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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과 진리 (요이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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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과 진리

(1)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5) 부녀여 !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8)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9)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12)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13)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요한2서)


기독교 초기에 교회 지도자는 세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사도>라는 직분이었습니다. <사도>란 예수의 12제자를 중심으로 예수와 함께 지내며 예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예수를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직무나 가르침과 편지는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권위있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들은 의심할 여지없는 초대교회의 확실한 지도자들로 그 활동영역은 어느 한 장소에 국한되지 않았었습니다. 둘째는 직무상 순회 전도자라 불리우는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예언자>란 명칭은 이들이 성령의 뜻에 따라 어느 곳에든지 자유롭게 나가서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초기에 가정과 직업을 포기하고 안정된 생활의 즐거움도 포기하고 온갖 위험을 무릎쓰고 여행을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었습니다. 셋째는 <장로>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이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세워진 교회에 임명한 지도자로 해당 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연장자이었으며, 사도들의 가르침과 서신들을 전달하는 직무를 감당했었습니다. 이들의 직무는 임명받은 교회에 국한되었고 오늘날 담임목회자에 해당되는 지도자로 볼 수 있습니다. 장로는 지역과 교회에 발생하는 이단과 거짓선지자들에 대해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교회와 진리를 수호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세가지 직제 중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예언자>, 즉 순회 전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자유롭게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성령의 음성이라며 복음을 전하면서 돈 맛을 보자 점차 본래의 사명에서 벗어나 결국 타락하더니 의례껏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빙자하여 예수를 전하면서 사실상 예수를 미끼로 금전을 갈취하여 자기 뱃속을 채웠던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예수 십자가 사랑을 미끼로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교회헌금을 착취하여 호화생활을 누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성령을 빙자하여 교회를 갈취하며 자기들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교회 분열을 획책하므로 초대교회의 두통거리가 되다시피했던 것입니다. 여러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헌금이 많이 나오는 교회를 발견하게 되면 그 교회를 아예 독차지하여 몇 년동안 안락생활을 누리기까지 했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장로>로 부르면서 교회 분열을 조장하고 교회를 혼란시키는 거짓 선지자 무리들의 거짓 사랑에 미혹되지 않도록 더욱 더 진리가운데 굳건히 서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미끼로, 성령과 사랑을 빙자하여 돈을 밝히는 <예언자>,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는 <순회전도자>, 성령 운운하며 교회분열을 획책하는 무리들,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적그리스도, 이들은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들과는 아예 상종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근묵자흑(近墨者黑), 즉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미혹하는 자와 가까이 있으면 그 미혹의 마음에 감염되므로 요한은 처음부터 그들과의 접촉을 아예 금지시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성령이 임하신 목적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하려함(누가복음4:18)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과 은사를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배를 채우며 축복 운운하며 가난하고 병들고 갇히며 소외된 자들을 외면한다면 그들은 거짓 선지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자신은 머리둘 곳조차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화생활을 누리며 하나님의 축복을 운운하는 것은 예수 팔고 복음 팔아 먹고 사는 사기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서 성공 출세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출세 성공 지향적인 설교와 목회를 일삼는 무리들은 교회를 혼란시키며 신앙을 미혹케하는 <포도원을 허는 여우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십자가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와 목회, 신앙생활과 교회는 십자가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만이 인류 구원의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곧 진리입니다. 십자가가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바로 진리를 아는 것이며, 십자가 예수의 삶을 깨닫는 것이 진리를 깨닫고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안에 거하는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시고 보내주신 성령은 곧 십자가의 예수를 가르치고 증거하시며 깨닫게하여 진리가 되시는 예수처럼 살게하는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 진리의 핵심은 십자가이며,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리를 나타내 보여주시고, 십자가 예수를 통해 사랑이 진리의 구체적인 삶인 것임을 증거해주시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곳입니다. 십자가 사랑은 내가 죽고 너는 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은 자신은 얼마든지 희생될지라도 이웃이 최고로 잘 되는 것을 구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십자가 사랑은 이론이나 학문도 아니고 도덕이나 윤리, 종교의 경전도 아닙니다. 십자가 사랑은 필수 생활입니다. 십자가 사랑이 자신의 생활을 통해 증거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생명으로 부활되는 것입니다. 부잣집 출신의 젊은 간호사가 황홀하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오늘 그리스도의 몸을 만졌습니다!."

