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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양이십니까? (요 10: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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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티이부이에 인기리에 방영된 영화 중에 타잔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타잔은 사람인데 어렸을 적 비행기 사고로 밀림에 떨어져 원숭이같은 동물들의 도움을 받고 어울려서 살았던 동물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타잔이 문명인 사람들과 만나면서 겪는 좌충우돌을 이영화는 재미있게 그렸던 것입니다. 이 타잔은 자기의 정체성이 동물로 알고 살아갔습니다. 먹는 것도 동물처럼 먹었습니다. 말도 동물처럼 했습니다. 사람과 동물이 싸우면 동물편이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가 누구인가 하는 바른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 내가 누구인지 바른 정체성을 갖고 살아갈 때 그 삶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 삶이 행복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를 주님과의 관계에서 바르게 이해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목자로서 우리를 향해 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양이 목자를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우리 주님은 자기 백성을 양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께 속한 주님의 양이 있고 주님께 속하지 않는 양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주님께 속한 주님의 양은 주님과 분명한 관계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개와 같은 동물을 키워보면서 잘 아는 것이지만 개는 자기 주인을 분명히 알고 자기 주인과 관계합니다. 절대고 그 개는 주인아닌 타인과는 관계하지 않습니다.그 사람이 주님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주님과 어떻게 관계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 듯이 목자와 양은 매일 관계해야 합니다.
매일 목자를 따라야 양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과 어떻게 관계하십니까?
한번 가정하여 보십시오.만일 양이 일주일 중에서 한날만 목자와 만나고 목자를 관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절대로 건강한 양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양이 목자를 믿지 못하고 곁길로 간다면 결코 그 생명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연 주님의 양된 우리들은 목자되신 주님과의 관계를 매일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주님의 양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27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라고 합니다.
여기 주님의 양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주님의 양은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의 건강한 양들을 보면 가장 가장 특징이 잘 들리는 은혜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주님의 음성이 잘 들리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음성이 들리지 않고 있다면 나는 문제가 있는 양입니다.
이땅에 오신 복음서의 주님께서는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 앞에서 어떤 사람은 듣고 어떤 사람은 듣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귀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에 자기 백성을 향하여 자기 음성을 들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들으라고 하십니다.
이사야55장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고 하십니다.
에레미야34:1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가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내 말을 들으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심각한 죄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문제는 그 마음이 너무 강퍅하였습니다. 에스겔3:7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히브리서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실패한 역사를 소개합니다. 히브리서가 쓰여진 것은 이스라엘의 백성들 중에 회심하고 믿음의 공동체가 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메시지를 주면서 과거 이스라엘 역사가 왜 광야에서 실패하였는가? 소개하여 줍니다. 히브리서 3장에 보십시오.

7절 이하에 보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40년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기적을 보여주고 날마다 함께 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여기 강퍅은 어떤 죄일까요?
이 단어는 원어가 ‘마르다’라는 말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래서 강퍅한 마음이란 수분이 모두 증발되어지기까지 말라서 돌처럼 딱딱해진 상태의 마음입니다. 강퍅한 마음이란 돌처럼 굳어있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강퍅한 마음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감각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무감각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유대인들은 주님이 기적을 보여주어도 진리의 말씀은혜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시체같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강퍅한 마음이 사람들 안에 있는 것일까요? 일차적인 책임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으시고 허락하시면서 우리에게 마음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강퍅한 마음의 사람들은 대개 죄에 자신을 그냥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조그마한 죄에서부터 시작하여 자꾸만 죄에게 자기를 내어주면서 나중에는 마음이 굳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굳어 마음이 강퍅하게 되면 아주 교만하고 냉냉한 마음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정하고 공격합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20절 “그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24 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라고 합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모습이 요즘에도 일어납니다. 마음이 강퍅한 분들은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 분들을 향해 “미쳤다 정신나갔다”고 합니다.그래서 목회자와 교회지도자들을 향해서 공격하고 비판합니다. 이런 비판과 핍박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주님의 양은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듣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이 이시간 들려지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시는 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외국어를 배울때 가장 기초가 무엇입니까?
바로 듣는 것입니다. 영어를 잘 하시는 분들을 보면 영어가 들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잘 들리지가 않습니다. 특히 외국나가보면 얼마나 말이 빠른지 도대체 어려운 단어는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들리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양들은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어떻게 들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들릴 수 있도록 그 마음을 만져주셨습니다. 마치 우리가 듣는 라디오가 주파수가 틀리면 잘 들을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잇도록 우리의 마음에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내가 듣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주님의 성령께서 듣게 하십니다. 내가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성령님께서 깨닫게 도와주십니다.
요한복음16: 13 “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주님의 양들에게 자신의 말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도록 도와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그 음성을 듣기 위해서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매일 항상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힘써야 합니다.
먼저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잘 들어야 합니다.저는 개인적으로 매일 저녁에 내일 새벽 본문을 먼저 묵상하고 잠을 잡니다.먼저 잠깐 기도하고 본문을 읽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본문의 중요한 핵심 내용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난 뒤에 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갖습니다. 조용히 그 말씀을 마음에 두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것을 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받습니다. 그분의 음성을 들을때에는 내 마음이 너무 기쁘고 좋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실 때 내가 마치 주님 앞에 있는 것처럼 삶이 새롭게 됩니다.
양은 목자의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할 짐승인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님의 음성을 매일 선명하게 듣고살 때 살 수있습니다. 매일 일정하게 그분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나와 주님과의 일대일의 은밀한 만남의 시간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이 지금 나에게 주시는 귀한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2. 주님의 양의 증거는 주님을 믿습니다.

