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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신 3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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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후손들에게 민족의 긍지를 알게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과목입니다. 따라서 역사는 정치적 목적과 관련시켜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일제 강점기와 관련하여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토 주권과 역사 주권을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영토 주권과 역사 주권은 서로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필리핀 우방 섬 밀림 속에서 30년 동안 일본 천황의 철수 명령을 기다리며 은둔 생활을 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일본이 자랑하는 황군 ‘오노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974년 6월에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조국 일본에서 영웅적인 환영을 받으며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습니다. 일본 천황은 아직도 항복하지 아니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하여 36년 동안 식민통치하에 있던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을 기하여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우리는 해방의 성격을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Ⅰ. 정치적인 유린에서 해방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이조 500년의 왕정체제에서 벗어나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도입(導入)되는 일전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을 식민화하여 정치적으로 유린하고 살인과 폭행, 체포와 구금을 일삼았으며 온갖 살인적인 만행을 자행했습니다. 해방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 압박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① 독립운동에 기여한 세력들로는 미국에 있던 이승만 세력을 들수 있고 한독당의 김구 세력과 1944년에 건국동맹이라는 비밀조직을 한 여운영 세력이 있습니다. ② 그 다음으로는 김규식, 김원봉 세력의 민족혁명당이 중국에 있었습니다. ③ 모택동이 있던 중국 연안에 김두봉, 최창익 등이 중심이 된 조선독립동맹이 있었습니다. ④ 조선독립동맹보다 조금 더 좌익계로서 박헌영, 김삼룡, 이주하, 현준혁 등이 조직한 공산주의 재건의 세력이 있었습니다, ⑤ 마지막으로 소련으로 1941년에 넘어간 만주의 빨치산 세력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500-600명 정도 밖에 되지 아니한 군인들이었습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남의 손에 의해 해방이 되었다고 하여 조국의 해방이 너무 빨리 왔다고 탄식하는 김구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일제는 8월 17일을 기해 기독교 지도자와 항일 지도자들을 대거 학살하기 위하여 세부 계획까지 세워 놓았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에 의해 이틀을 앞당긴 8월 15일에 히로이또 일본 천황은 연합군에게 항복하고야 말았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였기 때문에 민족주의자 김구가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생각해보면 해방이 된지 60년이 된 지금에도 민족의 자주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것을 감안할 때 일제 때와는 비록 다르다고 할지라도 조국의 완전한 해방이라고 하기에는 개운치 않은 데가 없지 아니합니다. 이조의 왕정체재와 일본의 직접통치하에서 벗어났다는 차원에서라면 정치적인 해방이라고 해도 이의를 재기하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Ⅱ. 종교적인 핍박에서 해방이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1930년에 있었던 신사참배 강요는 대표적인 박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사참배가 강요될 무렵에는 일본 군대의 세력이 더욱 막강해져서 전 세계를 손아귀에 넣어 보려는 야망에 불타고 있을 때입니다. 신사는 일본의 토착적인 원시종교입니다. 당시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신사참배에 대하여 서로의 입장이 좀 달랐습니다. 친일파 지도자들은 일본이 시키는 대로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온건파 노선을 취하는 자들 중에는 국민의례이기 때문에 신앙양심에 구애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신사참배는 국가적 차원에서 결정해 주어야 한다고 국가에다 책임 소재를 전가하는 기독교 지도자답지 않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신사참배는 학교에서부터 시작하여 교회로 파급되었습니다.

천주교는 당시 독일 이태리 일본 3국의 친선관계 때문에 정치적인 조치로 교황 비오(Pius) 12세의 공식 발표가 있은 후 1932년 5월 26일자로 이미 신사는 국가의식으로 충성과 애국심의 표명이므로 참배해도 좋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성결교는 끝까지 버티어 오다가 1943년 12월 29일 신사참배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감리교는 처음부터 신사참배를 시인하고 당시 총리사 양주삼은 성명서를 통해 신사참배를 반드시 실행할 것을 발표했습니다. 장로교 역시 소하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목사의 이름으로 신사참배 가결에 대한 전격적인 성명서가 발표되었습니다.

