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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고전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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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임금 다음으로 명성을 떨친 웃시야(783-724 B.C.E.) 왕의 오랜 치세 아래 유다의 국력은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웃시야는 군사력과 아울러 나라의 경제력도 크게 신장시켰습니다. 그는 불레셋 족과 아라비아 족을 정복하였고 암몬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으며 전 국토를 요새화 하였고 군대를 재편성하였습니다. “전군에 방패, 창, 투구, 갑옷, 활, 물매를 마련해 주었고 활을 쏘고 큰 돌을 던지는 무기를 기술자에게 고안시켜서 예루살렘 성 망대들과 성 귀퉁이마다에 설치해 놓게 하였습니다.”(역대기하 26:14,15). 그는 왕으로서, 행정가로서, 군의 총사령관으로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여 왕국 분열 이래 유다의 국토를 가장 넓게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능력이 곧 그의 약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교만 방자해져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인 제단의 분향을 자기 손으로 하고자 했습니다. 대사사장 아사랴와 ‘용감한’ 제사장 팔십 명이 뒤따라 들어가 웃시야 왕을 가로막고 말하였습니다.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일이 아닙니다. 분향하는 일은 선별된 아론의 후손 제사장들이 할 일입니다. 이 성소에서 나가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셨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왕을 떠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웃시야는 화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화를 내는 사이에 문둥병이 그의 이마에 번졌습니다. 그리하여 웃시야 왕은 문둥병자로 여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몸이 되었으므로 별궁에서 홀로 문둥병을 앓으며 지내야 했습니다(역대기하 26:18-21). 웃시야 왕은 교만 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행동으로 교만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오만한 자더러 오만히 행치말라 하며 행악자더러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4~7)합니다.

  남 유다 13대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의 큰 나라 산헤립 왕이 군대 장관을 시켜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와서 예루살렘을 다 포위한 후, 남 유다의 항복을 받으려고 히스기야 왕을 위협하였습니다. 산헤립 왕은 히스기야 왕에게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 열국의 모든 신 중에 누가 그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능히 건지겠느냐”(왕하 18:31~35)라고 편지했습니다. 산헤립 왕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모독하고 남 유다에게 계속해서 항복하라고 외쳤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산헤립 왕의 편지를 받고 하나님 앞에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편지를 펼쳐 놓고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밤중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앗수르의 진에서 군사 18만 5천명을 쳤습니다. 결국 산헤립 왕은 전쟁에 패하고 고국으로 돌아갔으나,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앗수르의 큰 나라 산헤립의 왕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만했을 때,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교만하고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들 중에 역사적으로 끝까지 성공한 사람이 없습니다. 히틀러도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리고 전쟁을 일으킨 많은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멸망과 심판을 당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 헤롯왕이 교만해졌습니다. 백성들이 헤롯왕을 보고 큰 소리로 그를 찬미하자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충이 먹어서 죽었음을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행12:22~23)고 합니다. 행동으로 교만치 말아야 합니다.

  마음 중심에 교만이 있다 합니다.

(옵 1:3) 바위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합니다.

자만심으로 툭 튀어나온 부풀림의 상태가 교만입니다.

15세기의 설교자 중에 사보나 롤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카톨릭 세계였으니까 성당에, 어느 날 아침에 산책을 하다 보니까 거기에 마리아 상이 있었는데 마리아 상 앞에 어떤, 꽤 나이 가 들어 보이는 부인 하나가 경건한 모습으로 참배를 하면서 아주 진지하게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이튿날 산책을 하다 보니까 똑 같은 시간에 그 부인이 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봄, 여름, 가을, 겨울 한결같이 같은 시각에 와서 마리아상 앞에 참배하는 이 부인을 보았습니다.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주 신앙심이 귀한 분이로구나. 어느 날 이 사보나 롤라가 자기 동료 사제를 산책을 하다가 만나서 그 부인을 가리키면서 여보게 내가 저 부인을 가만히 관찰해 보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함이 없소.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폭풍우가 몰아치나 꼭 같은 시간에 와서 저렇게 기도를 한단 말이야. 참 신앙심이 유별하지? 그랬더니 옆에 있던 사제가 껄껄 거리면서 웃는 것입니다. 자네 모르는구만. 그래서 뭘 모르나? 그랬더니 자네 마리아상 이야기 모르나? 무슨 이야기? 옛날에 이 성당에 이 마리아상을 처음 조각할 때, 그 조각가에게 위임을 했을 때 그 대상, 모델을 찾았을 때 그 모델로 선정된 사람이 바로 저 부인이 처녀시절에 저 부인이 뽑혔다네. 그래서 저 여인을 모델로 해서 마리아상을 만들어 놓은 이후로 그 다음 이튿날부터 출근해서 지금까지 빠진 일이 없다네. 하고 일러 줍니다.