내가 주님의 사람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첫째 증거는 믿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양은 목자되신 주님을 믿습니다.그분을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으로 믿고 우리 인생의 장래를 인도하실 분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따라가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미래를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시냇물가로 인도하여 주실 것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편23편의 고백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주어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어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기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 번역본에는 “그가” 즉 하나님이 한번 소개되었지만 원어 본문에는 그가라는 단어가 반복되어 사용되었습니다. “그가 나를 포른 초장에 누이시며 그가 나를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그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합니다.
여기 다윗은 하나님을 인생의 목자로 믿었습니다.주님을 내 인생의 목자로 믿는 다는 것은 나의주인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내인생의 주인이시기에 삶이 부족함이 없을 것을 믿었습니다.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의의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때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자기 아들 압살롬이 다윗을 배신할 때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피난길에서 고난을 만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목자되심을 믿었습니다. 지금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가 인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여러분 하나님이 내인생의 주인이 되어주셔서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의 삶에 대한 두려움들이 다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능력과 사랑과 근신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예수이름으로 버리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기적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믿지 않는 사람은 기적을 보지 않아서 못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기적을 보아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수많은 기적을 보고 나서도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의혹을 제기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참람하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을 통하여 무엇을 지금 보여주는 것입니까?

인간쪽에서는 도무지 구원을 위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백성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달리 하나님께 귀여움을 받는 백성이었기에 선택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 전체를 대신하여 한 샘플로 채취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그 역사 속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기적으로 간섭하시며 하나님 앞에 올 것을 제시하시지만 인간은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그 역사를 펼치십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출애굽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냅니다. 열 가지 죄앙을 보임으로써 애굽 관리들이 그들을 놓아줄 수 밖에 없도록 만들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대로 출애굽 사건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한 것보다 불평한 것이 언제나 많습니다. 그 기적을 보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홍해 앞에 서자 뭐라고 합니까? 기껏 우리를 애굽에서 끄집어 내어 홍해에서 죽이려고 끌고 나왔느냐?는 원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홍해 바다 사이에 길을 내서 그들이 걷게했습니다. 그리고 또 조금 있다가 이제는 먹을 것이 없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래서 만나를 내리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먹고 마시게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모세가 시내산에 하나님의 율법을 받으러 올라가서 내려오지를 않자 백성들이 기다리다 지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에다 무슨 이름을 붙인지 아십니까?
이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많은 기적과 간섭을 체험하고서 그들이 느낀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 운에 불과한 일이었다는 정도로 느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는지 놀랍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우리를 구약식으로 간섭해 주신다면 난 언제든지 항복하겠다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그렇지를 않습니다.예수 믿는 것을 여러분이 쉽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습니다. 왜 여러분이 쉽게 생각하느냐 하면 지금 여러분은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왜? 믿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 왜?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서 사실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나중에 성경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내가 왜?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내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게 하셨으므로 내가 거듭나게 되었구나.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아는구나 라고 알게 된 것이지 그 왜? 자체가 우리에게 있거나 경험되게 되어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구원 얻었기 때문에 나타난 사건들이 있습니다. 회개가 있고, 감사가 있고, 감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결과이지 원인이나 근거가 아닙니다.
우리는 늘 이 문제에 있어서 걸립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보고 또보고 했는데도 못믿고 우리는 믿을 수 있는가?
그것이 신비입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자신에게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신자가 자신이 가진 어떤 지혜나 결단이나 감정을 근거로 신앙을 쌓고 있는 분은 자신이 흔들리면 하나님도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기분이 침체되면 하나님도 그 날은 침체되었다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신앙을 자기의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것인양 착각하는 자리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주님을 믿습니까?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로 부름받은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큰 기적을 체험하지 않아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만 듣고도 믿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이 주님의 은혜요 주님의 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의 양은 주님께 순종합니다.

