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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7대표적(7):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 (요 11:2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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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는 두 말 할 것 없이 ‘죽음’입니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죽음이 찾아오면 한 마디로 속수무책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혹시 가사 상태나 기절 상태로 있다가 깨어나는 일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나사로라 이름하는 사람이 완전히 죽었다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7대 표적 중 마지막 기적으로 예수님의 모든 기적 중에서도 클라이맥스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때로는 인간이 기적을 흉내 냅니다. 마귀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면서 기적을 흉내 냅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사에 관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성경 구절이 있죠.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삼상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심으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유일하게 생명의 구원자 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기적의 사건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기를 소원합니다.

[1] 나사로의 소식을 듣고 지체하신 예수님 :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

당시 나사로가 살던 곳은 베다니 마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5리(요11:18)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인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들르셨던 곳입니다. 그 마을에 사는 나사로와 그 누이 마리아, 마르다는 예수님과 절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먼 데 떨어져 계시는데, 베다니 마을에서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나사로가 중병에 걸려 죽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 전갈이 요11: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나사로를 가리켜 ‘사랑하시는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가 위급하니 속히 오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이런 경우라면 당연히 예수님 입장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가능한 한 가장 빠른 방법으로 나사로에게 달려가야 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 빚을 내서라도 KTX 고속철을 타거나, 비행기를 타거나 ... 그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5절~6절 보면 나사로와 누이들을 사랑한다는 표현 뒤에 전혀 엉뚱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6절. “ ...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 ” 당장 달려가야 이야기가 되는데, 그곳에서 이틀을 지체하셨다는 겁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틀 후에 출발한 후에도 여전히 서두르지 않습니다. 베다니 마을에 당도한 후에도 서두리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연거푸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차례로 급하게 나가 맞이하러 갔는데, 예수님은 마을로 들어오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계셨습니다. 29절~30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급히 달려가는 마리아와 아직도 그 자리에 지체하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셨습니다. 일부러 시간을 지연하셨다는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타이밍을 맞추시기 위함입니다. 두 구절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15절.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 ” 그 현장에 계시지 않음으로 오히려 좋은 기회를 갖게 됐다는 말씀입니다. 17절.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예수님이 도착하신 시각이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안치된 지 이미 나흘이 지났을 때라고 했습니다. 일부러 그 시각을 맞추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제자들도, 마르다와 마리아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만 아직 신앙이 온전치 못합니다. 그들의 신앙은 제한적입니다. 예수님이 병은 고치지만 죽음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중 가장 신앙이 좋았으리리 짐작되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 고백한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2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님이 미리 오셨으면 병을 고쳤겠지만 이제 죽었으니 다 틀렸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신앙적 한계를 익히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이번 기회에 그들의 신앙을 바로 세워주려고 의도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병을 고쳐주고, 먹을 것이나 마련해 주러 오신 게 아니죠. 그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서 영생을 주러 오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심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는 것이 물론 괴롭고 슬픈 일지지만, 금방 살려주면 되니까, 그리고 종합적으로 생각해 볼 때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신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지체하신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시간표’와 ‘인간의 시간표’의 차이입니다. 인간은 항상 지금, 당장, 즉시, 빨리 이루기를 바랍니다. 특히 한국 사람이 이 분야에서 단연 세계 제일이죠. 한국인이 있는 곳에는 외국인도 금세 따라서 하는 말이 있죠. 뭡니까? “빨리! 빨리!”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무조건 빠른 게 능사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당장 해 주시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뤄지지 않아도 오히려 나중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서두르지 않고 때를 맞추십니다. 가장 중요한 때, 가장 좋은 때를 맞추십니다. 기도를 해도 당장 응답하실 때도 있지만, 오래 기다리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음과 같은 원칙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원칙을 모르고 당장 뭐가 되기만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런 태도는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때에 나 자신을 맞추는 게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꾀바른 남자가 하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는 1백만 년도 1분에 불과하다면서요?”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응, 그렇지.” 그러자 이어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1백만 달러도 1센트나 마찬가지겠네요.” “그런 셈이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남자가 말합니다. “그럼요, 소원이 하나 있는데요~ 제게 더도 말고 1센트만 주세요!” 하나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아,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그런데 1분만 기다리게!” 완전히 KO패를 당한 겁니다. 우리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나 자신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차라리 늦은 게 더 잘 된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 나온 그런 예를 찾으면 너무 많습니다. 몇 가지만 생각해 보죠.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얻었습니다. 약속은 75세에 받았습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습니까? 참 답답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적합한 시기였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 전에 자식을 주셨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어쩌면 인간의 힘을 자랑했는지도 모릅니다. 자기가 나이에 비해 건강이 좋아서, 정력이 좋아서 자식을 낳았는 줄 착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래 기다리게 하시면서 99세에 약속을 재확인해 주십니다. 그때는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도저히 불가능함을 고백합니다. 그후에 비로소 하나님이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으로 주신 것 고백하는 신앙을 보신 것입니다. 그 신앙이 있으니까 나중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할 때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신앙이 정립되니까 비로소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아브라함이 긴 세월을 기다린 게 아니라, 하나님이 기다리신 셈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 술맡은 관원장을 만납니다. 그가 출옥하면서 요셉의 애매한 사정을 듣고 석방시켜 줄 것을 약속합니다. 그런데 감감 무소식입니다.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만 2년 후에 바로 왕이 꿈을 꾸고 뜻을 몰라 고민할 때 그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게 됩니다. 요셉이 바로 왕에게 호출되어 꿈을 해석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일약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만일 그 권원장이 출옥 즉시 석방시켜 주었다면, 요셉이 어떻게 됐을까요? 어디 가서 종살이를 하거나, 기껏해야 평민으로 살다 인생을 마쳤을 겁니다. 2년의 기다림이 그렇게 중요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세계의 심장부인 로마에 가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래도록 길을 열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다 한참 후에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압송됩니다. 잘 따져 보면 이게 정말 잘 된 겁니다. 유대인들이 고소해서 애매하게 잡혔지만, 오히려 잘 됐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결사대까지 조직해서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시민권자였던 바울을 로마 군대가 호송하니까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받았습니다. 로마까지 가는 교통비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가서 귀족들을 접촉했습니다. 귀족들을 접촉했기에 어쩌면 로마의 복음화가 앞당겨졌는지 모릅니다. 만일 개인 자격으로 로마에 갔다면 이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절묘한지 알 수 있습니다.

