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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운명의 차이 (갈 4: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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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생명 구한 아름다운 회항

3일 전 8월 25일 오후 3시20분쯤 인천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던 대한항공 여객기가 비행 중에 네 살 난 여자 어린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항공유 73 톤을 쏟아버리고 회항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10여분 전 이륙한 비행기가 강원도 원주 상공을 지날 때 어머니와 함께 탄 이 어린이가 39도의 고열과 호흡곤란, 발작 등의 증상을 보이며 의식이 혼미해졌습니다. 기내 상황은 즉시 기장에게 보고됐고 승무원들은 기내방송을 통해 탑승객 가운데 의사를 찾았고 다행히 의사가 나타나서 “기압 차이 때문에 감기가 악화된 것 같지만 나이가 어려 비행을 지속하는 것보다 치료를 받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소견을 냈고, 기장은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기수를 돌리기로 하고, 운항센터에 통보했습니다. 기장은 회항 시 랜딩기어가 활주로에 닿을 때 가해지는 충격을 방지하기 위해 착륙무게를 줄여야 한다는 점을 감안, 72.6t(4000 여만 원어치)의 항공유를 공중에서 버린 뒤 인천공항에 착륙했습니다. 이 어린이는 기장의 연락을 받고 공항에 대기 중이던 의료진으로부터 응급조치를 받고 정상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항공기에는 두 모녀를 제외하고 361명의 승객이 있었지만 아무도 운항 지연에 항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한항공은 “이번 회항으로 유류비, 이착륙 료, 연결승객 관련 경비 등 5000만 원 가량의 추가비용이 발생했지만 인명을 중시한 기장의 결정은 회사의 경영방침과 일치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어린이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 아이가 재수나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한 생명을 향한 사랑과 희생을 361명의 승객들 모두가 감당했고 기장을 비롯한 항공사가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므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희생을 통해 살아가고 있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 해석해야 하는 것은, 그 위에서 역사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과 간섭으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아직도 자신이 운수를 잘못 타고 나서, 재수가 없어서, 팔자가 더러워서 그렇다고 한탄하면서 오늘 이 거룩한 예배자리에 나와 계신 성도님들은 안 계시겠지요?  또한“아이고, 내 팔자야, 아이고 내 운명아!” 이처럼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팔자 타령하면서 낙담하고 절망하면서 살아오신 분은 안 계신지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도 잘들 된다는데 나는 왜 이렇게 하는 일마다 안 되는 걸까? 나는 무엇인가 해보려고 아무리 발버둥치고 해도 왜 이토록 안 풀리는 것일까? 아무개는 잘 되는 데, 누구의 가정은 행복하다는데,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왜 우리 가정은 이렇게 우환질고가 그렇게 많은가?”오늘도 이런 복잡한 생각을 가슴에 품고 오셨습니까? 이 시간 이후로 여러분의 운명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운명과 천리를 개척하는 것을 뜻하며, 운명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면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운명을 바꾸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나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나 자신이 스스로 개발하여 나의 운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영국의 요한 웨슬레의 설교 가운데 "Almost Christian" 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는데 그 뜻은 "거의 기독교인"입니다. 이 '거의'라는 단어가 참 좋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일본 Sony 회사의 회장이 늘 걱정하며 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몇 년 동안 기술 개발해서 전자제품을 마련하고 1년 후면 한국에서 거의 비슷한 제품이 나온다. 그러더니 그 기간이 점점 단축되어서 6개월 후, 3개월 후면 나오고, 이제는 거의 다음 달이면 거의 유사한 제품이 나온다."

사실은 한국 경제가 이만큼 발전하는데 그것이 대단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자동차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일제 자동차가 미국 시장에서 별 볼일 없는 차였는데 그들이 참 열심히 기술 개발하고 만들어서 미국 차보다 고장 없는 차로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그 이미지를 깊이 심어놓았는데, 지금은 한국이 일본 자동차 하고 거의 비슷하게 만들어서 팔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한국 차가 세계 시장에서 좋은 가격 경쟁력을 갖고 얼마나 많이 팔리는지 모릅니다. 거의 비슷한 것, 이것은 대단히 좋은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거의'라는 말이 치명적일 때가 있습니다. 한 학생이 좋은 대학을 목표로 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내신 성적이 참 좋았습니다. 수능 시험을 봤는데 최고 점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은 점수를 받아서 흐뭇했습니다. 원서를 냈습니다. '거의 합격했습니다.' 그러면 합격입니까? 불합격입니까?

