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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흔적 (갈 6: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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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 6: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1. 세상의 환경은 사람들에게 흔적을 남기는 괴로움으로 다가온다.

인간에게는 다양한 종류의 흔적이 있습니다. 육체에 새겨진 각종 상처의 흔적들, 수술의 흔적들, 노화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각종 환경과 인간관계로부터 새겨진 마음의 상한 심령의 흔적들도 있습니다. 영적인 방황과 혼돈 속에서 새겨진 영혼의 흔적들도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환경들은 우리에게 이러한 흔적들을 남깁니다. 어떤 흔적은 우리의 기쁨이고, 또 어떤 흔적은 우리의 슬픔입니다. 어떤 흔적은 시간이 흐르며 사라지기도 하지만 어떤 흔적은 일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남아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존재들은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자신의 흔적을 남깁니다. 흔적은 그 흔적을 만든 자와 흔적을 입은 자 사이의 관계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바람이 지나간 흔적, 홍수가 휩쓸고 간 흔적, 사람이 지나간 흔적, 인간의 대화가 남긴 흔적, 가정의 곤고함이 남긴 흔적, 각종 시험에 성공하거나 실패한 흔적, 연애의 성공과 실패의 흔적, 질병으로 고생한 흔적 등 흔적의 종류는 다양할지라도 그 흔적을 통해 흔적을 만든 자와 흔적을 입은 자 사이의 관계 알게 됩니다.

흔적은 그들의 관계가 깨어진 관계인지, 회복된 관계인지 알려줍니다. 온전한 관계 속에 형성된 흔적들은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는 힘과 능력을 줍니다. 반면에 깨어진 관계 속에서 형성된 흔적들은 수시로 그의 인생을 좌절과 분노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그 큰 예로서, 이 땅에 홀로 남겨진 고아일지라도 부모님의 사랑의 흔적으로 세상을 이기며 사는 수많은 후손들이 있지만, 반면에 호의호식하는 사람일지라도 부모님이 안겨준 상처로 인해 평생토록 곤고한 상태에서 허덕이는 후손들도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인생에 남겨진 흔적들은 우리의 인생을 관계지향적인 인생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므로 흔적을 다루고 처리하는 방식이 온전하지 못하면 자유와 평강을 누리는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환경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에게 흔적을 남깁니다. 그 흔적이 사랑의 흔적이든, 분노의 흔적이든 우리의 몸과 마음에 새겨질 때는 고통이 수반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괴로움입니다. 흔적이 가져올 괴로움이 싫어서 모든 흔적을 피한다면 그는 어떤 환경도 이길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실 때 처음부터 변하지 않는 흔적을 만드셨습니다. 창 17:10-11에 보면,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의 할례 받은 몸은 하나님과 유대인 사이의 언약의 관계를 나타내는 육체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흔적을 만드는 과정은 괴로움이지만 자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흔적이 자랑스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역사이래로 육체의 흔적들은 인간의 고통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나타난 육체의 흔적은 “낙인(烙印)”입니다. 낙인은 “쇠붙이로 만들어 불에 달구어 찍는 도장”입니다. 본래 목재나 기구, 가축 따위에 주로 찍는 것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인간들에게도 무수히 사용되었습니다. 노예들 중에서 도주 우려가 있는 악한 노예들에게 낙인을 찍었습니다. 전쟁 포로들이나 죄인들에게도 낙인을 찍었습니다. 인간에게 찍힌 낙인은 슬픈 역사입니다.

할례와 낙인 모두 육체의 흔적이지만 그 흔적들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정 반대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의 흔적으로 인해 세상의 어떤 고난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예들의 낙인은 평생토록 인생의 좌절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사랑의 흔적과 원수의 흔적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주님과 동행했던 흔적과 사단의 유혹에 넘어갔던 흔적도 이와 같습니다. 어떤 흔적은 힘과 능력을 공급하는 흔적이지만 어떤 흔적은 좌절과 분노를 일으키는 흔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 흔적들을 처리하는 능력과 방법이 요구됩니다. 그 흔적 처리의 방법에 따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흔적을 남기려는 수많은 도전들을 온전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다양한 환경 속에서 흔적들의 더미 속에 파묻혀 괴로워하는 인생이 아니라, 그 모든 흔적들을 처리하며 다룰 수 있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흔적을 남기며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수많은 환경들이 우리에게 안겨주려는 각종 괴로움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참된 자유인이 됩니다.

