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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사람들 (마 20: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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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소경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시각 장애인이라 부른다. 앞을 보지 못하는 불편은 그 입장이 되어 보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안요한 목사님은 목사의 아들이었으나 하나님을 부인했던 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편 생활을 하던 중 시력이 약화되어 실명하게 되었고 그 사건을 계기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 특수 목회사역을 하시는 분이다. 그 분은 이미 60세가 넘으신 노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는 더벅머리 총각처럼 하고 다니신다. 그 모습이 못 마땅해서 어느 목사님이 안목사님에게 물었다.
-목사님은 왜 머리를 그렇게 기르고 다니십니까?
-제가 이마에 흉터가 많습니다. 하두 많이 부딪혀서 부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머리를 길러라.” 그 후로 머리를 기르니까 흉터가 보이지 않고 부딪쳐도 덜 아프고 젊게 보여서 참 좋습니다.

속사정을 모르면 이렇게 상대방을 오해하고 부정적으로 판단할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은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인 보호가 강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2000년 전 유대사회에서 소경은 죄인 취급을 당했다. 본인의 죄나 부모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설움을 안고 살 수 밖에 없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소경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유대사회의 중심에 들어 올 수 없는 사람들이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이 두사람은 마을 어귀에 사람들을 피하여 처량하게 앉아 있었다. 배가 고파서 이 집 저 집 다니며 구걸하다가 피곤해서 길 가에 나란히 앉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것이었다. 그 소문을 듣는 순간 그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두 소경이 이렇게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들이 예수에 대하여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각을 잃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발달하는 것이 청각과 촉각과 기억력이다.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그 사람의 성격과 얼굴 모습을 연상해 낼 정도로 예민하다. 그리고 점자로 책을 읽는 속도도 대단히 빠르다.

그들은 구걸하러 다니면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예수란 분이 많은 병자들을 고쳤다는 사실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선지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소문을 듣고 난 후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이 날도 두 사람은 자포자기한 상태로 길 가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앉아 있던 그 길 앞으로 지나가고 계셨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 싸면서 따라 가고 있었다.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러 댔는지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꾸짖었다. “조용히 해, 이 거지들아. 소경 주제에 감히 예수님을 불러?!”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두 번만 외쳤을까요? 그들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댔을 것이다. 그 고함소리가 예수님의 귀에 들렸다.

예수님께서 가던 길을 멈춰 서셨다. 그리고 그 소경들을 부르셨다.
“저들을 이리로 데려오라.”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두 소경이 예수님 앞에 와서 섰다. 온 회중이 조용히 그 광경을 목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윽고 예수께서 두 사람을 바라보시며 물으셨다.
“너희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들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주여 우리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두 사람의 눈을 손으로 만지셨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밝은 세상을 보게 되었다. 할렐루야! 그리고 그 두 사람도 많은 무리들 가운데 섞여 예수님을 따라 갔다.
이 두 사람이 광명한 세상을 보던 그 날은 일생 일대의 최고의 날,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평생 예수님을 증거하는 충실한 제자들이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내용은 이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난관을 극복하는 지혜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면에서 주목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는 그들은 어떻게 보게 되었는가? - 두 소경의 행동에 주목
마20:29-31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1)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다. 단지 예수님에 대하여 소문으로 들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자신들의 장애를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던 것이다. 믿은 정도가 아니라 확신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믿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셨다한들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이 두려워 사람을 피하고 장님된 신세가 팔자거니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난 후 그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그 분을 만난다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갖게 된 것이다.

보통 말하기를 모든 사람에게는 평생에 3번 정도 성공의 기회가 온다고 한다.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부정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회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 온다.
이 두 소경은 그 기회를 찾고 있었다. 예수님을 만날 소망을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여러 가지 장애물들이 놓여 있었지만 그들에게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즉시 반응했다.

2)간절한 부르짖음.
두 소경의 부르짖음은 기도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부르짖음에는 간절함이 약화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왜 그런가? 자신을 불쌍히 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을 만큼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절함이 없고 응답을 경험하지 못한다.