여러분, '거의'가 괜찮을 때도 있지만 치명적일 때도 있습니다. '거의' 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최선의 가장 무서운 적은 차선'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차선이 없었으면 최선으로 살 사람들이 차선으로 만족해버리고 만단 말입니다. 더 발전해서 더 아름다운 진짜 생애를 살 수 있는데 차선 때문에 가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믿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전하고 감동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그 복음을 온전하게 신뢰하지 못한 채 과거에 의지하고 살았던 율법을 놓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특별히 갈라디아 교회에 영향을 미치자 갈라디아 교회가 기우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향해서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그들이 그처럼 잘 지킨다며 그처럼 소중하게 생각했던 율법을 자세히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 보면 비슷해서 망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는 13살 차이입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이스마엘이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이삭입니다. 그 둘이 같은 것이 있는데 아버지가 같습니다. 그 아버지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인데 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사귀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축복의 통로로 삼은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이 그들의 아버지였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 같은 것이 많았습니다. 아마 외모가 많이 비슷했을지 모릅니다. 그 둘은 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풍습도 같았을 것이고 그 가정만이 가졌던 가풍이나 삶의 스타일도 동일하게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분이 다릅니다. 어머니 달랐습니다. 한 여인은 종이었고 한 여인은 자유자였습니다. 당시의 법에 따라서 종의 자식은 종이었습니다. 그 신분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온전한 상속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어머니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종의 몸에서 난 이스마엘은 종의 운명을 가지고 있었고, 본처의 몸에서 난 동생 이삭은 주인의 운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아들 된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 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두 아들 사이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벽이 가로막혀 있었는데 그것은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방법에 따라 상속자를 얻으려고 했었던 결과로 태어난 존재였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자연스런 방식으로 태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사라는 더 이상 아들을 생산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나가 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으로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을 것을 포기한 사라는, 아브라함과 의논하여, 사라라는 몸종을 통해서 아들을 생산할 것을 제안하게 됩니다. 즉, 자신은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무하니 자식을 생산할 능력이 있는 몸종을 통해서, 자식을 얻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태어난 존재가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마엘이 태어나기 위해선, 하나님께서 개입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리고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인간의 자연스런 능력으로 태어난 존재가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때라 태어난 자였습니다. 인간적인 능력이나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순전히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총으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낳고, 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어머니인 사라의 나이 90세가 되었을 때에, 약속의 아들인 이삭이 태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도저히 아들을 낳을 수 없는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결과였으며,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의 열매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생산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이삭이란 아들을 주셨습니다.

바울이 이 이야기를 여기서 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이 낳았다고 해서, 다 같은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라는 점이고 아버지가 같아도, 종인 아들이 있고, 상속자인 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의 세계에 적용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교도 우리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깁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해서, 다 똑같지 않는 것처럼, 신을 섬긴다고 해서, 또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22절 말씀입니다.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인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바로 이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육체를 따라 종교생활을 하느냐, 아니면 약속을 따라 종교생활을 하느냐? 입니다. 육체를 따라 종교생활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재능과 실력으로 자신의 의를 쌓아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경건의 목표를 세워두고, 인간적인 열심으로 자신의 경건과 의를 이루기 위하여 열심을 다하는 종교생활입니다. 이런 것은 경건하기는 해도, 겉모습은 그럴 듯해도, 기독교적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세상적이며, 종과 같은 생활입니다.

약속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생활은 이와 전혀 다릅니다. 내 힘과 내 의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하여 애쓰지 않습니다.

나는 수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실패자요, 죄인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갑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새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을 맡깁니다. 내가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의 미래, 나의 운명, 내가 살아야 할 모든 길들을 맡깁니다.

