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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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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까지 많은 비가 오더니 갑자기 선선해진 느낌을 가집니다. 늦은 저녁이나 새벽녘에는 창문을 닫아야 잠을 잘 수 있다고 느껴집니다. 누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아도 서서히 여름이 기울어져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자연은 섭리를 따라 움직여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정확히 수행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것이 재미없어 딴 길로 가다 요나처럼 먼 길을 휘돌아 마침내 힘이 쇠진하고 돌아올 뿐입니다. 우리가 불쌍한 헌신을 하지 않고 좀더 하나님 앞에 힘과 능력이 있을 때 헌신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를 한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가엾겠습니까? 후회없이 헌신하고 후련하게 간다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마음에 기쁨으로 주님의 나라에 입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기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절박한 심정 가운데서 주님을 찾아 은혜를 입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것이 좋을 때에 주님의 은혜가 그것보다 더 좋아 주님의 은혜를 알고 감격하고 감사해 주님의 은혜에 나를 맡긴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손치더라도 비록 어려움 속에서라도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혜 속에 주의 역사를 이루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지경 속에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믿음을 강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 21절 이하를 보게 되면 혈루병 걸린 여인의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이 여인은 열 두해나 혈루병으로 말미암아 고생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없는 힘을 내어 기를 쓰고 사람들을 헤치고 예수님의 옷깃을 만져 마침내 병을 낫게 됩니다.
오늘 성경을 보게 되면 이 여인처럼 그 마음에 갖은 수모와 어려움 속에 그 어려움의 첩첩을 헤치고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한 여인의 모습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그의 딸이 귀신이 들려서 도무지 견딜 수 없어 고통스러워 괴로워하는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의 자비로 그 딸의 귀신을 쫓아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간청하지만 주님은 본 척도 않으시고 오히려 제자들이 그것이 안타까워서 예수님 어떻게 저 여인을 보냅시다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오히려 나는 이스라엘의 집 잃어버린 양들을 위하여 왔다라고 거절하십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여인이 ‘어떻게든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시기를 ‘자녀들에게 줄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방여인인 이 가나안 여인을 마치 개와 같은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수모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그것을 수모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나에게 부스러기만한 은혜를 주셔도 나는 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는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마침내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 시로 그 딸이 낫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내용입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는 말씀을 오늘 제목으로 정하였습니다. 이 내용을 가지고 우리는 과연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오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먼저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우리는 살다보면 주님께 나오지 않으면 안될 가장 처참한 지경에 처한 우리 인생의 어려운 곤고한 때를 만날 때가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곤고한 때에 우리는 주님 앞에 나오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주님 앞에 가면 병이 낫고 귀신도 쫓아낼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 한 가지 가지고 오늘 이 여인은 나온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 여인처럼 주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도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주님을 만나러 나왔다가 오히려 말씀과 은혜를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믿음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이 뭐라 말할지 전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이지만 주님을 만남으로 그 마음이 주님께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더욱이 내 자신에 대한 확신이 서지 못하기에 우리는 주님 앞에 나가기가 주저하게 됩니다.

오늘 22절을 보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질시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도 예수님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질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도 예수님이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지움이 마땅치 않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아 정말 개같은 취급을 받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생각할 때 주님 앞에 부끄러워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부끄러워 나아갈 수 없을 때 주님 앞에 나아가야만 합니다.
우리가 보통 주님 앞에 꼭 나가야 될 때가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주님 앞에 도무지 못나가겠다고 생각할 때, 두 번째 사람 앞에 너무 창피해서 사람 앞에 설 수 없을 때, 세 번째 내가 내 자신을 보니 내 자신이 너무 한탄스럽고 너무 창피해서 너무 초라해서 도저히 내 자신도 나를 용납할 수 없을 때 바로 그때가 주님 앞에 우리가 나아가야 될 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고 사람 앞에 나가지 못하고 내 자신도 나를 용납할 수 없을 때 그 때 바로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실 때요,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가 주님을 만나 주님의 은혜를 입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주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확신이 서지 못해 주님께 나가지도 못하며 때로는 삶의 상황이 우리를 잡아당긴다는 것입니다.