당시 평양신학교를 중심한 박형룡, 남궁혁, 이성휘 등은 반대를 고수했습니다. 1934년 주기철 목사가 평양신학교 부흥회에 행한 설교에서 신사참배를 이겨내려면 예수 제자 도마처럼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된다고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의 설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학생들과 지도자들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습니다. 물론 다른 교파의 지도자나 성도들 중에서도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했을지라도 신앙양심에 따라 반대노선을 걸었던 사람들이 없지 아니 했습니다.

군국주의 나라들에게 한국교회는 말할 수 없이 거추장스러운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선교사들을 본국으로 추방시키고 교회의 집회가 있을 때마다 예배 초두에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직설적인 질문으로 신사참배 불응자들을 가려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첫째, 신사참배가 국민의식이냐? 종교의식이냐?
둘째, 천조 대신이 높으냐? 그리스도가 높으냐?
셋째, 국가가 첫째냐? 종교가 첫째냐?를 물은 뒤에 불응자들은 가차 없이 처단했습니다. 1942년 3월에 강제로 전필순 목사를 앞세워 내세사상이 강하게 기록된 모세 오경과 요한계시록을 성경에서 삭제했습니다. 찬송가 역시 같은 이유로 부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1943년 9월부터는 주일 오후 및 야간 집회 수요일 밤 기도회 등을 중지시켰습니다. 교회당은 한 개 면(面)에 한 교회당씩을 두고 나머지 교회당은 군용공장 및 공공단체에서 필요한대로 함부로 사용했습니다. 지도자들은 해외로 망명하거나 산 속에 은둔하면서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한편 죽음을 불사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앙 절개를 지킨 성도들의 대가는 언제 어디서나 죽음 아니면 구금, 체포, 고문이었습니다.

평양북도에서는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신의주의 김희준 전도사, 이광록 집사, 김영룡 집사, 오영은 집사, 김창인 전도사, 심일철 전도사였으며 강계의 고홍봉 목사, 서정환 전도사, 장두희 집사 양대록 집사였고, 의주의 김린희 전도사, 김의흥 전도사, 김기성 전도사, 박신근 집사, 이순실 권사, 이병희 집사였습니다. 정주의 김영락 전도사, 안이숙 선생이었고 영변의 박관준 장로였습니다.
평안남도에서는 주기철 목사를 중심으로 채정민 목사, 김의창 목사, 이주원 전도사, 주기철 목사 부인인 오정모 사모, 방계성 전도사, 오윤선 전도사였습니다. 의주에서 이주해 온 김기성 전도사, 영변에서 이주해 온 박관준 장로였고 해외에서 이주해 온 안이숙 선생, 의주에서 이주해 온 이병희 집사, 함일돈 선교사, 마두원 선교사였습니다.

경상남도에서는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부산에서는 허대선 선교사, 추마전 선교사, 조수옥 전도사, 손명복 전도사, 김묘년 집사, 박경애 집사, 마산에서는 최덕지 전도사, 태매시 선교사, 이찬수 전도사, 이양신 목사였습니다. 함안에서는 이현속 전도사, 거창에 주남선 목사였습니다.
남해 통영에는 최상림 목사, 최덕지 전도사였습니다. 진주에서는 서덕기 선교사, 부어라 선교사, 황계도 선교사, 강문서 장로, 이봉은 권사였습니다. 하동에서는 박성근 목사, 김점룡 전도사였습니다. 창녕 합천에서는 한영원 전도사, 강착주 집사였습니다. 전라남북도에서는 손양원 목사를 중심으로 신사불참배 운동이 세차게 일어났습니다. 만주에서는 한부선 선교사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하얼빈에서는 김윤섭 전도사였고 봉천에서는 박의흠 전도사였습니다. 무순에서는 박인지 집사였고 안동에서는 김경락 전도사를 중심으로 신사불참배 운동이 전개되어 갔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8절에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사참배라는 돌풍으로 이 땅의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을 다루어 보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저울에 무게 있는 성도들도 있었지만 많은 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의 저울에서 함량이 미달되고 말았습니다.

Ⅲ.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가 주는 교훈입니다.