더 쉽게 말씀드린다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 그런데, 내 힘과 내 지혜와 내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면, 그는 율법의 자식이고, 종의 자식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믿고,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자는 참된 자유인이고,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주 빠지게 되는 함정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면, 기쁨이 있고 성취감도 있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맛도 있고, 또 멋도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도 받을 것이고, 우러러 보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가끔 수도사들처럼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나 기도원이나 수도원에 가서 몇 달이고 기도와 묵상만으로 시간을 보내거나 아니면, 영성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예수님의 숨결을 느끼며 사는 그런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것들을 멋으로 하고, 사람들이 보아줄 것을 바라고 할 때에,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자신의 내적인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할 때에, 이 아름다운 헌신과 희생과 봉사와 영성도 타락하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하는 율법적인 삶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 되고, 성령의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구가 되길 원하고, 그리하여, 성령의 도구로 사용된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맺어진 열매는 종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할 수 없는 가운데, 오직 신적인 능력과 약속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은총으로 맺어진 열매는 참된 상속자요, 참된 아들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을 우리들이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생활이 종의 생활이 아니라, 상속자로서 아들의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두 언약

바울은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 이제 두 언약에 관한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시내산이 나오고, 예루살렘이 나오며, 또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비유입니다. 간단하게 말씀을 드린다면, 시내산이란 모세를 통하여 주신 옛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고, 율법을 의미하며, 또 율법을 중심으로 하여 살아가고 있는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하고 있는 유대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언약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새 언약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사인을 하고 서명을 하여 확정한 언약입니다. 언약이란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 수 있는지에 관한 약속입니다.

그런데, 옛 언약이란 그 내용이 '너희는 ... 하라','너희는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축복된 삶을 살기 위해선, 지켜야 할 법칙과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사실상 온전히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법칙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달랐습니다. 새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내가 ...하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리라, 내가 너희를 용서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리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고, 보호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그렇기에, 우리는 단지 이런 약속을 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기다렸던 아브라함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기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믿음의 세계에서는 인간적인 능력이나, 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인간의 능력으로 사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지혜와 능력으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내 능력과 내 땀과 수고와 희생으로 나타난 열매는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바로 여기서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맺어야 할 열매는 내 의의 열매가 아닙니다. 내안에 들어오신 성령의 능력으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의 세계와 복음의 세계가 다른 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으로 살아가는가?, 내 의지와 내 힘과 내 결단력으로 살아가는가? 입니다.

두 아들의 운명

바울은 이제 마지막으로 이 두 아들들의 운명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의 운명은 그가 쫓겨남으로 끝났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씨였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하신 축복이 있어서, 그도 큰 민족의 아비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복인 영적인 복, 하나님의 자녀 됨의 복, 영원하고 신령한 복은 받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력의 열매, 의지의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 어느 정도의 죄성과 타락과 인간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열매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날 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우리의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생각 대신에, 성령께서 우리 자신을 다스리도록 하는 겸손함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맡기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적인 경건인 것입니다.

이삭의 운명은 어떠합니까? 그가 핍박을 받았지만 그는 진정한 하늘의 복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아브라함의 뒤를 이은, 진정한 하나님의 상속자라면, 우리들은 세상으로부터의 핍박을 의아하게 여겨선 안됩니다. 이삭이 그러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하고 있어야 할 믿음이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약속과 믿음에 의한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녀란 사실입니다. 이 축복은 약속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열매이며,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로 이루어진 말할 수 없이 큰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다시 율법의 세계로 돌아가려고 하는 생각을 해선 안됩니다.

폴 뚜르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선과 악은 우리가 행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정신 속에 있는데 하나님을 위한 또 친구를  위한 사랑에서 행해지는 것은 선이고 이기심과 개인의 즐거움을 위한 욕망에서 행해지는 것은 악이다" 

그렇습니다.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그 일이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합니다. 똑같은 사랑의 헌신을 하는데, 한 편에선 선이 되고, 또 다른 편의 사람은 악을 행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복음과 율법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복음과 율법은 우리가 행하는 일에 있어선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실천하는 마음속에 있고 영혼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행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며 행할 때에 우리는 복음의 빛 아래서 행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다운 삶을 사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내 의와 능력과 의지와 경건에 의지하여 행할 때에 우리는 율법의 아들이 되고, 종의 아들이 되고, 쫓겨날 운명의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능력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늘의 상속자입니다. 그러니, 다시 율법의 세계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즉, 내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이나, 실력, 심지어 내 경건의 능력까지라도 의지하고, 자랑하고, 으시대고, 뽐내려는 생각과 행동에서 벗어나서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그 영광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우리의 믿음을 가지고 분명한 두 운명의 차이에서 선택받은 약속의 자녀로 살아가시는 긍지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 정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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