22절을 보니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이 들렸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취급도 못 받는 이와 같은 사람에게 가뜩이나 딸이 귀신이 들렸는데 그 귀신들린 딸을 어떻게 좀 고쳐달라고 주님 앞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도저히 사람으로 생각할 때 나오기가 창피한 이와 같은 지경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나왔을 때 이와 같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주님 앞에 나왔을 때 우리는 주님 앞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주님 앞에 나왔으니 주님이 어떻게 해결해 주시겠다라고 기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 우리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오히려 아픔 가슴을 더욱더 쓰라리게 부벼대는 이와 같은 실망만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바로 이때가 믿음의 은혜를 달아보는 순간이요, 넘어가야할 고비의 때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큰 기대를 가지고 세 번이나 결정적인 실망의 산을 넘어 왔습니다. 예수님은 한 말씀도 안하십니다. 그러다가 말씀하시는 것이 ‘나는 이스라엘의 길 잃어버린 양들을 위해서 왔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좀 어떻게 해주십시오’ 그랬더니 뭐라고 결정적으로 말씀하시지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움이 마땅하지 않다’ 세 번이나 결정적으로 이 여인의 마음은 큰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소경거지 바디매오가 마가복음 10장 46절, 47절에서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길목을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는 기색을 느꼈습니다. ‘다윗의 자손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소리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을 볼 수 없기에 예수님의 지나가는 기색을 듣고 그는 소리를 질러 예수님 앞에 자비를 구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리라.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기색이 없이 본척만척 지나가셨습니다.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소경거지 바디매오는 또 다시 외칩니다.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의 삶 속에는 큰 기대를 가지고 어려움의 고비를 넘어 주님 앞에 나왔지만 아무런 마음의 기대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입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가 겪는 그와 같은 마음의 갈등의 산이 우리가 넘어야할 믿음의 은혜를 체험할 마지막 고비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달아보시고 그 고비를 넘기시게 함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체험할 그릇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수욕을 넘어서서 주어지는 주님의 자비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5장 17절 이하를 보면 중풍병 환자를 친구 네 명이 메고 옵니다. 예수님 주변의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그 병이 나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갈 수가 없어요. ‘친구야 미안하다’라고 하지 않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구멍을 뚫어 그 지붕 아래로 침상을 달아내려 예수님 앞에 도착해 친구의 중풍병을 낫게 합니다. 여러분 그냥 사람들 메고 와서 그냥 예수님 앞에 낫게 하는 것과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갈 수 없어서 지붕위에 올라가서 그 지붕을 뜯을 때 그 열심의 상태를 생각해 보세요. 이 친구들의 마음에는 정말 뜨거운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믿음의 은혜를 체험할 뜨거운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냥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믿음까지 먼저 형성해 주시고 그 믿음의 근거에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한번에 해결이 아니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는 개와 같다는 수욕을 느끼는 순간 이 여인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저는 오늘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너는 개와 같다.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움이 마땅치 않다라는 말씀은 너는 개와 같다는 것이지요. 이 여인은 귀를 닫고 ‘나는 몰라 나는 귀도 닫고 마음도 닫고 나는 아무것도 안 들려 예수님 뭐라 그래도 좋아 나는 오로지 내 딸만 고치면 돼. 나는 아무소리라도 괜찮아. 내 딸 고치는 것만이 목적이야’ 라고 생각하고 이 여인은 일사각오로 주님 앞에 나아갔을까?
저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여인의 불사각오의 의지를 칭찬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칭찬하셨어요. 그러니까 이 여인은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던지 나는 상관없습니다. 예수님 나는 상관이 없어요. 나는 내 딸만 고치면 되요. 뭐라고 욕해도 상관 없어요’ 이런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 구조를 살펴 볼 때 예수님은 너는 개와 같다라고 말씀하실 때 이 여인은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 나는 개와 같은 사람이야. 내 자존심 나는 자존심이랄 것도 없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게 맞는 거야. 예수님이 나를 개와 같은 존재라고 하면 나는 정말 개와 같은 존재야. 정말 내가 못 깨달았을 뿐이지. 나는 내가 개와 같다는 것을 깨닫고 정말 내가 어떻게 변화되어야지’라고 생각하며 정말 예수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게 그 여인의 믿음이고 칭찬받을 만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을 고깝게 생각하고 참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소화하고 그것을 통해서 그 자신의 믿음을 세웠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 두 종류 있지요. 한가지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난처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난처하게 만드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의 인격과 한계와 부족을 나타내는 것뿐입니다. 그런 말과 행동하고 싶은 순간 주님을 붙잡고 바둥대며 ‘주님 이 사단의 올무에서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정말 그 순간을 넘겨야 되는데 그것을 못 넘기고 그저 비난하고 욕하고 난처하게 만들어요. 