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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시에 찔리셨습니까? (고후 1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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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가 짓고 부른 노래, 또 조성모가 최근에 리메이크한 가시나무라는 노래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지요?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불러 보았으면 좋겠는데…~ 가시에 찔려 보셨습니까?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가시에 찔려보신 적이 계신지요? 우리는 내일부터 고난주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2000년 전에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는 주간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우리들도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고난의 의미도 함께 돌아보게 되는 그런 주간입니다.
모든 인생의 고난은 가시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가시는 우리를 찌르고 가시는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가시는 우리를 피 흘리게 합니다. 일단 가시에 찔리면 우리의 평범한 삶이 마비되고 우리가 고통 속에 빠져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에게 육체를 찌르는 그런 가시보다도 훨씬 더 예리한 가시에 우리의 마음이 찔려 심리적 고통을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런 인생의 가시에 찔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시에 찔린 사람들이 그 가시에 반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 유명한 바울 사도도 그런 인생의 가시에 찔려있었습니다. 그는 이 고난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고난을 생각하는 이 주간, 우리는 이 고난을 대응하는 성도들의 성서적 방식을 함께 더불어 생각하고 싶습니다. 가시에 찔리실 때 해야 할 일이 무얼까요? 첫째로 가시가 옮겨지도록 기도하십시요. 가시가 옮겨지도록 기도하십시요.
오늘 본문에 보시면 바울 사도는 7절에서 내 육체에 가시가 있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육체에 가시가 있다. 이 가시가 무엇이 였는가에 대해서 신학자들의 이견이 여러 이설들이 분분합니다.
가장 많이 재기되는 설은 소위 안질설입니다, 안질설. 바울에게 안질이 있었다. 쉽게 낫지않는 안질의 고통이 있었다
갈라디아서 4장14절에 보시면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다. 그리고 그 다음절에 보시면 나를 사랑하는 너희들이 할 수만 있다면 눈이라도 빼어서 나에게 주고싶어 했을 것이다.
바울이 아마도 안질이 있었기 때문에 그냥 내가 바울 선생님에게 눈을 주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겠느냐 라는 그런 추측입니다.
또 갈라디아서 6장11절에 보시면 바울이 내 손으로 이렇게 큰 글자를 쓴 것을 보라!
우리가 나이 먹어가면서 시력이 감퇴하면서 성경도 자꾸만 큰 성경으로 바뀌지 않습니까 활자가? 바울이 이런 큰 글자를 강조한 것을 보아서 아~ 눈이 좋지 못했고 이런 바울의 안질은 아마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그 강렬한 빛의 체험 속에서 안질을 얻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그런 추측이 있습니다.
가능한 추측이죠. 이 안질설, 그런가 하면 뭐 안질 가지고 뭐 너희들의 시험꺼리가 내가 되고있다 바울이 그렇게 말했겠느냐 이건 안질 정도가 아니라 당시에 사람들이 가장 부끄러워하던 질병, 간질이 바울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간질설이라고 그럽니다.
안질이냐 간질이냐 이렇게? 그래서 신학자들이 토론을 벌입니다. 아마 간질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너희의 시험꺼리를 내가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고백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가 하면 뭐 그 밖에도 무슨 말라리아설, 우울증설, 심지어는 마누라설도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어떤 사람들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고 하지만 또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일단 한번 결혼했다가 그 다음에 독신이 되었을 것이다. 하~도 마누라에게 혼난 나머지 그 다음부터는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을 결심하면서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내가 계시 받은 것은 아니지만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 이렇게 바울이 역설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바울이 아마도 가장 좋아했던 구약의 성경구절은 잠언서에 다투는 여자와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 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이 말씀을 바울이 제일 좋아했을 것이다 뭐 이런, 그런 아주 상당히 억측에 가까운 설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답은 뭐냐? 정답은 모른다 소리입니다. ~
네, 바울의 육체의 가시가 정말 뭐냐? 자세히는 모르겠어요.그러나 저는 바울이 그것을 분명히 얘기해 놓지 않은 것이 더 좋다 이렇게 생각 합니다. 누구든지 이 육체의 가시라는 문제를 이기면서 그것을 자신의 고통과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인생의 고통도 저는 육체의 가시에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자기를 찌르는 육체의 가시를 갖게 되었을 때 이 가시를 어떻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이 가시가 옮겨지도록, 없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자, 이 본문에 8절을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다시 한번 본문의 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 하였더니" 세 번만 기도한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주 본격적으로 진지하게 내가 세 차례에 걸쳐서 이것을 기도했지만 그러나 육체의 가시가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일단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 가시가 옮겨지도록, 떠나도록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 아니죠? 당연히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십자가라는 가장 커다란 인생의 고난을 앞에 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뭐에요?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고 주님도 세 번씩 그것을 가지고 진지하게 기도하셨던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고난을 만날 때 무엇보다 기도하라고 우리를 초청합니다. 야고보서에 보시면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고난 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기도의 장으로 초대하고 있는 말씀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기도로 다루지 못할 고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어떤 고난도 옮길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성경의 분명한 약속입니다.