본문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념은 이랬습니다. 죽은 지 3일 동안에는 영혼이 완전히 떠나지 않고 시신 주위 맴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 전에 와서 살려냈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영혼이 돌아온 것으로 오해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의 신앙에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나흘째로 맞추신 겁니다. 그때는 이미 시신이 부패했기 때문에 누구도 완전히 죽은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절묘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롬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렇습니다. 인간이 늦다고 느낄 뿐이지 하나님은 결코 늦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시계는 정확합니다. 우리가 괜히 조급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체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를 맞추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신앙의 덕목은 ‘기다림’ 곧 ‘인내’입니다. 약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
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부디 이와 같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시고, 하나님의 시간표를 바라보며 인내하는 신앙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 흘리신 예수님 : 체휼하시는 사랑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에 가셨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셨습니까? 나사로와 주위 사람들을 심히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33절.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 ” 통분히 여기심은 분노를 의미하고, 민망히 여기심은 불쌍히 여기셨음을 의미합니다.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여기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흐느껴 우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 연약한 나사로와 주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인간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든 죄와 사단을 향해 분노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동정하십니다. 그리고 도와주십니다. 이를 가리켜 ‘체휼’이라 부릅니다. 히4:15~16 말씀을 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님은 몸소 인간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체험해 보셨습니다. 말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가난한 가문에 태어나셨고, 피난하신 경험도 있고, 집 없는 고통도 아셨고, 따돌림을 받고, 매를 맞기도 하고 인간의 극한 고통와 수치인 십자가도 경험하셨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큰 고통을 당해도 예수님의 경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을 다 아시고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그게 ‘체휼’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당하든지 얼마든지 주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연약함, 무지함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다만 불쌍히 여기십니다. 같이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인간은 오히려 판단하고 손가락질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승천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중보하면서 기도해 주십니다.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아무쪼록 예수님의 그 크신 체휼의 사랑을 기억하시고, 고난 많은 세상이지만 늘 위로 받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3]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내신 예수님 : 영생과 부활의 축복