또 한가지는 다른 사람을 비난할 때 그것을 받아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나를 비난해 너도 한번 당해봐라 하고 자기를 변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색해도 그냥 침묵하면 됩니다. 침묵하면 어색하겠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받아치는 어리석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에게 올무를 거는 사람을 절대 받아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올무를 거는 사람에게 본질의 문제를 가지고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얘기하냐 하면 이 여인이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끌려왔습니다. ‘예수님 이 여인을 돌로 쳐서 죽일까요? 아니면 살릴까요? 모세의 법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 왔으니 돌로 쳐서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랑을 말씀하셨거든요. 그러니까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면 예수님은 사랑을 말하고 용서하지 않으니 예수님의 가르침은 헛일입니다. 또 만약에 그냥 살려두려고 하면 당신은 모세의 법을 어깁니다.’ 이것은 이 여인에 관하여 문제의 답을 물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려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만들려고 묻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정확하게 무엇이어야 합니까?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나를 시험하고 나를 올무에 빠뜨리려고 하는구나 저주가 있을 지어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셔야 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본질로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게 뭐지요? 땅바닥에 쓰셔서 ‘죄가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들은 그 말에 다 가슴이 찔렸어요. 누가 죄가 없겠습니까? 하나둘 슬금슬금 다 도망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지요. ‘나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라’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분노에 대해서 분노로 답하지 않고 본질의 문제로 답하셨습니다. 세금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뭐라고 얘기하셨지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그것도 역시 똑같이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게 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똑같이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한다는 일은 늘 나를 이렇게 시험에 빠뜨리고 나를 얽어 나를 넘겨뜨리려고 하는구나 너희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셔야 되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본질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은 언제든지 해결하셨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비난해요. 우리에게 대해서 여러 가지 공격합니다. 마음이 상해요. 본질이 무엇입니까? 내 믿음이 아직 성숙되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그런 말을 들어도 내 마음에 아직까지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내 믿음을 키워야지 이게 본질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받아치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을 같이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나 자신을 더욱더 깊이 생각하여 믿음의 세계로 더욱더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본질이 아니겠습니까? 가끔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듯 전혀 얼토당토않게 이러저러한 난감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비난과 창피를 느낄 때가 있지요.
우리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어려움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어려움에 빠졌다면 정직함으로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지혜로움입니다. 정직이 최선의 방책입니다. 여러분의 신분을 모르는 곳에서 오히려 난감한 지경을 당할 때가 있지요. 오히려 떳떳하게 여러분의 신분을 밝히고 ‘죄송합니다. 제가 누구입니다. 정말 제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라고 정중하게 사과할 때 여러분은 그 어려움에서 더욱더 빠져나오기가 용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고 오히려 자기를 은폐하고 가리우려 한다면 오히려 더 큰 어려움에 빠질 뿐입니다.

오늘 이 여인은 자신의 모습을 예수님이 다 알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개와 같은 사람이야’ ‘나는 주님 앞에 핑계할 필요도 없고 주님 내가 왜 개 같은 사람입니까? 라고 말할 필요도 없고 나는 주님이 말씀하는 게 나에게 적합하고 맞는 말이야 그러니 나는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내가 나를 알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상태에서 내게 합당한 은혜를 간구해야 해. 그러니 나는 주님이 주시는 정식의 은혜를 못 받아도 부스러기 은혜만이라도 받으면 돼’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 여인에게 있었던 진실의 본질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수욕은 믿음의 마지막을 달아보는 저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수욕을 이길 정도로 우리의 겸손과 내면세계의 진실과 견고함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여기서 밀리면 무너져라고 하는 논리나 아니면 심해서 바둥거리는 수준을 넘어서서 한번 넘어져도 한번 져 주어도 툭하니 일어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서 넘어질 수도 있고 져 줄 수도 있는 이와 같은 우리의 영적이 견고함이 있어야 합니다. 수욕을 당하고 오히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영적인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수욕을 당했다고 합시다. 우리 어떤 생각이 들지요? 자 우리 날마다 하는 말이 있지요. 다른 사람이 나를 비난해요. 그리고 나를 공격하고 상처를 줘요. 그러면 우리 어떻게 하지요? 옆에 사람 보세요. 늘 가르쳐 주던 말 합시다. 한번 보고 옆에 사람보세요. 뭐라고 말하시는지 알지요? ‘환자구나’ 그렇지요? ‘환자구나’ 말은 하지말고 속으로 하라고 했지요? 환자니까. 생각해보세요. 환자니까. 마음이 아프니까. 상대를 공격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니까.