우리가 그 마태복음에도 보면 간질병 들린 아이 하나를 제자들이 고칠려고 하다가 실패하는 장면이 있지요? 그때 예수께서 그 실패의 원인을 진단하시면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너희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만약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산을 명령해서 저곳으로 뭐에요?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마지막 부분에서 기도 외에는 이런 것이 가능하지 않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기도할 때 어떤 인생의 고난의상도 우리에게서 옮겨질 수 있다. 특별히 우리에게 허용되는 고난이 일시적인 어떤 목적을 포함하고 있을 때는 우리가 기도할 때 즉각적으로 그 고난이 옮겨지는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시는 여러분 내 인생의 장에 어느날 갑자기 내가 가시에 찔렸다, 나를 괴롭히는 어떤 고난이 내 인생 속에 찾아왔다, 먼저 할 일이 뭘까요?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를 주저하지 마십시요.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능력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할 때 어떤 고난도 돌파하지 못할 것이 없다 이 사실을 여러분 분명히 믿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같은 간질병 들린 아이의 기사를 마가복음에서 읽어보면 아마도 그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이렇게 요청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선생님 할 수 있거든 내 아이를 좀 도와주십시요, 살려주십시요" 여러분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뭔 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이 어떤 대답을 하셨어요?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음으로 주앞에 기도로 나와서 참으로 인생의 고난 앞에서 기도하신다면 그 고난이 옮겨질 수 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고난을 옮길 것입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기도했는데도 고난이 옮겨지지 않을 때도 있어요. 여전히 그 고난이 버티고 서서 나를 괴롭힙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마도 바울의 케이스가 그런 케이스였을 것 입니다. 세 번씩이나 진지하게 자기를 찌르는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살아계시는 하나님 앞에 나와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지마는 그 가시는 아직도 떠나지않고 바울을 괴롭힙니다.
그럴 때에 해야할 일이 무얼까요 그것은 둘째로 옮겨지지 않는 가시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십시요 하는 것입니다. 옮겨지지 않는 가시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십시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경험하는 고난들 가운데는 적지않게 우리들 인생의장에서 아주 장기적으로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그런 고난들이 있습니다. 기도해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고난들은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자연히 우리는 기도하면서 이렇게 주앞에 물을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 왜 그렇습니까 도대체 왜 이 고난이 떠나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그대로 두시겠습니까? 도대체 이 곤난을 오랫동안 이렇게 내 삶의 장에 허용하셔서 저가 계속 이 가시에 찔리도록 허용하시는 이유는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저는 정직하고 진지하게 이 질문을 묻는 사람마다 하나님 앞에 동일한 대답을 듣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목적이 있어! 내가 이 고난을 네 삶의 장에 이토록 오랫동안 허용하시는 나의 목적이 있단 말이야, 그렇다면 우리는 그 주님 앞에 엎드려 또 물을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 도대체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때때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고난의 원인을 설명할 때, 이 고난이 어디에서 오느냐를 설명할 때 지나치게 단순한 이분법적 구조를 가지고 이 고난의 문제를 접근한다고 생각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즉 고난이 어디서부터 오느냐? 어떤 사람들은 모든 고난은 마귀가 주는 것이다 그 쪽에서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탄이 모든 고난을 주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고난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속에서 허용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는 것이다.
물론 저는 어떤 고난은 명백하게 사탄이주는 고난이 있어요. 우리를 망가뜨리고 우리를 파괴하고 또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기 위해서 사탄이 우리를 공격해 들어오는 그런 고난들이 인생의 장에는 많이 존재합니다.
