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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알의 밀알처럼 (요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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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물에 빠졌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먼저 구하고 아버지는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해수욕장에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자신은 탈진해서 죽었다. 이런 사건은 우리에게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생명을 말할 때는 우리가 사는 7-80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공간의 제약 속에 있는 우리에게 70-80년의 생애는 매우 가치 있는 것이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그것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 성경이 말하는 생명은 언제나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인간은 모두 다 죽은 것이다. 아담의 죄로 인해서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상실되었다. 영원한 생명이 가장 소중한 것이요, 그것은 우리의 7-80의 생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면 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인간은 알 수 있을까? 많이 배웠다고, 학식이 뛰어나다고, 머리가 좋다고 과연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알 수 있을까? 사람이 하나님이 누구인지 스스로 알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지 인간은 스스로 그 길을 알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그 길을 알 수 있고, 알릴 수 있는 길이 있다. 바로 전도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전도는 사람들에게 미련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미련한 전도를 통해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하나님은 전도를 통해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전도만큼 귀한 것은 없다. 선교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전도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우리가 전도하기 위해서는 희생을 치루어야 한다. 시간과, 물질과, 무엇보다 마음과 기도의 시간을 희생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얻기 위해 희생한다고 하지만 전도하기 위해서 가장 큰 희생을 치룬 분은 하나님이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을 희생하셨다. 성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희생하셨다. 성령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 끝 날까지 교회를 떠나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희생을 하신다. 오늘 말씀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기 위해서 썩는 밀알과 같이 희생하셨다. 하나님이 죽으시고 희생하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셨다.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는 이런 희생이 따르고 대가가 따른다. 희생 없이 생명을 건지는 일이 없으며, 아무런 대가없이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는 법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지만 우리가 구원받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나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었다. 내 마음 속에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할 수 있도록 눈물 흘려 기도한 사람이 분명 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나를 전도하기 위해서 시간을 바치고 돈까지 쓴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고 전도하기 위해서 밀알과 같이 땅에 떨어져 희생하셨는데 우리는 한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 과연 얼마만큼의 희생을 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전도하셨다. 예수님의 전도는 쉽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고, 핍박을 받았다. 사람들로부터 싫은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고, 괴로움도 많이 당했다. 예수님도 그렇게 전도하면서 고생하고, 핍박을 당하고, 희생하셨는데 우리가 전도하면서 핍박당하고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사도 바울 역시 전도하다가 고초를 많이 겪었다. 배고픔과 돌에 맞음과 파선하는 경험과 옥에 갇히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의 앞에 벌어진 현실들이었다. 사도 바울이 전도하다가 그 만큼의 어려움을 당했다면, 복음을 전하다가 그렇게 희생했다면 우리 역시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왜냐하면 희생 없이 생명을 건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 속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 한국 교회가 이만큼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은 처음 복음을 전해 줄때 사람들의 값진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하나의 밀알과 같이 썩어졌다. 희생했다. 그래서 오늘 우리를 포함한 수많은 열매를 낳았다. 

  토마스 선교사는 영국에서 태어나 27살에 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고 중국으로 선교사로 왔다. 영국에서 중국까지는 거의 지구의 끝에서 끝으로 온 것이다. 그는 중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정말 꽃다운 나이에 꽃다운 그의 아내를 잃고 만다. 아내를 잃은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그는 중국의 한쪽 귀퉁이에 붙어있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조선에 들어온다. 그 때는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실시할 때 였으므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음은 당연하다.

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오는 상선 제너럴 셔어먼 호에 몸을 실었다. 중국에서 구한 중국어 성경책을 잔뜩 싣고 함께 온 것이다. 대동강 변에 내렸을 때 관군은 배에 불을 질렀다. 성경책 몇 권을 몸에 품고 헤엄을 쳐서 강변에 도착했는데 관군들을 토마스 선교사를 무참히 죽였다. 그는 대동강 변에 피를 뿌리며 그의 품에 있었던 성경책을 자신을 죽인 사람을 위해서 주었다. 그는 그렇게 순교했다. 그리고 그 성경책을 받아든 그 사람은 훗날 그 성경책을 읽고 예수를 믿고 교회의 영수(지금의 장로)가 되었다.

  토마스라는 젊은 선교사의 피 값 위에 한국교회는 세워졌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수많은 선교사의 눈물과 땀과 피 값 위에 한국교회가 세워졌다. 엄청난 희생위에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평안과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양화진에 한 번 가보라. 거기에는 수많은 비석들이 있다. 이름 없는 비석들도 있다. 거기에는 무지몽매했던 한국을 위해서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던 선교사, 선교사의 아내, 선교사의 자녀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자기의 나라, 자기의 고향에서 태어나고 자라났으면 좋은 의료 시설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을 그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척박한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다가 여러 가지 질병에 걸려 병원에 가지 못했다. 영국, 미국 자기 나라에 살았다면 병원에 가서 한 번만 좋은 약 먹기만 하면 살았을 사람들이 열악한 한국에서 선교하다가 자기의 아내가, 자기의 자녀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 선교사들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보라.

  신대원에 다닐 때 저는 그 곳에 가 보았는데 그 곳은 너무나 초라했다. 그나마 잘 꾸며놓은 것이 그 정도라고 했다. 우리나라와 한국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생애를 다 드린 그 사람들의 희생에 비하면 우리가 그들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우리가 여름수련회 때 가 볼 천진암을 봐라. 거기에는 천주교를 맨 처음에 공부했던 몇 사람의 무덤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곳에 앞으로 백년을 생각하면서 큰 기념관을 지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복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까지 희생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 기독교의 관심과 감사는 너무나 작은 것은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는 희생은 사실 희생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치르신 희생에 비하면 내가 전도를 위해서 나의 것 얼마를 드리는 이 희생은 너무나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나는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희생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희생이 아님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으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은 우리의 모든 수고를 기억하시고 우리에게 큰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일평생 선교하다가 생을 마친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 리빙스턴이 있다. 그는 16년 동안 밀림에서 선교하다가 잠시 자기의 조국 영국에 들렀다. 수 십 번의 말라리아에 걸려 제대로 회복되지 않는 몸이었다. 사자에 물린 한 쪽 어깨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몸을 이끌고 왔다. 그는 그런 모습으로 캠브리지 대학에서 이렇게 설교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아프리카에 들어가 그 곳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그 일로 인해서 하루도 기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사람들은 내가 그 곳에서 많은 희생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말하지만 내가 한 것은 도무지 갚을 길 없는 하나님의 희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장차 영광스런 상급을 나에게 약속했는데 어찌 그것이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버리라. 그것은 절대로 희생이 아니라 특권이다.”

  선교에는 희생이 따른다. 전도에는 희생이 따른다.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동안 전도하고 선교하다가 조금만 어려움을 당해도 이상한 눈초리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비난이 있다고, 욕이 돌아온다고, 핍박이 온다고 그들의 영생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의 손이 내려와서는 안 된다. 나를 기분 나쁘게 하고, 자존심 상하게 한다고 그들을 찾아가는 나의 발걸음을 끊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은 선교도, 전도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 희생이 희생이 아님을 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그 전도를 위해서 하는 나의 작은 수고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큰 상급으로 갚아주시겠다고 했다.

앞에서 보았던 영화 미션의 테마 곡처럼 “우리는 땅에서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지만 고난을 당하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하늘에 있는 것”임을 기억하라.
(이 양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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