여러분 이 세상에서 반드시 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그 말을 하면 그렇게 찌르면 상대가 결정적으로 아파하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서 해서는 될 일이 있고 해서는 안될 일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결정적인 아픔은 절대로 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결정적으로 고통스럽게 만드는 때가 있지요. 그럴 때는 자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때입니다.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때라는 것입니다. 정말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는 이와 같은 환자 상태입니다. 어리석은 상태라 이 말입니다. 그것을 생각하고 배려해서 우리가 그를 생각하고 이 고비를 넘겨가야되요.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맞받아 공격을 한다면 그것은 똑같은 사람이 될 뿐입니다. 이렇게 내 마음이 아픈 것을 건드리는 것을 보면 주님이 무엇인가 더 큰 연단과 깊은 무두질을 하시겠지하고 넘어가야한다 이 말입니다. 이 고개를 넘어 주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이와 같이 인생은 늘 정말 넘지 못할 큰 고통이 우리들에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믿음의 본질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은 믿음이란 우리의 자존심 때문에 와해되는 우리 중심의 것이 아니라 우리는 철저히 부인되는 오직 주님 오직 주님의 은혜만 보일 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믿음의 은혜만 체험되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아직도‘ 내 생각과 내가 어떻게 보일까? 그럼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내 몫은 무엇인가’라고 내가 생각되어지면 아직까지도 주님의 은혜는 우리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는 요즘도 느끼기를 우리 자신을 포기하라고 하시는데 문제는 그것이 잘 안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상대를 설득해야되고 내가 주님을 설득해야 되고 주님이 나를 이해해 주어야되고 상대가 나를 이해해 주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상대가 나를 이해해 주어야하고 주님이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면 우리의 인생은 영원히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내가 상대를 이해해 주기로 결심해야되고 내가 주님을 이해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지극히 다급하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오직 주님의 은혜만 바라 볼 정도로 다급할 때 우리는 주님앞에 가장 낮은 자 되고 주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욕을 이기는 믿음 이 온 세상과 우주관 내 삶의 인생관이 내 위주가 아니라 주님의 위주로 운영됨을 온전히 확신하기에 주님께 부끄러움이 없는거지요. 자존심 상하는 것도 없고 오직 주님의 뜻만이 온전하고 존귀한 거지요. 여려분 생각해 보세요. 자존심이 상한다 이게 뭐지요? 내 중심의 사고예요. 부끄럽다 내 중심의 사고예요. 주님 중심의 사고에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습니까? 무슨 자존심이 있겠어요.

자 이런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이 세 명이 있어요. 한 명은 이 백원 가지고 있어요. 한 명은 이 천원이 있어요. 한명은 이 만원이 있어요. 자 누가 돈 이 많습니까? 누가 돈이 많습니까? 의미가 없어요. 누가 돈이 많아요? 이 백원이나 이 천원이나 이 만원이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이 만원을 가진 아이는 돈이 많으니까 내가 저 아이를 잘 꼬여서 내 자녀를 삼아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우리에게 이 만원이나 이 천원이나 이 백원이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별 차이 없잖아요. 우리의 능력이 있어야 주님 앞에 그 정도 차이밖에 안 되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내 능력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가졌다는 말을 할 수가 있겠어요? 내 재능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겠어요? 우리에게는 의미 없는 숫자가 아닙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 제가 늘 본질, 본질 얘기하는데 본질을 우리는 붙잡아야 되요. 제가 다시 설명해 드립니다. 아주 빳빳한 천 원짜리가 있어요. 그리고 막 구겨진 5천만 원짜리 수표가 있어요. 두개 드리면 뭐 가지겠어요?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예요? 빳빳한 천원짜리하고 막 구겨진 그냥 5천만원 수표하고 둘 중에 하나 가지십시오. 하면 여러분 뭘 가지겠어요? 그래도 새것이 좋지 그렇게 생각합니까? 이것이 본질이예요. 외향도 중요하지만 내재적인 실제 가치를 깨달으면 외향의 절차를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재적인 실제 가치를 깨닫는 순간 외향을 간단히 넘는 거예요. 예수 믿는 것은 힘들다, 어렵다, 예수 믿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불편해, 이것이 외향적인 모습이거든요. 그렇지만 예수를 믿는 것의 내재적인 실질 가치를 느끼고 나면 그 외향은 간단하게 넘어가는 거예요. 예수 믿는 것 힘든 것 아니예요. 어려운 것 아니예요. 우리가 많은 것을 요구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 이상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예배드리러 나오는 것 불편하잖아요. 그러나 불편함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순간 하나도 불편하지 않고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다 이 말입니다.

우리들에게 수욕을 넘어가는 믿음의 겸손이야 말로 우리들에게 한순간의 어려운 문제해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믿음의 사람으로 영원한 문제를 해결하는 영원한 삶을 이루어가게 하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수욕을 넘어가는 것은 그 가운데 있는 주님의 실제적인 내재가치를 확인했기 때문에 수욕이라는 외향을 간단히 넘어버리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수욕을 이기는 믿음이라는 것은 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내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다시 사는 거죠.

