탁을 엉터리로 했나봐요"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 자세히 보렴. 이웃집 빨래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너희 집 유리창이 더러운 거야"
색안경을 끼고 보면 상대방이 그 색깔대로 보입니다. 또한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만큼 자기도 비판을 받게 되고 남에게 너그러우면 자기도 너그러운 판단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 많이 아는 사람은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남을 가리키면 세 개는 나를 지적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귀가 길고 혀가 짧습니다.
사람은 흔히 어느 한 면만을 보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페르시아에 네 아들을 둔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은 아들들을 불러놓고 한 가지 명령을 했습니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첫째 아들은 겨울, 둘째는 봄, 셋째는, 여름, 넷째는 가을에 정원 뒤편의 망고나무를 관찰하라. 다른 계절에 망고나무를 보아서는 안 된다."
네 명의 아들은 왕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다. 1년 후 왕은 네 아들을 불러놓고 물었다. "자, 이제부터 너희가 본 망고나무를 내게 설명해다오." 네 아들의 대답은 각양 각색이었다. "불에 타고 남은 폐허 같습니다. 잎이 푸르고 싱그럽습니다. 꽃은 장미처럼 아름답습니다. 주렁주렁 열린 열매가 탐스럽습니다, 왕은 네 아들의 손을 잡고 교훈을 주었다.
"너희들의 대답은 모두 옳다. 망고나무는 계절마다 각각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한 가지 모습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선 안 된다. 이것이 너희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성급한 결론은 편견을 낳습니다. 노아가 술 취한 적이 있다고 술주정뱅이라고 보면 안됩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했다고 그를 색마로 보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했다고 비겁한 인간으로만 보면 안됩니다.
우리가 보기에 안 좋은 사람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판단은 모두가 나름대로의 편견과 선입견이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 17절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판단과 정죄의 세계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생각에 푹 젖어있는 모습을 봅니다. 선악과의 정체, 즉 인간의 죄성이 바로 이 선악과라는 사실입니다. 부부갈등, 고부갈등, 노사갈등, 여야 갈등 등 모든 갈등의 핵심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선악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3자를 험담해도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로 보지말고, 또 누가 나를 험담해도 마음 아프게 생각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성경 야고보서 2장 1- 9절까지 함께 읽어봅시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 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오래 전에 우리 나라에서도 상영이 되었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파란 만장한 삶을 살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실제 인물 토마스 로렌스의 일대기입니다. 그는 영국의 탐험가요 고고학자요, 군인이었는데, 이미 아는 대로 로렌스는 육군 장교로서의 복무를 그만두고 영국 공군에서 항공기 정비병이 되었습니다. 가끔 그는 토마스 하디의 집에 가서 그들 부부와 함께 차를 마셨습니다. 어느 날 오후 그는 토마스 하디의 집에서 돌체스터 시장의 부인과 한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시장 부인은 모욕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시장 부인은 하디 부인에게 "나는 일생동안 졸병과 함께 앉아서 차를 마신 적이 없다"고 프랑스어로 말하였습니다. 이 부인은 이 공군 정비병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깊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드디어 로렌스는 예의 바르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마담, 죄송합니다만, 하디 부인은 프랑스어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제가 통역을 해드릴까요?" 이 말을 듣고 시장 부인은 기절할 듯이 놀라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비록 외모와 실제가 다 같이 보잘 것 없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결코 그런 자세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외모뿐 아니라 소문이 다른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비록 보잘것없이 보여도 한 인격으로 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과부의 엽전 한 잎을 부자의 두 랩돈보다 더 크게 보셨습니다. 왜냐하면 과부의 엽전 한 잎은 생활비 전부를 낸 것이고 부자의 두 렙돈은 생활비 일부를 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점심도 굶고, 차비도 아끼려고 수 십리 길을 걸어서 그 돈으로 헌금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 돈은 우리가 보기에는 작은 액수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부자의 수 백만 원의 헌금보다도 더 크게 보실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잡지에 이런 기사가 난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명한 이스라엘의 여 수상이었던 골다 메이어의 수기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하도 못생겨서 사람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다. 심지어는 부모도 나를 시원치 않게 여겼다. 그래서 에라, 공부나 해야겠다 하고 열심히 했더니 결국은 오늘에 정치가가 되었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얼굴이 못생겼고, 눈도 작은 데다가 키도 작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가 칼뱅도 빼빼 마른 몸에, 눈이 나쁘고 신경질적인 사람이었으며, 미국의 링컨 대통령도 몸과 얼굴이 깡마르고 다리는 유달리 길어서 고릴라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인물 사도 바울도 키는 작고, 시력도 좋지 않은 보잘것없는 외모를 지닌 분이었다고 합니다.
백범 김구선생은 과거에 낙방한 후 인생의 다른 길을 찾다가 부친으로부터 "네가 큰 일을 하려면 사람 보는 법부터 배우라"는 말을 듣고 열심히 관상학을 공부하다가 자신의 외모를 살펴본 후 크게 실망했습니다. 생긴 대로 운명이 결정된다면 자신의 앞날은 꽉 막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구가 외모에 집착하지 않고 다시 공부, 민족지도자가 된 것은 다음 글을 읽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얼굴 모양이 잘 생긴 것은 몸이 건강한 것만 못하고 몸이 건강한 것은 마음이 바른 것만 못하다."
