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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친자는 기도의 물가로 (막 9: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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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년 전에 시골 교회에서 학생들을 지도할 때의 일이다. 그 학생가운데서 간질병에 걸린 한 여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의 오빠는 저와 친구였습니다. 그 학생의 아름은 늘 그것이었다. “갑자기 쓰려져서 5-10분 동안 입에 거품을 물고 발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이후에 보면 너무 너무 창피하다는 것이었다. 자기가 왜 이렇게 쓰러져 있는지...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주위에 몰려 있는지를 깨닫는 순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 듯하다.”

그래서 그 학생은 예배가 끝나도 집에 가지 않고 늦게까지 교회에 남아서 교회 땅바닥에 엎드려서 울면서 기도했고, 교사인 나도 그를 위해 기도해주곤 했었다.

후에 그 여학생은 시집갔고 잘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부모에게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 부모는 그 학생보다 더 가슴아파했을 것이다.

오늘 성경에는 귀신 들린 자녀를 든 아버지가 나온다. 앞에서 말했던 그 여학생과 부모는  병에 걸린 정도가 이 정도라면 귀신들린 아이와 그것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부모의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오늘 본문에는 귀신들린 아이를 가진 아버지의 아픔이 묻어 있다.

  귀신에 들려서 아이가 넘어지고, 거품을 흘리면서 쓰러져서 정신을 잃고, 물에 뛰어들고, 불에 뛰어들고, 자기 몸을 자해하는 그 아이보다는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아야만 하는 부모(아버지)의 심정은 정말 참담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오지만 예수님은 못 만나고 예수님의 제자들만 만난다. (예수님은 그 때 변화산에 세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가셨다)

  아버지는 너무나 절실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아이를 고쳐달라고 간청한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 오실 때가 됐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고칠 수 있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지요.” 이렇게 말하지 ×.  그들은 건방지게 며칠 전의 경험으로 이리 데려오라고 한다.

왜 제가 여기에서 ‘건방지다’고, ‘며칠 전의 경험’을 얘기했을까?

(막 6:7-13)에 보면, 예수님은 12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능력을 부어주신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받아가지고 이적을 행한다. 구신을 내쫓고 병자를 고친다.

그들이 돌아와 자랑하며 보고할 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귀신이 네게 순종했다고 기뻐하지 말고, 이적을 행했다고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인해 기뻐하라.”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뜻일 것이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심부름하는 사람들이다. 너희는 능력을 행하는 자(능력자)가 아니다. 다만 고용되었을 뿐이다. 하나님의 능력에 다만 고용된 것뿐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리어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일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기뻐해라.”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어떤 제자는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물러가라!” 했을 것이다. 다른 제자는 “가만있어라. 나사렛 이란 이름이 빠져서 그런가 보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그래도 안 나간다.

  또 다른 제자는 “이상하다. 명령이 잘못인가?” 이러면서 아무리 사람을 바꿔가며 해봐도 역시 실패한다. 제자들은 당황한다. 우왕좌왕한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신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며칠 전 그들은 병자고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도 행했다. 그들에겐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예수님께 믿음 없다고 책망을 듣고 있는가?

다시 (막 6:8)로 가보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말씀하신다.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이렇다. “너희들이 파송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할 텐데 그때 양식, 돈 그런 것 의지하지 마라. 내가 오늘 너희들을 모내며 축복하며 기도한다. 일 할 때 너희 힘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해라. 너희 자신이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부어주는 이 능력으로 너희들은 도구로 쓰임을 잊지 말라.”

  그런데 제자들은 마치 자신이 능력의 생산자인 것처럼 믿음을 만들어 내는 자들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는 줄 알았건만, 믿음이 없었다!”

  여러분! 나에게 믿음이 있는가? 나의 믿음은 어느 정도인가?

  어느 정도의 믿음을 유지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저는 그것을 아주 오래 전에 깨달았다.

  새파란 교육전도사 시절 설교를 했는데 성도들이 “오늘 설교 참 좋았습니다.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착각하기를 “나는 설교의 은사가 있나보다.”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담임 목사님이 안 계셔서 2달 정도를 당회와 주일 낮 예배 이외에는 모든 순서를 담당한 적이 있었다. 6번의 새벽기도회, 중고등부, 주일찬양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 심방설교까지... 일주일에 12번의 설교를 했다.

그런데 설교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인간의 지혜로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너무 많은 설교를 하다 보니 묵상할 시간이 없었다.-영감과 통찰력이 부도날 지경.
그래서 저는 목사님이 설교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 많은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존경하기로 했다.