이 말은 병원에 실려온 한 환자를 치료했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환자는 버려진 병상에 오래 누워 있었으며 그 몸에 구더기가 들끓는 비참한 남자였습니다. 병원 원목은 그 간호사를 대견하게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손이 닿는 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바라는 것은 긴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랑은 말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희생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이 십자가 사랑은 숱한 희생가운데 생활로 증거되어 왔습니다. 사랑은 생활과 희생으로 증거될 때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고 있는 성도들은 당연히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 여러분을 구원하였듯이 여러분의 십자가 사랑이 이웃을 구원하는 생활로 증거되어야만 합니다.

부활절이 되면 어린이들에게 색계란을 주는 관습이 옛날부터 전해지고 있는데 그 유래는 이런 것입니다. 십자군 전쟁 때였습니다. 어느 귀부인이 한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이 부인은 십자군으로 전쟁에 나간 후 소식이 끊긴 남편을 찾고 있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남편의 전사 소문이 떠돌자 약점을 이용한 부하가 귀족의 재산을 횡령하고 그 부인을 쫓아내는 바람에 다른 마을로 간 것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무척 친절했습니다. 거지꼴이 된 부인을 따뜻하게 맞아 그 마을에서 정착하도록 도왔습니다. 그 해 부활절이 되었습니다. 귀부인은 동네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닭을 키워서 계란을 받아 색칠을 하여 아이들에게 선물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녀는 부활절 아침,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숲에 자기의 나무를 하나 씩 정해요. 그리고 버섯을 따서 그 나무 밑에 새둥지를 만들어 놓아요. 얼마후에 하늘에서 이상한 새가 날아와서 여러분의 둥지에 알을 낳아 놓을 거예요."

아이들은 모두 신이 나서 숲에 들어가 자기의 나무를 정하고 둥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귀부인의 집으로 돌아와서 아침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식사 후에 둥지를 찾아간 아이들은 정말 알록달록한 색깔이 칠해져 있는 예쁜 알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알에는 이런 글까지 씌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신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날 부인의 색계란을 받은 아이 중 한 명이 친척집을 가게 되었는데 산길에서 몹시 지쳐 쓰러져 있는 부상병 하나를 만났습니다. 이 아이는 아끼던 색계란을 그 부상병에게 주었습니다. 군인은 계란에 씌어진 글을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너 이 계란을 어디서 얻었느냐? 이 글은 우리 집안의 가훈이란 말이야. 그리고 이 필체는 틀림없이 나의 아내 로잘린의 것이야."

그 후의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의 사랑은 로잘린 부인에게, 부인의 사랑은 아이들에게, 어린 소년의 사랑은 부상병에게 전해진 것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이 생활과 희생을 통해 증거되는 가운데 행복과 평화, 그리고 생명이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리가운데 살고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사랑으로 그 진리를 증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테레사 수녀가 젊었을 때 어느날 빈민굴에서 어두운 방에 사는 환자를 발견했습니다. 더러운 방에 냄새가 지독한 남자인데 그 방에 램프(등잔)가 있는데도 켜지 않고 있었습니다. 테레사가 방청소를 끝내고 램프를 켜자 사나이는 소리를 지르며 불을 껐습니다. 수녀도 지지않고 다시 키자 환자는 램프를 던져 버렸습니다.

"난 등불이 없는 것이 좋아 1년내내 램프는 키지 않았어!"

하고 버럭버럭 고함쳤습니다. 그는 육체의 질환뿐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 더 심했습니다. 이튿날 테레사 수녀는 새 램프를 사다가 불을 켜주고 돌아왔습니다. 그후 10년이 지났습니다. 젊은 수녀들이 빈민굴의 사나이에 대한 보고를 했습니다. 그는 같은 빈민굴집에 살지만 깨끗이 개조된 집이요, 의젓한 직업을 가졌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키 작은 수녀님께 전해 주시오. 당신의 등불이 지금도 내 생활 속에 불타고 있다고."

이 환자는 어둠이 습관화되어, 어둠이 더 편했던 것이었습니다. 육신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 그의 영혼도 침체되고 가라앉은 상태가 당연한 일상생활처럼 습관화된 불쌍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테레사 수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사랑에 접하고 그의 영혼의 램프는 밝은 빛을 되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어둠의 생활을 당연한 일상생활로서 받아드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두운 세상에 직접 찾아오신 것처럼 십자가 사랑을 가지고 직접 찾아가 그 사랑을 삶을 통해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태워 진리의 불을 밝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사랑과 진리는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진리가운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된 진리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삶을 통해 증명되지 않는 사랑은 거짓 사랑입니다. 사랑을 통해 증거되지 않는 진리는 거짓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십자가 희생으로 사랑하고 계시듯이 여러분도 이웃을 십자가 희생으로 사랑하여 진리를 생활로 증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동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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