27절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양은 목자를 알고 믿고 그러면 따릅니다.양은 목자를 따르면 순종할 때 보호를 받습니다. 목자를 따를때 자유합니다. 양의 생명은 오직 목자를 순종할 때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순종할 때 이스라엘의 역사는 흥왕했습니다. 그러마 불순종할때에는 파멸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하면 목자되신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지만 불순종하면 징계를 경험하였습니다.
왜 사람들이 불순종하는 것일까요? 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불순종입니다.
죄는 주님과는 반대입니다. 주님이 하라는 것을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항상 세상은 주님과 거꾸로 갑니다.점점 말세를 향해 갈수록 더 거역하고 불순종하면서 살 것입니다.
우리가 알 것은 우리는 모두 불순종의 자녀들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요한복음 8장4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나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때마다 제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의 원죄의 핵심이 바로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님께 불순종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주님의 교회에 대해서 불순종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목자로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순종합니다. 그 사람이 믿음이 잇다 없다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믿음의 외적인 척도는 순종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순종에도 두종류의 순종이 있습니다.
율법적인 순종이 있고 복음적인 순종이 있습니다. 그 차이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에 있습니다. 율법적인 순종은 사랑과 관계없이 무섭고 두려우므로 순종합니다. 그러다 보니 순종하는 것이 고통이고 힘이 듭니다. 의무감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순종은 힘이 없고 무미건조할 뿐입니다. 고난을 만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결국 거기에서 끝나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순종은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복음적인 순종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 자원하여 순종하고 자유함으로 그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양은 목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그래서 그 순종은 외적으로는 고통이 있지만 내적으로는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자원하여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 됩니다.이런 순종을 하시는 분들이 가장 빛나보이는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바로 고난이 올때입니다. 복음적인 순종을 하시는 분들은 고난이 올때에도 그 고난의 선한 뜻을 믿고 기뻐하면서 인내하면서 그 고난을 이겨나갑니다.

제가 전에 목회하던 곳에서 겪었던 일입니다.
배권사님이 잡종 진돗개와 함께 살았습니다. 어느날 진짜 토종 진돗개인 어미개가 어느날 나가서 마을 개와 연애를 걸어서 진돗개도 아니고 잡종개도 아닌 잡종진돗개가 태어났는데 바로 그 개였습니다. 이 개는 그 권사님을 그림자처럼 항상 따라다닙니다. 심방갈때에도 따라다닙니다. 새벽기도할때에도 항상 교회당 밖에서 기다립니다. 그 권사님이 매일 새벽기도하는지 안하는지는 그 개가 마당에 있는지 여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느날 배권사님이  그 개를 팔기로 했습니다. 그 개를 산사람은 집에서 100리길 이상 떨어진 개장수였습니다. 개를 팔고 다음날 새벽에 새벽기도를 가려고 대문을 나오는데 그 개가 대문 밖에 앉아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개장수 집을 탈출하여 밤새도록 권사님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벽에 권사님이 새벽기도를 가자 또 길을 따라다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권사님이 그 개를 팔지 않고 죽는날까지 데리고 살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 개를 보면서 크게 배운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못나면 개만도 못할 수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인은 자기를 배신했는데도 끝까지 주인을 위해서 순종하고 고난을 이겨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동물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그개는 언제나 자원하여 권사님을 따라다니면서 순종하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3자목회를 주장합니다.
자원 자율 자유입니다.신앙생활은 자원하여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율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럴때 자유가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경우 선교1세기까지는 타의에 의해서 타율적으로 맹복적인 순종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젠 이런 성숙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누가 이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주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 할 수 잇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복음적인 순종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주님 사랑하기 때문에 기도의 시간을 갖으시기바랍니다 .주님 사랑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늘 전도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사랑하면 순종할 것을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요14장 21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십니다.14장 23절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하십니다.

여기 순종하는 자에게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에서 가정에 자녀들과 의 관계에서 이미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면 누가 이익입니까? 자녀들이 이익입니다. 말을 잘 듣고 잘 순종하면 우리 부모들이 그사랑스런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있는 좋은 것들을 베풀어주고 사랑하여 줍니다. 용돈도 주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주기도 하고 아낌없이 줍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더욱 그렇습니다. 여기 주님께서는 순종하는 그 사람에게 자기를 나타내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나타내신다”. 주님은 육체가 없으신 분으로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순종하는 그 사람에게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나타나주셔서 그의 삶을 인도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양입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슴을 잘 알기를 바랍니다.
먼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양이 되시기 바랍니다.마음을 열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음성을 들으시면서 마음을 지키시고 세상을 이기시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지경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을 믿으시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 절대 순종하면서 목자되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양으로서 평생을 승리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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