하나님은 사람을 결코 외모로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롬2:11, 골3:25) 사울이 불순종으로 하나님께서 버리심으로 이스라엘 왕을 다시 세우기 위해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갔을 때, 이새의 맏아들 엘리압을 보고 그를 택해 기름 부으려 하자 하나님께서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사람은 그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그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하시고 다른 아들들도 다 물리치고 막내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또 뽕나무 위에 기어올라간 난쟁이 세리장 삭개오의 중심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로 하셨습니다. 이렇듯 주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습니다.(갈28:6, 엡6:9)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여 차별대우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외모라고 하는 것은 비단 용모뿐만이 아니라, 돈 있는 것, 똑똑한 것, 능력 있게 보이는 것, 사회적 지위 등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이러한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중심 곧 진실한 믿음과 충성됨 그리고 정직성을 보시고 귀히 쓰는 일꾼으로 삼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는 성도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3:4)
또한 신명기 말씀에는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고..."(신1:17), "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신16:19)하였습니다. 일본 에도시대(1598-1867)에 이타쿠라 시게무네란 명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외부의 압력이나 유혹에 굴하지 않고 바른 양심에 서서 공정한 판결을 내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한 사람으로부터 "선생님이 그렇게 공정한 재판을 내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사람의 외모나 얼굴을 보지 않고 판결합니다. 사람에 대한 인상은 잘못하면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내 눈에 좋게 보인다고 다 선인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시게무네는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의 얼굴만 봐도 판결을 할 수 있다는데 전 아직 그 경지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이며 독선입니까?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속 사람 일 것입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터지기 몇 해전, 오하이오주의 큰 농장에 한 초라한 소년이 찾아와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주인은 일손이 모자랄 때라 소년을 채용했습니다. 그런데 3년 뒤 이 "머슴"이 자기 딸과 사귀는 것을 알고 내 쫓았습니다. 그로부터 30년 뒤 주인은 낡은 창고를 수리하다 그 소년의 짐을 발견하고 내용물을 살피던 중 소년의 이름이 제임스 A 가필드라는 것과 현직 20대 미합중국 대통령과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농장 주인은 대통령 사위를 맞을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풍조라 하겠지만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학벌과 재력, 집안 배경은 늘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결혼 상대를 고를 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만 좋으면 하겠다고 하다가도 막상 자신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면 어느 경우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거나 더 까다로운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조건을 다 원하고 그 위에 믿음까지 좋은 짝을 구하니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없지만 조건에도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선택에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의 뜻에 우선 순위를 두고,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 종류의 판단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었습니다.
첫째로, 사람에게서 받는 판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 바울의 말처럼 매우 작은 일입니다. 신경 쓸 필요조차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에 너무 신경을 쓰다보면 소신이 없고 줏대 없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판단이 있습니다. 양심의 판단입니다. 물론 첫 번째 판단보다는 솔직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양심의 판단도 잘못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양심의 판단에만 신경 쓰다 보면 독선적이고 자기 고집만 내세우는 사람이 되기가 쉽습니다.
세 번째 판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판단입니다. "주께서 나를 어떻게 판단하실까?" 우리가 늘 이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길는지 짧을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과 직분에 충성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잘했다고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성경 한 구절 함께 봉독하고 마치겠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7:24)
* 기도: 심판의 주가 되신 하나님 아버지, 드러난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했던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잘못된 편견과 선입견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판단함으로 주님의 영광을 가리운 적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이웃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고, 협력하며, 서로 나누며 살게 하옵소서. 이 세상에서의 남은 생애가 거짓되지 않은 삶의 모습이 되게 인도하옵소서. 오직 한 분, 주님만이 우리의 기쁨과 소망과 생명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말은 너무 많이 하고 행동은 너무 적게 하는 것을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성령의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 채워 주옵소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등대교회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가 날로 성장하게 하시고 우리 담임목사님께 성령충만함을 더하사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게 하시고 영육 간에 더욱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01년 4월22일 저녁 예배시 한 태 완 목사 설교 요약