본문 29절에 보면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고 되어 있다. 그 무리들 중에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따르는 무리에 불과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의 소원은 있었으나 입 밖으로 내질 못했고, 어떤 사람은 소리를 쳤으나 군중들의 소음에 섞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소경의 부르짖음은 한 맺힌 부르짖음이었다. 소리가 크다고 다 응답되는 것은 아니다. 간절함이 없는 부르짖음에는 응답이 없다. 왜냐하면 안들어 주셔도 나는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다는 베짱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들어 주실려면 들어 주시고 말려면 말라는 식의 기도가 많다.
그러나 소경들의 부르짖음은 예수님의 귀를 파고 드는 부르짖음이었다. 효과 있는 기도에는 반드시 간절함이 있다.


3)장애물을 극복하는 용기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시각 장애인들의 모습을 보면 항상 움츠린 자세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긴 습관이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세상에서 제일 겁 없는 사람들이 시각 장애인이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소경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서 겁 없이 행동한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비참함을 알았고 예수님께 대한 기대가 강했기 때문에 나타난 모습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들이 간절하게 부르짖기를 시작했을 때 즉시 장애물이 나타났다.
31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러나 그냥 주저 앉지 않았다. 그들은 더욱 소리를 질러댔다. 욕 먹으리라. 얻어 맞으리라. 그런 각오로 부르짖었다. 그 소리를 예수님께서 들으셨고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우리는 때때로 기도해야 할 필요를 느끼면서도 주변의 여러 가지 사사로운 장애물들로 인해 기도하는 일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사단은 성도들이 기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일을 한다. 사단의 책략을 알고 환경을 극복하는 용기와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세력은 항상 크고 강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을 넘어뜨렸고,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의 박해를 무너뜨렸다.


4)가장 중요한 것을 구했다.
마20:32-33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이 두 사람이 원하는 것은 떡도 아니요, 돈도 아니요, 집도 아니었다. 이 두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은 “보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 필요한 것을 구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응답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약4:2-3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어떤 사람은 보다 더 나은 직장을 구하고, 배우자를 구하고, 더 좋은 집과 환경을 구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를 구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탄식하고 불평하고 원망한다. 자신이 현재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것이 이 소경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나은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내가 지금 볼 수 없는 입장이라면 내게 많은 돈과 지위와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볼 수만 있다면 수 억의 재산을 들여서라도 얻고자 할 것이다. 진정 불행한 것은 보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정 보아야 할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요. 더욱 불행한 것은 주님을 보면서도 정말 구해야 할 것을 구하지 않고 썩어질 것을 구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정말 필요한 것, 정말 중요한 것, 정말 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부르짖어 얻을 수 있는 성도가 되기 바란다.


두 번째 주목해야 할 것은 소경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다.
마20:32-34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이 구절을 잘 살펴 보면 다섯 개의 동사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서서(stopped)
가던 길을 멈추셨다. 예수께서 서신 이유는 들으셨기 때문이다. 소란한 중에서도 양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선한 목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의 모습은 정반대다. 예수님이 부르셔도 바쁘다고 다 도망다닌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심으로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가던 길도 멈추시는 분이시다.

2)부르셨다(called)
부르신 이유는 만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경들은 예수님께 소리만 질렀지 나올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눈이 성한 사람들이라면 달려와서 군중들 사이을 뚫고 예수님을 붙잡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과 만나시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리고 그들을 부르셨다.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만나시겠다고 부르시는 그 음성을 외면하지 말자.

3)물으셨다(asked)
“너희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우리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묻고 계신다. “내가 너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4)민망히 여기심(had compassioned)
두 소경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길은 사랑이셨다.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온 몸에 상처 투성이로 빌어 먹으며 살아온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셨다. 아무런 말씀은 없으셨지만 그의 눈빛은 깊은 애정과 긍휼이 담긴 것이었다.

5)만져주심(touched)
부드럽고 따스한 사랑의 손길이 두 소경의 눈에 닿았다. 그 순간 어두움은 사라지고 광명한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소경이 아니었다. 주님의 사랑이 손길이 닿은 곳에 치유의 역사가 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그의 백성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신다. 우리가 부르짖을 때 가던 길을 멈추시고, 우리를 부르셔서 만나 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물으시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어루 만져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계3:15-18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참으로 곤고한 가운데 놓여 있음에도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하는 영적 소경의 모습은 아닌가? 더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 같지는 않은가? 주님께서 토하여 내치시겠다고 경고하셨다. 영적 나태 태만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렘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적당한 기도생활이 아니라 장애물을 극복하고 부르짖는 두 소경의 열정적인 기도를 회복할 수 있는 성도가 되기 바란다. (원 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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