사람마다 능력의 차이가 있다고요? 차이가 있을 수 있겠죠. 좀더 멀리 보는 사람, 좀더 넓게 보는 사람, 좀더 미리 보는 사람이 있겠죠. 차이는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차이이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은혜를 입혀주심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것들도 우리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제가 보니까 재능과 인격을 동시에 겸비한 분들이 대단히 드물더라고요. 그래서 하나님은 공평하신 것 같아요. 우리의 삶 가운데 따라서 재능이 있으면 인격을 위하여 기도하고 인격은 있는데 참 사람은 좋은데 무능해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능력을 위하여 기도하고, 이 두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내 겸손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체험하는 이와 같은 은혜를 통하여 주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여인은 주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던 거예요. 주님은 말을 안 하세요. 제자들이 뭐라고 하니까, 나는 상관없다. 이 여인이 너무 안타까워서 또 얘기하니까 너는 개와 같은 사람이야, 너에게는 해당이 안돼.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을 믿었어요. 주님이 아무리 말씀을 저렇게 하셔도 그래도 주님은 나를 불쌍히 여기실 꺼야. 나를 그냥 지나치시니 않을 거야 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 말입니다. 주님은 절대로 나를 섭섭히하지 않으실거꺼야. 무슨 뜻이 있겠지. 우리는 신뢰만 있으면 주님을 바라보고 일어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얘들 혼낼 때 있죠. 여러분 얘들 혼낼때 다른 사람이 여러분 보세요. 정말 얘들의 엄마 아빠 같아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얘들 혼낼 때 정말 엄마 아빠 같지 않잖아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들이 엄마 아빠가 혼내는 것에 대해서는 얘들이 그래도 받아들입니다. 제가 지난번이 우리 딸아이에게 물어봤어요. 얘, 너 아빠가 좋으니? 이렇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뭐라고 대답했겠어요? 아니 그렇게 강요하는데 대답을 안 하겠어요? 그랬더니 뭐라고 얘기 하냐하면 응 나 아빠 좋아. 그래서 제가 왜 좋아하니? 그랬더니 아빠니까, 아 그래서 정답을 말했다. 제가 생각하니 그냥 아빠니까 좋은 거예요. 아빠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니까 우리는 믿는 거예요. 하나님이니까 우리는 믿는 거예요. 우리 주님이니까 우리는 믿는 거예요. 어떻게 알아서 하시겠지, 나를 알아서 하시겠지, 아무리 말씀을 저렇게 하셔도 알아서 하시겠지, 주님께 대한 절대 신뢰가 필요합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가 약해서 상황에 따라 변할지라도 끝까지 믿어주고 회복을 기대하고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약해서 넘어져도 끝까지 후원해서 결국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예요. 사랑과 거래는 달라요. 거래는 이해에 따라 감정에 따라 마음이 변합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상태에 따라 마음이 변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기대하는 겁니다. 사랑은 주어서 끝나는 거예요. 거래는 주었으면 받아야 되요. 받고 싶어 져요.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주었는데 받는 것이 없으면 섭섭해지는 것은 거래예요. 사랑은 내가 준 것으로 끝나는 겁니다. 내가 아무것도 받지 못해도 주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도 기쁜 거예요. 많은 사람은 거래를 하고 사랑했다고 착각을 했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겁니다. 정말 사랑을 하면 상처받지 않아요. 사랑은 상처 받지 않는 겁니다. 거래를 했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와 거래를 하지 않고 사랑을 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상에서도 우리를 용서하신 겁니다. 우리를 십자가상에서도 사랑하신 겁니다. 주님의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여인은 주님을 절대적으로 믿었어요. 주님이 대답 안 해도 나와는 상관없다 해도 나를 개와 같다고 해도 주님은 결국 나를 불쌍히 여길 꺼야, 내가 부스러기 은혜라도 간구하면 주님은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실 꺼야. 나는 그 부스러기 은혜만이라도 충분해. 바로 우리는 삶의 가장 큰 본질, 믿음의 본질, 바로 우리 주님께 대한 긍휼히 여김을 받을 때 우리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주님의 인정과 긍휼을 받는 순간 우리의 문제는 순간에 해결된다는 것을 우리는 좀더 생각해 봐야 합니다. 15장 28절을 보니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성경에는 이 같은 유사구절이 많아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네가 후에 건강 할지어다,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 시로 문제가 해결 되요. 이것이 왜 그런지 아세요? 인간은 역사라는 시간대에서 활동을 해요. 