* 2부: 분반(구역)공부 자료

1. 말씀: 잘못 던진 돌

얼마 전 어느 방송에 40대 여인이 체험담을 써 보낸 분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의 한 사건을 글로 써 보내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같은 반 학생 중에 부자집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가 돈 1000원을 잃어버린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때 담임 선생님이 의심나는 학생 이름을 적어내라고 해서 모두 이름을 적어내게 되었는데 50명의 학생 중에 47명이 그 반에서 공부를 가장 못하는 꼴찌여학생을 적어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학생은 선생님으로부터 추궁을 받게 되었고 친구들도 그의 짓으로 확신하는 분위가 되었다. 그 여학생은 그 다음 날부터 학교를 나오질 않았다. 그 이후의 진행된 일들은 모르지만 결국 그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이사를 갔기 때문에 소식을 아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이 글을 보낸 분이 6, 7년이 지난 어느 날 시외버스를 타고 가는데 그 차의 안내양이 바로 그 꼴찌 친구임을 알았을 때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했다. 그 친구가 다가와서 이런 저런 동창들의 소식을 물으면서 "그 때 내가 돈 안 훔쳤어!"라고 했다고 한다. 차비를 주려니까 "내 얘기를 들어줘서 고마웠어!"하면서 차비를 기어이 안 받았다고 했다. 이 사건을 써 보낸 분도 그 당시 그 학생을 지목해서 죄인으로 몰았던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영어사전 하나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정황을 생각하니 의심이 가는 학생이 있어 마음으로 그를 지목하고 그를 전적으로 의심한 적이 있었다. 그 것이 발단이 되어 우리 반이 좀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위의 사건으로 볼 때 결국 내가 가졌던 그 마음의 판단도 충분히 그릇된 판단일 수 있는 것이다. 잘못 던진 돌이 엉뚱한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고 그를 정죄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경우가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판결은 우리를 당황케 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 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고 하셨을 때 이 말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한 사람씩 모두 자리를 떴다. 우리의 눈에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함께 모인 군중들의 주장이 옳고 마땅히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죽임을 당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판단은 종교 지도자들이요 경건하고 율법을 잘 지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오히려 더 큰 책망의 대상으로 규정을 지어 버렸다. 그들의 양심은 자신들이 전혀 그 여인을 정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했던 것이다. 우리가 잘못 던진 돌이 그 누구를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판단은 오히려 우리를 책망하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2. 묵상 및 토의
0 나는 군중에게 휩싸여 이성을 잃은 적은 없는가?
0 나는 함부로 남을 악평하지 않는가?
0 나는 주변의 일들과 사람에 대해 내 중심으로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0 나는 내 허물보다 남의 허물을 찾기에 급급해 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0 나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역자를 함부로 판단하며 그들의 부족함을 헐뜯고 있진 않습니까?
0 나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진 않습니까? 나 자신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쓰시기에 아름다운 그릇입니까?
0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이나 앞으로의 나의 결심, 각오, 다짐 등을 이야기 해보세요

3. 예화(1): 비판하지 말라

미국 영화감독 존 휴스턴의 일화이다. 휴스턴은 자녀들에게 친구들을 섣불리 판단하지 말 것을 당부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에 딸 안젤리카가 식탁에서 “난 반 고흐의 그림은 질색이에요,아빠!”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휴스턴이 말했다.
“고흐의 그림이 싫다고? 그럼 네가 알고 있는 반 고흐의 그림을 몇 점이나 가지고 있고 왜 싫은지 이유를 말해보거라” 딸이 우물쭈물할 때 휴스턴은 “상대방을 자세히 모르면서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우리 주님도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탈무드는 “남을 비방하는 것은 살인보다도 위험한 일이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지만 비방은 세 사람을 죽인다. 비방하는 사람 자신,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그리고 화제가 되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내가 남을 비판하면 나에게는 열 배, 스무 배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 예화(2) :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노상강도의 이야기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란 이름은 ‘늘리는 자’란 뜻입니다. 그는 앗티카라는 지방에 살면서 자기 영지를 지나가는 나그네를 잡아 쇠 침대 위에 누이고 결박했습니다. 그래서 여행자의 키가 침대보다 짧으면 몸을 잡아 늘여 침대 길이에 맞추고, 반대로 길이가 침대보다 길면 긴만큼 잘라버려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테세우스라는 영웅이 이 프로크루스테스를 잡아 그가 여행자들에게 했던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라는 말은 융통성이 없다는 뜻의 관용구가 되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 마음속의 자를 가지고 남을 제멋대로 판단해서 내 마음에 안 맞으면 함부로 평가하는 사람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요? 내 판단과 평가를 받는 사람은 몸이 제멋대로 늘려지거나 잘리게 됩니다. 상처를 입고 죽게 된다는 말입니다. 혹시 우리들이 가진 자가, 우리의 판단이 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이 남을 제멋대로 판단하고 상처 주고 죽이는 역할을 하지는 않을까요?