또 어떤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유익을 위해서 교육적인 테스트로 그 고난을 허용하시는 분명한 케이스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고난은 사탄이주는 것만이 아니고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것만이 아니고 사탄도 주고 하나님도 허용하시는 그런 고난이 많은 것 같아요.

자 무슨 얘기냐 하면 일단 고난을 시작하는 것은 사탄이에요 마귀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걸 보시면서, 그런데 마귀가 저 사람을 괴롭히지만 그 고난이 내 사랑하는 자녀에게 궁극적으로 유익이 될 것이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판단하실 경우에 사탄이 우리를 괴롭히도록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그런 케이스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한단 말이에요. 저는 욥의 케이스도 그런 케이스가 아니였는가 생각됩니다.
자, 어느날 사탄이 욥을 찾아와서 갑자기 한순간 욥의 인생의 장에 재앙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가축들이 날라 갑니다. 재산들이 날라가기 시작합니다. 자기 몸에는 질병이 생기고 기왓장을 가지고 몸을 긁을 수밖에 없는 그런 고통의 극한 상황 속에 욥이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시작이 되었습니까? 사탄이 일으킨 것 이에요. 우리를 괴롭히는 것, 아프게 하는 것,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이 하는 것 입니다 분명해요.
그러나 그 사탄이 그냥 할 수가 없었어요. 누구의 허락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허락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마귀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욥을 참소하면서 저 욥이 하나님 잘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졔가 팔자가 좋아서 그래요, 다른 사람처럼 상황이 어려워져 보아요 정말 하나님 찬양할까요? 정말 하나님을 향해서 끊임없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가 있을까요? 누구도 삶의 장이 어려워지면 하나님을 원망할 거예요. 그래? 그럼 너가 한번 해봐! 하나님이 허용하셨어요. 왜냐하면 이것을 욥이 승리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것이 유익할 것을 판단하신 하나님이 그것을 허용하십니다. 저는 바울 사도의 케이스도 그런 동일한 케이스가 아니였는가 싶습니다.

자 오늘7절을 다시 읽어보시면 바울은 자기 육체의 가시를 무어라고 설명합니까?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그것이 무어라고 그랬어요? 사탄의 사자다, 사탄의 메신저다 그 고통은 사탄의 메신저다,
그러니까 바울의 몸을 괴롭히는 혹은 바울의 인생을 괴롭히는 어떤 가시, 바울을 찌르고 있는 가시, 그 가시 그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니에요 사탄이 준 겁니다. 분명히 사탄의 사자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허용하셨다는 말이에요 이것이 결국 바울 사도의 인생 속에 결코 마이너스가 아니고, 손해가 아니고, 그것이 궁극적인 유익일 것을 판단하신 하나님이 그것을 허용하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물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그러면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단이 나를 괴롭히도록 육체의 가시를 내 인생의장에 허용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기도하다가 바울이 드디어 깨달았어요 그 하나님의 목적을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은 목적이 뭐였습니까?

자, 우리가 다시 한번 7절 말씀을 한번 더 읽겠습니다. 생각하시면서 읽습니다. 큰소리로7절시작,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두번씩 짤막한 한 구절에 두번씩 거듭 강조된 말이 있죠 무슨 말 입니까?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다른 말로하면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나를 겸손하게 하실려고 하나님이 이 고난의 가시를 허용하셨구나, 이것이 깨달음이였어요
그런데 7절에 어떻게 시작합니까?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를 접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비밀한 세계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본문직전에 있는 이 고린도후서 12장에 1절부터 6절까지를 보면은 바울의 신비한 체험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어느날 자기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몸을 떠나는 경험을 합니다. 일종의 신비체험을 합니다.