그러니까 이만한 시간이 걸릴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예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하나님께서는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오래 걸리는 일이 예수님께서는 순간에도 이루어진다 이 말이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허락했다는 것은 순간적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겁니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는 주님의 인정과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힘입는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여건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가 임해야 합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주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내어놓고 주장 할 것 없는 불쌍한 자의 모습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내 자존심도 자랑할 것도 없어요. 우리가 해놓은 것도 없고 오직 주님의 자비만이 필요한 자의 순간에 설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회개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움직임은 결국 우리의 주님에 대한 작은 믿음을 보시고 우리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이 얼마나 가졌다고 그것 가지고 우리가 탐냅니까? 아니죠? 얼마나 바른 성품을 가졌는가? 얼마나 정직한가? 얼마나 바르게 자랐는가? 얼마나 마음이 따뜻한가?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보고 평가하지요. 주님이 우리가 어떤 것을 가졌다고 평가할까요?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여 어떨까? 주님을 향하여 얼마나 간절할까? 우리 마음에 어떠한 소원이 있을까? 주님을 향하여 어떻게 신뢰 할까?를 주님이 보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성경을 보면 이 여인은 주님께 대해서 특별히 소원이 간절하고 강렬했어요. 내 딸을 정말 주님의 은혜로 해결하고 싶었어요. 우리 마음에 소원이 있다는 것은 주님을 향한 소원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믿음이예요. 주님을 향한 소원이 믿음입니다. 자 우리 따라서 합시다. ‘주님을 향한 소원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런 소리해서 죄송한데요, 그저 용서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저희 어머님이 재작년에 88세로 세상을 떠나셨어요. 아무래도 어머님 모시고 있다 보면 연세 높으시면 하늘나라 가실 준비를 해야 되잖아요? 80세를 넘으시면서 보니까요, 마음에 준비를 해야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기도 제목에 제가 늘 썼어요. 저희 교회 헌금 봉투 맨 뒤보면 기도제목을 쓰는 난이 있잖아요. 거기다가 제가 매주 빠짐없이 그러니까 거의 7,8년 동안 쓴 것 같아요. 정확한 기한은 모르겠는데., ‘어머님이 어느 날 잠자시듯이 문득 주님 나라에 입성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똑같은 문구를 한 7, 8년 쓴 것 같아요. 오늘도 제가 12가지를 쓴 것 같아요. 빽빽하게 흰 란에 다 썼어요. 누가 보냐하면 제가 읽어봐요. 제가 읽어보는데 제가 썼다니까요. 쓸 필요 없죠? 그러면요? 그렇잖아요. 쓸 필요 없잖아요. 그렇지만 쓰는 것이 기도잖아요. 제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죠. 제가 읽어보려고 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제가 매일 빽빽하게 써요. 그런데 빠지지 않고 꼭 한 가지를 썼어요. 하나님 잠자는 듯이 문득 하늘나라에 입성하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물론 연세 드셨으니까 아프시기도 하셨죠, 하루도 본인이 아파서 누워서 정말 간병한 적 없이 그저 하루저녁, 물론 마지막에는 암이셨으니까 고통도 좀 당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한번도 자리 보존하고 누우셔서 수발을 들려야 될 일이 없이 그냥 하루저녁에 딱 그날 저녁에 속이 답답하시다고 그러시더니 그 다음날 아침에 10시쯤 화장실 갔다가 나오시고 문 닫히고 나오시더니 넘어지셨어요. 그래서 세상 떠나셨어요.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서 그 기도제목이 딱 생각나더라고요. ‘아, 하나님이 그 기도제목을 들어주셨구나.’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문득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음성이 들려지는 것 같아요.
우리 마음에 소원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해요. 왜냐하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향해 소원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을 기대하는 거거든요. 하나님께 소원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기대하는 것이고 그것이 믿음이예요.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소원을 가진다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란 말이예요. 이 여인은 하나님께 대한 소원을 가졌어요. 예수님께 대한 소원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물러설 수 없었어요. 그는 예수님께 소원을 가졌다는 것은 결국 믿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를 꼭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믿었단 말입니다.