1). 고난을 회피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은 지도자들 간에 좀 달랐습니다.
(1) 신사참배는 하나님의 계명과 신앙 정조를 범하는 죄악이라고 해서 목숨을 걸고 반대 투쟁하는 노선이 있었습니다.
(2)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것이 정당한 줄 알면서도 공직을 사임하고 초야에 묻혀 개인의 신앙지조나 지키겠다는 노선이 있었습니다.
(3) 환란과 고통이 두려운 나머지 마지못해 승인하고 따라가는 노선이 있었습니다.
(4)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라고 하여 신앙의식의 가책 없이 오히려 아부하면서 그대로 시행한 노선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를 무시하고 서울에서는 한강에서 부산에서는 송도 앞바다에서 일본의 귀신 천조대신의 이름으로(미소이 바라이) 다시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신주(神主)가 교회의 비국가적인 것을 씻는다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종을 떼어서 전쟁무기로 자진 헌납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교회의 헌금을 비행기 제조의 헌납금으로 바치기로 했습니다. 1942년 10월 15일자 공출된 교회의 종은 장로교회 것만 1540개로써 그 총액은 119,832원이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고향산천을 등지고 저 멀리 북만주로 피난한 신자를 일본경찰을 앞세우고 와서 고발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기철 목사 가족을 사택에서 끌어내고 문에다가 못을 박고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목사의 팔순 노모를 사택에서 강제로 끌어내었습니다. 지금 이 목사들은 서울장안에서 유력한 목사가 되어 공로목사로 추대 받는 등 아직도 이 하늘 아래 살아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밖에도 일본 경찰에 앞잡이가 되어 천인공로할 죄를 지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2) 고난을 감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1939연초에 이르러 마침내 평북, 평남, 경남, 만주 등지에서 신사불참배 운동이 크게 확산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1) 주기철 목사와 반대운동
주기철 목사는 평남뿐만 아니라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나선 대표적인 사람 중에 한사람입니다. 그는 신사참배 운동이 한국 땅 전역에 태풍의 눈처럼 몰아칠 때 처음부터 굽히지 아니했던 지도자였습니다. 이를테면 베임을 당한 밤나무 상수리나마무의 그루터기인양 한국교회 순결을 유지해준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1936년에 마산문창교회에서 목회를 잘하고 있던 주목사를 고당 조만식 선생이 평양 산정현 교회로 청빙해왔습니다. 당시 평양신학교 교수였던 이성휘 박사는 환영예배 석상에서 우리는 산정현 교회 주목사를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주목사를 환영한다고 했습니다. 신사참배를 강하게 반대하던 주목사가 평양에 왔을 때 평양경찰서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1938년 2월에는 평양신학교 학생이 평북노회장의 식수를 베어버린 사건의 배후자라는 명목으로 검거되기도 했습니다. 1938년 8월에 두 번째로 검거되었습니다. 1939년 8월 20일에는 유재기 목사의 농우회 사건과 관련 있다고 하여 아무 관련 없는 주목사를 검거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경북 의성경찰서에 9개월간 구속하였다가 1940년 2월에 석방하였는데 이것이 세 번째 검거였습니다. 주목사는 손양원 목사와 함께 일본 기독교단 ‘도비다’가 신사참배가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할 때 그 자리에서 반박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이미 순교를 각오한 듯 다섯 가지 기도제목으로 설교를 남겼습니다.

첫째, 죽음을 이기게 하옵소서. 둘째, 장기간 고난을 견디게 하소서. 셋째,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경찰서로부터 설교정지 명령을 받았을 때 하늘로부터 받은 성직을 내놓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1940년 4월 23일 부활주일에 산정현 교회 강제 폐쇄와 함께 파면 당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옥중에서 형언키 어려운 매질과 잔혹한 고문을 당했고 폐와 심장은 날로 약화되어 갔습니다. 1940년 5월에 또다시 구속되었는데 이것이 네 번째 구속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줄곧 옥중에 있다가 1944년 4월 21일 49세의 일기로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드소서.”라는 기도와 함께 옥중에서 운명했습니다.

(2) 이기선 목사와 반대운동
이기선 목사는 평안북도 지방에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앞장선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저항 태도를 확고히 하고 다음과 같은 기본방향을 설정했습니다.
① 신사참배 학교에 자녀들을 입학시키지 말 것
② 신사불참배 운동을 일으켜서 현실교회를 약체화 내지는 해체시킬 것
③ 신사불참배 신자를 규합하여 다른 재단을 육성할 것
이렇게 기본 방향을 설정하고 맹렬히 반대운동을 벌렸습니다. 1940년 초여름에 선동, 국품 공여, 불경 죄, 불온언론 및 치안방해 죄로 구금되었고 6차례나 투옥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되었습니다.