나사로의 무덤에 다가가신 예수님은 돌문을 치우도록 지시합니다. 당시 유대인의 매장법은 자연 동굴에 시신 안치하고 돌문으로 닫아놓거나, 혹은 바위를 파서 인조 동굴을 만든 후 시신을 안치하고 돌문을 닫아 둡니다. 그때 마르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시신이 부패했다며 만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뜻을 굽히지 않고 명령하셨고, 결국 돌문이 치워집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죽은 나사로를 향해 외칩니다. 43절. “ ... 나사로야 나오라!”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것입니다. 44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놀라운 기적입니다. 죽음의 한계를 뛰어넘는 구원의 대역사입니다. 물론 나사로의 경우는 정확히 표현하면 ‘소생’입니다. 그는 후일 다시 죽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서 인간의 생명을 주관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을 안겨다 준 것은 죄입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 ... ” 인간은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죽음에는 양면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죽음(=영혼의 죽음)과 육적인 죽음(=육체의 죽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육체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는데,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차원입니다.

여러분, 무정란과 유정란의 차이를 아시죠? 겉으로 보면 그게 그것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무정란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대로 두면 썩어집니다. 그런데 유정란에는 생명이 있으므로 부화된 후 삐약거리며 병아리가 탄생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가 멀쩡하게 살아있으니까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릅니다. 어떤 사람(신자)의 영혼에는 예수님이 임재해 계십니다. 죄사함 받고 새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죽음 이후 천국에 가고, 예수님 재림 후에는 육체가 흙으로 돌아갔다가도 새 몸으로 부활합니다. 썩지 않고 빛나는 영원한 새 몸으로! 반면에 어떤 사람(불신자)의 영혼에는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영혼이 죽은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소유가 많고 세상의 일들 해도 참 기쁨과 만족이 없고, 영혼이 곤고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죽음 이후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더 이상 저주의 죽음이 아닙니다. 물론 죽음의 과정을 통해 육체가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리고 정든 사람들과 잠시 헤어지는 슬픔이 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이사 가는 겁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새 몸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렇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에 대한 유일하고도 완전한 해답입니다.

요즘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가 화제거리입니다. 한국이 앞서 가니까 좋기는 합니다. 부존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흔히 IT, 그리고 BT(생명산업)가 발전해야 미래가 있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감사하고 자랑스런 일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심할 게 있습니다. 그런 연구를 통해 난치병, 불치병을 고친다고 하고, 인간의 수명이 120년까지 연장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런 연구가 인간을 복제하고, 생명을 경시하는 현상으로 오도된다면 인류의 대재앙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수년 전 영국에서 「클로네이드」라는 인간복제 회사가 출범했습니다. 국가가 법률로 제한하면 공해 상에 가서라도 복제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인간복제를 통해 영생을 꿈꾼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런 게 영생도 아니고, 만일 그런 일들이 시행되면 그것은 인류의 재앙입니다. 최근 상영된 영화「아일랜드」가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과학자들이 그런 기술을 지혜롭게 선용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해주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건전한 견제자가 되어 격려도 해주고 기도도 해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무엇일까요? 육체에 대한 관심에만 빠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장수가 축복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생입니다. 영생은 단순히 ‘삶의 길이’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냥 오래 오래 사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의 질’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혹시 단명해도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영적인 풍성함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시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 ” 우리는 오직 예수 안에 있는 영생과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진정으로 복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주님 부르시면 천국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7번째 기적을 살펴보았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신 주님의 뜻을 잘 헤아리면서 우리 신앙에 잘 적용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순응하는 신앙, 예수님의 체휼의 사랑으로 위로 받는 신앙, 영생과 부활을 소망하는 신앙을 통해 더욱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홍 문 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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