인간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대가 다르기 때문에 주님이 긍휼히 여기시면 우리는 순간에 그 문제가 해결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의 사고나 세상이나 시간적인 계산대 위에서만 한정짓지 말고 우리의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에 맡길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 시로 나으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은총의 위대성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결국 예수님의 명령, 예수님의 말씀으로 해결됨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간혹 우리는 어떤 일이 이루어지면 처음에는 주님의 은혜로 감사해요.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 그래도 내가 애썼지. 내가 잠 못 잤지. 내가 놀지 않았지. 내가 쉬지 않았지 이렇게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맞습니다. 어떤 일을 이룬 사람을 보면요 잠 덜 잤고요, 놀지 않았고요, 남 하기 싫을 때 그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그런 은혜를 누가 주셨을까? 를 생각합니다. 아무리 밭 갈고 씨 뿌리고 아무리 밭 내주어도 비주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햇빛 주시지 않으면 곡식이 될 리가 없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말씀, 주님의 은혜의 역사,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며 우리는 겸손히 기대하며 묵묵히 인내하며 하고 싶은 말 참고 마음 삭이고 우리 자신을 숙성시켜가야 합니다.
요즘 제가 자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 있죠? 네 마음 속에 요즘 많이 생각되는 말이 뭐냐하면요, 자 한번 따라합시다. ‘숙성합시다.’ 뜸이 들어야 되잖아요. 그리고 뭔가가 푹 익어져야 되잖아요. 좀 숙성 돼야 하는 것 같아요. 우리의 삶도 마음도 생각도 사고도 말도 좀 숙성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때 우리도 성도로서 푹 익어져 숙성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의 역사를 이루는 것 같아요. 요즘 제 마음에 안타까운 것이 있어요. 내가 이 교회에서 벌써 14년이나 설교를 했는데 저는 아직 이런 정도 수준까지 밖에 설교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너무 너무 안타까운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제 마음에 또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 여태까지 14년이나 기다려주셨는데 어느 때인가 잘 익은 설교를 할 때가 오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마음에 위로를 가지고 또 설교를 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언제나 주님이 우리들에게 어떤 은혜를 주시는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말씀을 주실까? 어떤 은혜를 주실까? 어떤 능력을 주실까? 우리의 부끄러움을 다 드러내어 우리를 상쾌하기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리워서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사용하실 거야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누추함을 그대로 인정했어요. 우리의 누추함을 인정하고 ‘네 믿음이 크도다.’ 라는 그 말씀을 들을 때 ‘네 소원대로 되리라.’ 라는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드리고 맺겠습니다. 요즘 근간에 제가 은혜를 받은 일이 있는데요. 뭐냐 하면 언젠가 한달 쯤 전인가? 더 됐는가 생각이 드는데요. 제가 저녁에 잠깐 일을 보러 교회에 왔어요. 그런데 주차장에 차가 가득 차 있는데 마침 저기 우리 옆문으로 올라오는데 있죠? 제가 거기에다 자동차를 주차를 하고 올라왔어요. 제 차를 아니까 언제든지 말씀하면 가서 이동을 할 준비를 하고요. 잠깐 일을 보면 되니까요. 제가 와서 잠깐 일을 봤습니다. 금방 일을 보고 제가 나가려고 하는데 누가 제 차 뒤에다 자동차를 가로세워서 막아 놨더라고요. 차가 빠져 나가지 못하게, 우리 주차장 입구를 보면 모퉁이에 차 주차하지 마십시오. 라고 구조물을 설치해 놨죠? 그것을 치우고 거기에 대어 놓은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못 치우게 피스로 박아놨습니다. 그런데 차가 나갈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연락처도 없고 도저히 할 수가 없어요. 차는 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요, 아무리 찾아도 못 찾겠어요. 그래서 한참 찾고 앞에 서있으니까 앞에서 주차 관리하는 빌딩에 있는 분들이 왔다 갔다 하시는 것 같아요. 저를 알잖아요. 그러니까 거기서도 차를 대니까 본인들의 차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그러더라고요. 왠 청년이 여기에 차를 대놓고 교회로 들어갔다 이렇게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아, 성도가 이렇게 하는구나. 그래서 성도들은 기본적으로 양심이 있는데 이렇게 차를 가로막고 나가면 안 되죠? 그렇구나. 이건 안 되겠다. 교육을 시켜야 겠다라고 생각하고 특별히 청년이라는 말에 제가 오늘은 좀 교육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라는 사람은 가르쳐야 되죠. 평생오래 살아야 할 텐데. 그래서 여기저기를 다 찾았어요. 그래서 근무하시는 집사님하고 해서 전부 우리 교회 빌딩 여러 군데를 다 찾아봤는데 없어요, 아무데도, 안 나오는 거예요. 연락처도 없고, 사람도 없고, 그래서 저는 그냥 가려고 했는데 갈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키 맡기고 가면 되지만 저는 집이 가까우니까 걸어서 가면 되는데 뒤에 차가 있기 때문에 제가 놓아두고 가면 다른 차도 다 못가잖아요. 