그 부인은 자기를 숭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인은 거기서 자기 얼굴을 보고 자기를 즐기고 자기를 숭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뿌리입니다. 사단은 에덴동산 처음 사람 아담에게 찾아와서 첫 번째 유혹을 이렇게 던졌습니다.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네가 하나님이 될 수가 있다. 교만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절대화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절대화한다든지 혹은 나의 주장을 절대화시킬 때 바로 이것이 교만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범죄하는 인간은 항상 잘못 될 수 있습니다. 겸손히 자기를 상대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주장을 절대화시키는 그런 이기심의 극단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바로 이런 극단적인 자기중심의 죄악인 것입니다.

  자랑과 교만은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기를 드러내려 하고, 자아의 의식이 강하다는 면에서 비슷합니다. 그러나 다른 면도 있습니다. 즉, 자랑은 자기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것에 반해 교만은 타인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교만한 자들은 주위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결과만이 아니라 거기에다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다툼과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교만한 자들은 한 생명의 소중함과 인격의 절대적인 가치를 모르므로 이웃을 매우 가볍게 취급합니다. 이웃이 상처를 입는다든지 모욕적인 감정을 느낀다든지 하는 점들을 전혀 고려치 않고 쉽게 이웃을 무시하는 말을  내뱉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그는 어느 날 학교에서 받아온 성적표를 아버지께 보여드렸습니다. 아들의 성적표를 받아든 이 아버지는 왜 이렇게 (미) 밖에 없느냐며 공부가 시원찮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열심히 공부를 하여 이번에는 모두 (우)를 받아가지고 아버지께 보여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버지가 하는 말이 왜 (수)는 없냐는  것입니다. 끝까지 아버지의 칭찬을 받아보고 싶은 이 아이는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여 이번에는 전 과목이 (수)인 성적표를 갖다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아버지의 말인즉 "요즈음 선생들은 성적을 되는 대로 주더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그 자리에서 크게 실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교만한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아버지의 사랑, 자식에게 자기 자랑을 앞세우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다면 이러한 사랑은 자식에게 통하지도 않거니와 반갑지도 않습니다. 그 때문에 부모들이 어쩌다 무엇을 가르친다고 "그것도 모르냐?"며 쥐어박고 구박을 할 때면 아이들이 속으로는 "나도 크면 알아요, 무얼 좀 아신다고 재요?"하고 나온답니다. 무슨 일에서나 자기 사랑이 앞서는 동안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말로는 자식을 위함이라고 하지만 보다 먼저 자기 자랑이 앞서 있기 때문에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사랑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성도들은 한 생명의 소중성을 그리고 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자세를  가집니다.  그래서 늘 겸손하고 정중한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친절히 대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언 18장 12절)"

어느 날 두 마리의 수탉이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마리의 암탉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하는 싸움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혈투를 했습니다. 말리는 사람도 없는 터라 그 닭은 날개를 퍼덕이며 날카로운 부리로 상대방을 쪼아서 서로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흰 닭이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툇마루 밑으로 슬금슬금 도망쳤습니다. 싸움에서 이긴 검정 닭은 우쭐해졌습니다. 그는 울타리 위로 올라가서 목청을 높여 크게 외쳤습니다. "어때? 누구든지 나를 이길 수는 없을 거다. 앞으로 내 암탉들에게 손을 대면 그냥 두지 않을 테야. 너도 다시 그 툇마루 밑에서 나오면 혼을 내줄 거야." 바로 그때였습니다. 가까운 산으로부터 한 마리의 매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내려왔습니다. "앗" 검정 수탉은 소리쳤으나 피할 틈이 없었습니다. 매는 검정 닭을 발톱으로 단단히 움켜쥐고 쏜살같이 올라갔습니다. "싸움에 이겼다고 뽐내지마...." 매는 중얼거리며 하늘 높이 올라갔습니다. 툇마루 밑에서 나온 흰 수탉은 그 꼴을 보고 암탉들에게 눈웃음을 보냈습니다.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지 모르는 법이지."(디럭스바이블-교만의 대가)