2. 성도들에게는 어떤 괴로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예수의 흔적이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의 영적인 흔들림을 그들이 바울에게 흔적을 만드는 괴로움의 일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갈 6:17 전반절에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이후로는 내게 아무도 고통들을 주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명령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 바울 자신이 힘든 상태에 있는데 왜 너희들까지 나를 힘들게 하느냐?”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또는 갈 6:17의 후반절인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는 말씀까지 도입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세상에서 받은 고통의 흔적들도 많은데, 교회 안에서 너희들까지도 나에게 그러한 괴로움을 주느냐?”라는 부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갈라디아서 6장의 전체적인 흐름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갈 6:14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바울의 고백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라는 명령은 “아무도” 사도 바울과 바울이 전한 참된 복음에 대해서 헛된 도전을 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바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성도들과 그들을 유혹하는 율법주의자들을 위한 경고입니다.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 논증한 것처럼 율법주의자들의 수고가 헛수고였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의 잠시의 흔들림도 헛수고였습니다. 그러므로 외모와 율법을 통해 갈라디아 성도들을 흔들어 대는 일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서 “누구든지 말라”란 “아무도 말라”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나 예루살렘에서 파송되어 온 율법주의자들이나 그 누구도 바울에게 흔적을 남기려고 시도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율법주의로 남기려는 어떤 흔적에 대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사도입니다. 그들이 어떤 종류의 괴롭힘을 통해서 흔적을 남기더라도 변할 수 없는 진리의 증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바울에게 흔적을 남기려고 바울을 괴롭게 하는 것은 그들의 헛수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 있게 선포하며 경고하는 이유는, 바울에게 이미 세상의 어떤 괴로움도, 어떤 흔적도 감당할 수 없는 최고의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흔적에 대해 갈 6:17 후반절에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고 선포합니다. 그 흔적은 “예수의 흔적”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예수의 흔적”입니다. 그 어떤 대적도 무너트릴 수 없는 “예수의 흔적”입니다. 할례와 율법이나 안식일 등 어떤 외모를 이용하여 흔들어대도 요동치지 않는 최고의 흔적이 “예수의 흔적”입니다.

바울에게 “예수의 흔적”이 있는 한 바울은 괴롭힘을 당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흔적이 바울의 일생을 흔들 수 없습니다. 새로운 흔적이 바울이 전한 참된 복음을 변질시킬 수 없습니다. 새로운 흔적이 참된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유와 평강을 누리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무너트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흔적을 만들기 위해 바울에게 다가오는 어떤 괴로움도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바울을 괴롭게 하려는 그들만 헛수고를 하며 더욱 힘든 인생 가운데 빠질 뿐입니다.

이처럼 바울의 영원한 힘과 권능으로서, 바울을 견고하게 세워주는 “예수의 흔적”은 바울의 고백과 각종 서신 속에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흔적은 바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흔적입니다. 바울의 죄악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신 고통의 흔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바울을 위해 십자가에 달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세상 가운데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사도로서의 사역 가운데 나타나는 수많은 흔적입니다.

바울은 이 흔적들을 자신의 몸에 “가졌노라”라고 표현합니다. “가졌노라(바스타조)”라는 단어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의 표현으로서, “내가 나르고 있다. 내가 짊어지고 있다. 내가 견디고 있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갈6:17의 후반절을 직역하면, “내가 나의 그 몸 안에 그 예수의 그 흔적들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이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 안에 예수의 흔적들을 지고 있습니다. 고후 11:23-27에는 바울의 육체에 남겨진 수많은 흔적들을 증거합니다.

옥에 갇힌 흔적, 매 맞아 죽을 뻔한 흔적,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은 흔적,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여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낸 흔적,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한 흔적,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은 흔적 등 다양한 수많은 흔적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로 인해 바울의 육체에 남겨진 이 흔적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이기는 흔적입니다.