(3) 한상동 목사와 반대운동
북한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이기선 목사였다면 남한에서는 한상동 목사였습니다. 또 이 운동에 남북을 오가면서 교량역할을 한사람이 이인재 전도사였습니다. 한상동 목사는 1938년 10월 24일 “현정부는 정의 및 신의에 위반한 신사참배를 강요하니 오등은 굴하지 말고 이것에 절대로 참배해서는 못쓴 다”라고 신사참배 반대설교를 했습니다. 이듬해 마산문창교회에서 “대탄식”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 후 그는 교회에서 쫓겨나 경남 각지를 돌면서 몇 가지 실행 사항을 주지시켰습니다.
① 신사참배 하는 교회에는 출석하지 아니할 것
② 신사 참배한 목사에게 성례를 받지 아니할 것
③ 신사 참배하는 교회에 십일조나 연보를 아니할 것
④ 교회 출석하지 아니하는 교인들끼리 따로 예배드리면서 항의 할 것 등이었습니다.
1940년 2월 28일 한상동 목사는 이인재 전도사와 함께 전국적으로 불 참배 운동을 확산시키기로 했습니다.

마침내 주기철 목사의 석방기회를 이용하여 그 다음날 채정민 목사 집에서 주기철 목사와 함께 불참배운동 재건안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현 노회 해체 운동에 힘쓸 것을 결의했습니다. 그해 7월 3일 한목사는 마침내 경남도 유치장에 투옥되었고 1941년 7월 10일에는 평양 형무소로 이감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주기철 목사와 옥중상봉하기도 했습니다. 한목사를 심문하는 경찰은 예수 재림 후 천년왕국이 도래한다는 설교는 국가 반란을 꾀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한목사는 5년간의 옥중생활을 회고하면서 “능력의 주님이심을 나는 확실히 체험했다”고 했습니다. 그 후 그는 1974년 1월 고려신학대학 학장 정년퇴직과 함께 고려신학대학 명예학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리고 삼일교회 원로목사로 봉직하는 중에 모든 사람들의 애도 속에 1976년 1월 6일 오전 8시 50분 한상동 목사는 하나님 품으로 갔습니다.

(4) 주남선 목사와 반대운동
경남지방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또 한사람은 주남선 목사입니다. 그는 1940년 7월 16일 거창경찰서에 구금되었고 다음날 진주 경찰서로 압송 구금되었습니다. 1941년 3월 부산경찰서에서 그해 7월 11일에 평양경찰서로 압송되었습니다. 함께 압송된 인물로는 최상럼, 한상동 목사, 이현속 장로, 조수옥 전도사등 5명이었습니다. 평양형무소에서 이들이 투옥되었을 때는 주기철 목사, 최봉석 목사, 방계성 장로, 이인재 전도사, 이광륵 집사, 안이숙 선생이 구금되어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5년간 투옥되어 있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이미 기술된바 있는 이인재 전도사, 최덕지 전도사, 김린회 전도사 등 많은 지도자들이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혹독한 수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참혹한 역사적인 현장을 지면에 다 기록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물줄기를 따라 내려온 단체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앞서간 신앙의 조부들을 생각할 때 송구하고 부끄러울 때가 더 많습니다. 이러한 영예로운 신앙의 물줄기를 따라 제가 갈보리 교회를 맡게 된 것은 열매 없는 부족한 목사에게 휘두르는 체찍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환난을 통하여 참과 거짓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환난을 통과하는 동안 어떤 이들은 먹고 어떤 이들은 잠자고 어떤 이들은 즐기고 어떤 이들은 아무생각 없이 일상생활에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이 땅 한편 구석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온갖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이 왜 고통을 당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안다고 해도 무가치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인 바로 이 사람들을 중심하고 엮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기쁠 때 인간 편에서는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평소보다 칠 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도 오히려 풀무불 밖에서보다 그들은 자유로웠습니다. 환난 날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그 고통 너머에 있는 영광을 생각하고 차라리 고난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익숙한 버릇처럼 자연스러웠습니다.
우리의 신앙조부들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걸어갔던 이 길을 거침없이 갑시다. 가다가 피곤해도 이 길을 갑시다. 긴 약속이 있는 길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거룩하고 경건한 이 길을 가기 위하여 경건을 연습합시다.
-아 멘 -
(강 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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