아 이걸 어떻게 하나, 차키를 맡겨두고 갈까 말까 하다가 제가 좀 가르쳐야 될 것 같아서 제가 그 자동차 사진을 찍어놨어요. 그래서 번호를 사진으로 찍어두고 혹시 제가 너무 기다리다 안가면 가야지 제가 몇 시간을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데 40분에서 1시간 정도 있다가 결국 다 찾아서 그 청년을 찾았어요. 그래서 왔더라고요. 그 청년이 자기는 10분만 있다가 갈려고 그랬다고 그러더라고요. 근데 10분이 40분 1시간이 된 거죠. 저는 서있는 시간만 40분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청년 이리로 따라오게.’ 제방으로 데리고 왔어요. 주차 잘 못해서 목사님 방까지 끌려 온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렇게 얘기했죠. 예수 믿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남을 배려하는 것이다. 내가 예수를 믿는데 내가 내 상각만 하고 남을 배려하지 못하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기본적으로 내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은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예요. 그래서 제가 야단은 안쳤어요. 야단을 치지 않고 가르쳤습니다. 평생을 살아가야 될 텐데 그러면서 제가 그렇게 얘기했어요. 전 학생인줄 알았어요. 청년이 자동차를 가졌는데 아직까지 자동차를 가지고 다닐만한 마음에 인격이 안 된 것 같다. 목사님이 한 가지 제안할 텐데 따를 수 있으면 따르고 그렇지 못하면 따르지 말아라. 한달 동안 앞으로 차를 타지 말고 교회주차장 맨 안쪽에 세워두고 그냥 걸어 다녀라. 그랬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순순히 대답을 하더라고요. 그렇게 하기로 얘기를 했는데 학생이 아니라 직장을 다니는 청년이더라고요. 그래서 직장 다니는 청년이면 자동차타고 일도 봐야 되잖아요. 그러면 그러지 말고 청년이 뭔가 이것이 정말 잘못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뭔가를 하라고 얘기했어요. 그리고 제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목사님은 주차를 할 때도 옆에 사람이 자동차 문을 열 때 조금이라도 잘 열게 하려고 이쪽 옆으로 차를 붙여서 세운다. 적어도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조금이라도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데 우리가 바쁘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나 위주로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의 기본적인 방향이 아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를 통해서 이것은 네가 실수한 것이 아니고 네가 이제까지 평상시에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지 실수가 아니다. 그러니까 네 모든 삶의 습관을 완전히 고치자. 그렇게 해서 봉사를 하기로 했는데 무슨 봉사를 했냐하면 주차위원 봉사를 했어요. 주차 봉사를 하게 했더니 자기가 하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정말 눈물도 흘리고 많이 회개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안수기도를 해줬어요. 모든 축복을 다 해줬어요.
그 이후에 한달이 넘어서 저는 그 청년을 한번도 못 만났어요. 마음에 걱정이 되더라고요. 이 청년이 또 믿음이 있긴 있는 것 같은데 회개한다고 있는데 그 믿음이 이기지 못하고 딴 곳으로 간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런데 지난 주일에 장로님이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왠 청년이 하다 와서 한달동안 여태까지 주차위원 봉사를 한다고 칭찬을 많이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말을 들으니까 제가 정말 기쁘더라고요. 그 청년은 정말 회개를 한 겁니다. 내가 정말 잘못했구나, 내가 내 생각만 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았구나. 이것은 주차한번 잘못한 것이 아니라 생각의 근본이 나를 위주로 생각한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주로 생각하고 내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생각하지 않은 삶의 근본적인 방향과 자세예요. 그런데 그 청년은 고치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까지도 주차 봉사를 하고 있더라고요. 주차 봉사를 하는 청년이 그 청년입니다. 그 청년은 틀림없이 대성 할 거예요. 위대한 인물이 될 것 같아요.

회개는 정말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정말 고치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사는 거예요. 이 여인은 너는 개 같은 사람이야 라고 했을 때 그것을 정말 받아들였다 이 말입니다. 나는 정말 그래,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 예수님이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거예요. 그렇게 때문에 네 믿음이 크도다 라고 말씀하셨던 거예요. 그리고 뭐라고 말씀하셨죠?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 여인은 자기가 정말 개와 같다고 생각하고 정말 부스러기 은혜라도 구했던 것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우리 자신의 모습을 파악하고 정말 주님 앞에 회개하는 마음이 되어 내 마음을 낮추고 주님의 긍휼을 초청할 때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그 순간에 해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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