3. 성도들의 예수의 흔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근원이다.

여기서 “흔적”으로 표현된 단어인 “스티그마타”라는 헬라어는 성경 중 이곳에 단 한 번만 나타나는 단어로서 앞서 설명한 “낙인”과 같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자신에게 낙인처럼 찍힌 그 흔적을 언제나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 흔적을 기억할 때마다 세상 가운데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대적들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지 않으며, 견고할 수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의 집단적인 의심과 흔들림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 4:10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 죽인 것”의 흔적은 사단의 모든 정죄를 물리치는 흔적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언제나 생명을 소유한 자로 나설 수 있는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이 흔적은 바울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감사하며 찬양드릴 수 있는 원천이 되는 흔적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오직 믿음으로만 이 흔적을 지녔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이 흔적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흔적을 통해 자신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갈 6:18에서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갈라디아 성도들을 축복하며 서신을 마칩니다. 바울의 심령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을 통해 은혜를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서 갈라디아 성도들의 심령에도 동일한 흔적을 남기시기 원하며, 그 흔적을 통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원하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 마지막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도 할례라는 흔적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수천 년의 세월을 이겨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에 만들어 주신 흔적은 우리의 영원한 인생을 견고하게 세워주는 흔적입니다. 육체의 흔적이 따라올 수 없는 우리 영혼의 흔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영혼에 두신 십자가 고난의 흔적은 세상 어떤 고난도 흔들 수 없는 흔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영혼에 두신 사랑의 흔적은 세상의 그 어떤 원수라도 무너트릴 수 없는 흔적입니다.

지금도 복음전파를 위해 내 마음에 남겨지는 흔적들은 영원한 천국을 소망 가운데 바라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흔적입니다. 예수의 흔적은 세상 어떤 환경이 가하는 괴로움도 녹여내는 흔적입니다. 과거에 내 마음에 쌓였던 수많은 종류의 흔적들을 처리해 내는 사랑과 용서의 흔적입니다. 오늘날 만나는 수많은 환경 가운데 다가오는 대적들과 고난을 이겨내는 힘과 권세를 주는 흔적입니다. 내 마음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은 요동치는 세상에서 견고한 자유와 평강을 주는 흔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예수의 흔적을 그 몸에 지닌 자들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있는 예수의 흔적은 우리의 인생을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괴롭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환경들을 변화시켜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되돌려 줄 수 있게 합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흔적을 남기기 위해 우리를 괴롭게 하려는 자들을 축복할 수 있게 합니다. “예수의 흔적”은 그리스도인의 자랑스런 흔적이며, 위대한 능력을 나타내는 흔적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있는 그 흔적을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바울이 그 흔적을 힘입어 세상을 이기며 사는 능력을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 흔적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과거의 상처받은 흔적들을 매어 살고 있지 않습니까? 환경에 따라 변해버리기 쉬운 인간적이며 육체적인 흔적을 따라 살지 않습니까? 그러한 흔적을 따라 사는 삶은 괴롭힘을 당하는 삶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따라 사는 삶만이 세상을 이기는 참된 자유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괴롭게 하려는 세상의 모든 환경을 예수의 흔적을 통해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흔적들은 그것들을 두려워하게 하며 상한 감정을 폭발시킵니다. 그러나 예수의 흔적은 그것들을 사랑하게 합니다. 그것들을 용서하게 합니다. 그것들을 위해 축복하게 합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며 다가올지라도 그들의 헛수고를 보며 불쌍히 여기게 합니다. 오히려 그들의 심령을 축복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흔적은 우리들이 누리는 은혜의 근원이며, 우리의 자랑입니다. 바울이 자랑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심령 가운데 “예수의 흔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십자가 고난의 흔적, 사망의 흔적, 사랑의 흔적, 복음전파 사역의 핍박받은 흔적 등 모든 예수의 흔적은 세상을 이기며 견고히 서는 그리스도인의 보루입니다. 세상의 유리하며 방황하는 심령들을 구원하는 신분을 지닌 자들의 위대한 낙인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가는 곳마다 “예수의 흔적의 낙인”을 제시해야 합니다. ( 김  종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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