  미국의 로버트 케네디(J. F 케네디의 동생)의 인기가 한창 높았을 때의 일입니다. 그가 건강한 모습을 자랑하기 위해 스키장의 눈 위에 상의를 벗고 누운 것을 사진 찍었습니다. 그리고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자녀가 몇 명입니까? 열 하나입니다. 어떻게 그다지도 많은 아이들을 가지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로버트 케네디의 대답이 라이프 지에 기사로 실렸는데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같이 우수한 종자는 후손을 많이 퍼뜨려야 합니다.  인간으로서 누가 감히 이러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따위 자랑을 하나님께서는 허락지 않으십니다. 로버트 케네디의 최후를 보면 그러한 기사가 실린 지 얼마 후 그는 유언 한 마디 못 남기고 비명횡사를 당했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는 한 교만은 사라지고 녹아 없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9절에서 사랑엔 거짓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참 사랑이 있는 곳엔 교만의 허세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사랑하기에 그 사랑 앞에서는 겸손해지고 어느 사이에 진실해진다는 말입니다. 사랑에는 교만이 머물 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겸손하게 낮추십시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겸손이란 단순한 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할 때에 천국이 있고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은 스스로를 감옥으로, 지옥으로 빠뜨리는 것입니다. 마음 속 뿌리 깊은 곳에 존재하는 교만을 극복하고 겸허하게 이웃 앞에 설 수 있는 처방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추한 죄를 짊어지고 몸부림치며 신음하며 피 흘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죄에서 해방시키고, 참 자유와 사랑의 자녀로 삼으시려고,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죄인으로 매달려 고통 받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람마다 주님께 드리는 진실한 첫 사랑의 고백이 있습니다.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지닌 것은 죄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시오니 주여 이제 나의 자랑은 주님밖에 없사옵나이다. "  이 사랑을 참으로 체험한 사람은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은 자를 낮은 곳으로 떨어뜨리며, 스스로 겸손한 자를 높이 올린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중국의 양자라는 사람이 송나라에서 여행을 하면서 어느 주막집에 들렀더니 그 집 주인에게는 두 여자가 있는데 한 여인은 미인이고 다른 한 여인은 못생겼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상하게도 이 주인은 그 두 여자 중에서 잘생긴 여자를 향해서는 외면을 하면서 못 생긴 여자는 극진히 사랑해 주더랍니다. 그래서 이 양자라고 하는 양반이 주막집 주인에게  "내가 보기에는 미인이고 매력적인 여자는 이쪽인데 이 여자는 사랑하지 않고 당신은 왜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하시오?"라며 물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주인의  대답인 즉 " 저 잘 생긴 여자는 잘 생겼다는 그것 때문에 너무 교만하여 코가 높아져서  내 눈에는 그 잘 생긴 것이 보이지를 않고 이 못 생긴 여자는 자기가 못 생겼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겸손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그 못 생긴 것이 눈에 보이지를 않는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주인의 대답은 참으로 명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 앞에서는 잘 생기고 못 생기고, 머리 회전이 빠르고 느리고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이든 사랑을 받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치과병원장인 유영호 성도님의 간증입니다. 그가 춘천에 치과병원을 개업했는데, 경력, 학력, 실력이 있으니 병원이 날로 번성하여 건물을 사들이고 병원을 확장하는 등 물질적인 여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세상의 즐거움에 빠졌고, 부모님 때문에 억지로 교회를 나가기는 했지만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억지로 다니던 교회도 점점 빠지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멀리하자 갑자기 안면신경이 마비가 되어 진료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심판을 받은 것이라 깨닫고 눈물로 회개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가 신앙을 회복하자 마비되었던 안면신경이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물질을 드리고, 교회에서 봉사도 열심히 하고, 춘천지역 기독의료인회를 조직하여 성경공부도 하고, 농촌 벽지를 다니며 무료 진료활동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춘천지역에서 아주 모범적이고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교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음 중심에 교만 있다 합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겸손히 사랑을 실천하는 모두가 됩시다.
(강 성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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