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여호와의 집에서 (삼상 1:1-8, 딤후 1:3-5, 눅 1:5-7)

  • 잡초 잡초
  • 325
  • 0

첨부 1


1. 우리가 어렸을 때는 저녁이 되면 부모님들이나 어른들이 데리고 앉아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때로는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해서 밤에 바깥에 있는 화장실에도 못 갔던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음날이 되면 또 이야기를 채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내 기억에 생각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옛날에는 꼭 한 사람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마치 공식처럼 "옛날에 한 사람이 살았는데...."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는 옛날에는 한 사람만 산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은 대체로 실화라기 보다는 교훈을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도덕 교과서가 아닙니다. 만일 그런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성경에는 명심보감처럼 금언명구로만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삶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대상으로 어떻게 역사 하셨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처음 성경을 읽는 사람들 가운데는 성경에 왜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느냐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성경에 나오는 그 인간군상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요, 그들을 찾으셔서 만나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성경을 읽을 때 단지 하나의 문학 작품이나 도덕 교과서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게 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 그분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다른 책과 구별되는 특성이요 성경의 성경된 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언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사무엘 상 맨 처음도 역시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먼저 세 곳의 지명과 여섯 명의 사람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막연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의 실존적인 기록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되며 지금도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먼저 엘가나라는 사람을 소개하면서 그와 그 가문의 형통한 여건을 말해 줍니다. 엘가나는 에브라임 사람입니다. 에브라임은 가나안 땅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옥하고, 아름답고, 자원이 풍부한 곳입니다. 신33:13-14에 보면 에브라임은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 저장한 물과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이 풍부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옛 사람들은 흔히 "천(天), 지(地), 인(人)"을 인간 삶의 삼 요소로 꼽았습니다. 그래서 천시(天時), 지리(地理), 인화(人和)라고 했습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엘가나가 좋은 지역에 태어나서 살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엘가나는 훌륭한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안동 사람들은 입만 열면 조상자랑을 많이 합니다. 그렇듯이 오늘 본문에도 보면 맨 앞에 엘가나의 조상 4대가 나옵니다. 아버지 여로함, 할아버지 엘리후, 증조 할아버지 도후, 고조 할아버지 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적어도 한 인물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 조상을 거론하는 것은 그가 상당한 명문가 출신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엘가나의 외적 여건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만일 이런 외적 여건들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다면 엘가나와 그의 가정은 당연히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결국 엘가나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외적 여건을 제대로 갖추었다고 해서 그것이 그냥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점에서 본문은 오늘 소위 웰빙(well being)이라고 하면서 단순히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여건을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람의 사는 것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다윗은 저 유명한 시23:에서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제 일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한 우리 요리문답은 참다운 웰빙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 품에 안기기까지는 참 안식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우리에게 참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하는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오늘 사무엘 상 본문을 보십시오. 외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여건을 소개하고 나서 2절 마지막에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사무엘 상하를 통틀어 이스라엘 건국에 위대한 세 인물이 등장하는데 사무엘과 사울과 다윗입니다. 그런데 이 유명한 세 인물에게 직접 간접으로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이 바로 한나입니다. 오늘 서신에서 디모데를 위하여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가 있듯이 사무엘서 배후에는 한나라고 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나가 무자하다는 것은 이런 훌륭한 외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불행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대체로 사람들이 불행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합니까? (1)자기 혼자서 해결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 해결하지 못하면 자살합니다. (2)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어서 완전한 해결을 받을 수 없습니다. (3)한나처럼 하나님을 찾아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기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만군의 여호와"는 온 우주와 하늘의 천군까지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집도하셔서 한나에게 아들을 주심으로 그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한나는 지금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의 적수인 브닌나에게는 자식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브닌나가 자기 자식들을 앞세우고 아들 없는 한나에게 얼마나 과시했으면 두 차례에 걸쳐 "격분했다"고 했겠습니까? 그런 일이 다른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인 성소에서 예배하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교회 생활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때는 재산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가지고 뻐기고 과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교회에 맡겨서 가난한 사람들과 서로 나누게 했습니다. 이런 일은 있는 사람들이 자원해서 가난을 선택한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를 지실 때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즉 자원해서 자기를 포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브닌나 같은 사람은 없습니까? 여러분이 무엇을 좀 가졌다고 해서 남에게 과시하고, 남을 무시하므로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은 없습니까? 자존심에 상처 준 일은 없습니까? 이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신다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남보다 더 나은 여건을 가졌다면 마땅히 나누고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겸손이요, 이것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받은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3. 그러면 이런 극한 불행을 안고 있는 한나에게 엘가나는 어떻게 했습니까?

(1) 5절에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고 했습니다.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배나 베풀었습니다. 롬15:에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자기 좋을 대로만 처신하게 되면 우리 가운데 상처받고 소외당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만그만한 사람들이 그룹을 만들고 자기들끼리만 사귀고 즐기면 거기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요새 말로 "왕따" 신세가 됩니다. 끼리끼리 만의 교제는 올바른 성도의 교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사랑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주위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한나같이 눈물 흘리는 이웃은 없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배나 배려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할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계속 그들을 외면한다면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 "너는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내가 병들었을 때, 내가 배고프고 목마를 때 나를 찾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2) 8절 마지막 부분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라고 했습니다.
우리 역사를 보더라도 옛날에는 여성들의 인권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소위 "칠거지악(七去之惡)"입니다. 시집오는 길은 한 길인데 쫓겨가는 길은 일곱 길입니다. 여자가 시집오면 반드시 자녀를 그것도 아들을 낳아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칠거지악 가운데 우선적인 조항에 해당됩니다. 이것은 여자를 한 인간으로가 아니라 자녀를 생산하기 위한 도구 정도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부부사이라도 여자의 동의 없이 폭력을 행사하면 성추행에 해당된다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법원에서 판결이 나왔어도 아직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인간대접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이 숱하게 많습니다.

이것은 부부관계에 해당되는 이야기이지만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인격대접,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최근에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는 하나님께 심판 받을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엘가나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아들 낳지 못한 한나를 그 이유 때문에 학대하지 않았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 보다 낫지 아니하냐?" 이 말은 한나를 무슨 인간 제조기처럼이 아니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대접해 주는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3천 여 년 전에 엘가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보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주님은 우리가 이웃 특히 나보다 약하거나 악한 조건에 고통 당하는 우리 이웃을 볼 때 외면하거나 무시할 것이 아니라 그가 바로 나를 찾아오신 주님인 것처럼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 만나는 우리 가족들, 우리 이웃들, 우리 교인들을 대할 때 절대로 그 인간적인 조건을 전제로 해서 선입감을 가지고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를 위하여 우리 주님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하여 주께서 목숨을 버리셨는데 네가 어떤 이유로라도 그를 넘어지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이웃의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요한1서 4:20의 말씀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한나의 불행 앞에 적수 브닌나와 사랑의 사람 엘가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웃에게 누구입니까?  엘가나의 자리에 서서 이웃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김오동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