  그러므로 목사인 제가 설교를 죽 쑤면 “그만 좀 쑤시지요. 제발 밥을 주세요. 우리에게 밥을 달라. 밥을 먹다 지쳐 잠이 들면 축복을 주리니....” 이러지 말고 “목사님 보시기에 오늘 내가 환자같이 보였나보네. 목사님 죽 써서 빨리 주세요.”이렇게 생각해라.

내게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믿음이 없다. 어느 사이에 믿음이 다 빠져 나가 있더라는 말이다.

  오늘 나는 능력이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능력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가? 우리는 능력 있는 믿음의 삶을 걸어가고 있는가? 한 번 시험해 보라.

  예를 들면 주일에 중요한 약속이 있다. 나는 주일을 빼먹는 것을 감행할 것인가?

  중환자실에 나의 가족이 들어갔다. 나는 여전한 마음으로 기도할 것인가?

  다른 사람에게 억울한 말을 들었다. 나는 고요한 마음을 지킬 수 있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 책망하신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우리는 믿음 없는 세대 속에서 믿음 없는 것이 체질화되어 버렸다. 믿음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한다. (28절)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제자들의 이 질문은 “얼마 전에는 됐는데, 얼마 전에는 능력도 행하고 믿음도 있었는데 오늘은 왜 안 됩니까?” 이런 뜻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신다. (29절)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기도만이 해답이요, 기도만이 열쇠이다.”

  “어제까지 기도했다고 해도 오늘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제 기도해서 능력을 행했다고 오늘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나 날마다 기도할 뿐이다.”

  단기선교 때 우리 청년 하나가 “치질”로 고생했다. 그런데 사역할 때는 괜찮고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다시 심해진다. 그러면 청년들이 기도하면 또 그 다음날 아침에는 괜찮다. 그러자 고백하더라. “하나님은 내게 하루 일할 만큼의 힘밖에 주시지 않은 것 같다.” 저는 그 말에 참 많은 위로와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가 생각났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왜 주님은 한 달이 아닌, 일 년이 아닌, 하루하루의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을까? 내가 그렇게 연약한 존재임을 깨달으며 살라고, 하나님이 붙들지 않으면 하루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하고 연약한 것이 사람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오늘 우리에게 왜 능력이 없는가? 왜 믿음이 없는가?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기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 없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계속적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은 지속할 수 없다. 믿음 있다고 큰 소리 치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믿음은 기도와 함께 하는 것. 우리는 언제나 기도의 줄이 하나님과 닿아 있어야 한다. 

  기도의 영성 신학자 엔드류 머레이는 “기도를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비법은 그것은 내가 기도하는 것” 기도하지 않고는 기도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이론이나 참고 서적이 나를 기도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기도에 대한 체험을 듣는다고 해서 내가 기도의 신령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기도해야만 기도를 알게 되고, 내가 기도를 체험할 때에만 내가 기도를 배운다.  어떤 분은 “꼭 교회 나와서만 기도해야 하느냐? 꼭 새벽기도, 철야기도 가야하느냐?”라고 말한다. 이 물음은 내게 “아무데서나 기도해도 되고, 앉아서 기도해도 되고, 누워서 기도해도 된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러나 집에서 기도해봤는가? TV 소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  누워서, 이불 속에서 기도해 봤는가? 비몽사몽, 몽롱한 정신, 자는지 깨는지....

무엇을 말해 주는가? 기도는 일어나 세수하고, 옷을 입고, 성전에서 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에 대한 생각을 처음부터 바르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기도가 5분, 아니 1분을 하더라도 진실한 기도가 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기도 외에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

왜 제자들은 시험에 빠졌는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는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도 없이는 믿음이 없고, 믿음 없이는 능력이 없다.

  저는 교회를 새롭게 하실 때마다 온 교회로 하여금 기도를 시키는 것을 경험했다. 목회자가 안 계실 때마다, 교회가 큰 어려움에 빠질 때마다 하나님은 기도의 훈련을 시키시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그 어려움, 아픔, 큰 일, 선택의 기로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들이 기도하기를 원한다. 나는 이 번 일을 통해서 이 교회를 기도하는 교회로 만들기를 원한다. 나는 이 문제를 통해서 어린이들로부터 장년까지 간절히 기도하는 너희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기도함으로 능력을 부어주실 주님을 바라보았다. 

  예수님은 기도로 시작했다. (공생애를 시작할 때 광야에서 40일 동안 기도했다)

예수님은 기도로 사셨고,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도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다 이루었다”는 기도의 응답을 받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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