* 예화(3): 함부로 판단하는 잘못

어느 대학의 졸업식장에서 학생들이 차례로 졸업장을 받고 있었다. 순서가 진행되는 것을 바라보던 한 축하객에게 눈에 띄는 장면이 있었다. 어느 학생이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한 손으로 졸업장을 받고는 총장과 악수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혀를 찼다.
“참 세상도 많이 변했군. 저렇게 건방진 학생도 있으니. 이 학교는 4년동안 무얼 가르쳤단 말인가?”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재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그게 아닙니다. 저 분은 사고로 한 팔을 잃고 대신 의수를 하고서 4년동안 훌륭하게 학교를 다닌 학생입니다”
그러자 축하객은 얼굴을 붉히며 함부로 말한 것을 부끄러워했다. 우리는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우리의 판단은 빗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만 우리 인생을 공평하게 판단하신다.

4. 찬송:(420장)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1. 나 자주 넘어집니다 오 주여 나 자주 실패합니다 오 주여
2. 나 슬픈 일 당합니다 오 주여 나 심히 괴롭습니다 오 주여
3. 저 마귀 유혹합니다 오 주여 나 승리하게 합소서 오 주여

[후렴]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 주랴 영광 할렐루야

5.: 금언
0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 알았느냐?(눅19:22)
0 시금석은 금을 시험하되 금에 의해 시험되지 않는 것처럼 올바른 판단의 기준을 가진 사람은 남에 의해 판단되지 않는다. (에픽테투스)
0 판단을 하는데 있어서 마음에 편견을 두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모든 말이나 행동이 잘못된 자로 재어지게 될 것이다. 마치 횡달에 걸린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노랗게 보이는 것처럼. (필립 시드니 경)
0 사람은 얼굴, 습관, 외모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특성, 대화, 행위에 의해 판단된다. 다른 사람의 말보다는 그 사람의 행위에 의해 칭찬하는 것이 낫다. (로저 레스트렌져 경)
0 당신 스스로를 성실하게 판단하라, 그러면 다른 사람들을 관용을 갖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죤 메이슨)
0 판단은 경험에 의해 강요된다.(사무엘 죤슨)
0 판단은 저울과 같고, 증거는 저울추와 같다. 그러나 균형은 의도하는 바에 따라 달라지므로 많은 경우 아주 조금만 움직여도 가벼운 것을 무겁게 보이도록 하는데 충분하다. (리챠드 위틀리)
0 우리는 본대로 판단하게 된다.그러나 두 사람의 판단이 똑같은 경우는 없으며 각자 자기의 판단을 믿는다. (알렉산더 포프)
0 실제의 것을 바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드물며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내린 성급한 판단을 누가 맞게 고쳐줄 것인가? (로버트 사우티)
0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느낌에 의해 우리 자신을 판단하나,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해놓은 것에 의해 판단한다.(헨리 웨이즈워드 롱펠로우)
0 사람의 판단은 그의 큰 재산의 일부분이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특징을 반영한 것이다.(윌리엄 셰익스피어)
0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 대해 보다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은 널리 인정된 격언이다.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여 경험을 통한 확인도 필요치 않다(주니어스)
0 모든 사람이 자기의 기억력이 나쁜 것에 대해 불평을 하나, 아무도 판단력이 나쁜 것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는다. (둑 드 라 프랑수아 로슈푸코)
0 현명한 사람은 일에 대한 진지함으로 판단되고, 성질이 급한 사람은 압박에 대한 감수성으로 판단되며, 고매한 사람은 가치 없는 권력의 남욕에 대한 경멸과 분개로 판단된다. (에드먼드 버크)
0 이웃을 볼 때는 고양이 같이 날카로운 눈으로, 자기를 볼 때는 두더지 같이 먼 눈으로 본다. (쟝 드 라 퐁테느)
0 지식은 머리에 있고, 지혜는 마음에 있다. 옳지 않다고 느껴지면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윌리엄 해즐리트)
0 우리는 그 사람 자체보다는 우리와의 관계에 의해 판단한다.(스베친 부인)
0 어리석은 사람은 행동을 한 후에 그 결과를 가지고 평가하고, 현명한 사람은 행복을 하기 전에 미리 이성과 공정성을 가지고 그것을 평가한다. 전자는 행동을 판단하기 위해 결과를 주의를 기울인다. 나는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싶다.(리챠드 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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