셋째 하늘나라에 끌려갔다 하나님의 낙원, 저 대기권 바깥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 다시 말하면 천국을 경험했다. 이 세상에 살면서 그가 천국경험을 한 것이에요. 아주 신비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신앙의 체험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분명한 도움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체험에 중요한 함정하나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대부분 신비체험을 한 사람들에게 일어나기 쉬운 보편적 함정가운데 하나가 뭐냐하면 교만해 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영적 교만, 나는 당신들이 모르는 보통 교인들이 모르는 놀라운 체험을 했고 나는 하나님의 깊은 비밀을 체험했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언어를 말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것을 체험했고 나야말로 영빨이 굉장한 사람이로구나,
그런데 그 다음부터 교만해져요. 영적 교만에 빠지기가 쉽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바울사도가 기도하면서 깨달았든 것이 뭐냐하면 왜 하나님이 나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용하셨을까? 하나님이 나를 전도하라고 부르시고 세계를 뛰어다니면서 이 시대에 복음화의 거룩한 사명을 나에게 맡겨주셨다면 좀 건강하게 하시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왜 나에게 이러한 떠나지 않는 육체의 고통을 나에게 주셨을까? 기도하다가 아~왜 이러한 고통을 주셨을까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아~ 아~아~ ~
아~ 이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이 이래서 나에게 이 고통을 허용하셨구나, 아~내가 건강까지 하면 내가 교만해질 것을 아시고 하나님이 그래서 바로 육체의 가시를 내 인생 속에 허용하셨다, 그걸 깨달은 거에요. 갑자기 깨달은 것이에요. 그리고 겸허하게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 그 삶은 건강한 삶보다도 훨씬 더 유익한 삶이란 것을 바울 사도는 비로소 깨닫게 된것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기도해도 빨리 그 목적이 깨달아지지 않을 경우도 있습니다. 뭐 그래도 괜찮아요. 빨리 그 목적이 깨달아지지 않아도 그러나 이 고난의 배후에, 내가 지금 경험하고있는 고난의장 저 배후에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만 있으면 돼요.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바울 사도의 고백, 로마서 8장28절의 고백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리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뭐에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오늘의 고통, 오늘의 삶의 장의 회오리, 오늘 내 마음과 내 육체를 찌르고 괴롭히는 이 아픔 이 모든 것 까지도 합력하여 뭘 이룬다고요? 선을, 하나님의 선을 이룬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을 내 인생 속에 이루기 위한 유익한 목적이 이 고통의장 바로 배후에 있다 이 하나님의 선한 유익과 목적을 믿을 수만 있다면 괜찮아요.그것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자, 고난의 가시에 찔렸을 때 첫째로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일단 가시가 옮겨지도록 기도 하십시요
그러나 그 가시가 옮겨지지 않거든 둘째로, 그 옮겨지지 않는 가시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십시요.
그 다음에 세번째로 그 발견된 목적으로 인하여 기쁨으로 그 가시에 반응 하십시요. 그 발견된 목적을 인하여 기쁨으로 가시에 반응 하십시요.
자, 하나님이 나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서 자고 하지않게 하실려고, 그래서 육체의 가시 때문에 주님 앞에 늘 기도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고 낮아진 인생으로 살도록 내가 신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이 아니고 나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다는 겸손을 위해서 이것을 허용하셨다면, 그렇다면 나는 이 가시에 대해서 아프지만, 이 가시를 기쁨으로 수용할 수가 있어야 한다.
내가 당장 그 목적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할 찌라도 그러나 이 고난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선한 유익이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존재한다 이 사실을 참으로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 고난의 가시 앞에 기쁨으로 반응을 할 수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까 그것이 야고보의 충고가 아니였습니까?
야고보서 1장 2절에 보시면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뭐라고 그랬어요? 기쁘게 여겨라 그랬습니다.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저는 그렇다고 고통이 왔을 때 내가 고난의 가시에 찔렸을 때 야! 참 기뻐구나, 나 기뻐! I'm so happy, 뭐 이렇게 감정적으로 기뻐할 수는 도저히 없다고 생각해요.
여러분 이것이 명령서라는 것을 주목해 보세요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명령이에요, 명령. 그러니까 뭐에요? 명령은 순종해야지요. 그러니까 기뻐할려고 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의지적으로.
내 감정은 따라주지 않지만 이 가시는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이가시는 나를 여전히 아프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시의 배후에 하나님의 선한 유익과 목적이 있음을 내가 참으로 믿는다면 하나님 저 기뻐할려고 하겠습니다, 라고 의지적으로 응답할 수가 있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의지적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한 2년 전에 저의 교회에서 그 제주도에 가서 목회자 중보기도 세미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세미나를 잘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 날밤 호텔에서 자고 그 이튿날 아침에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서 제가 호텔에서 투숙을 했는데 화장실에서 제가 넘어져 가지고 이 오른 팔목을 부러뜨렸어요. 그래서 팔이 막 갑자기 붓더라구요. 그런데 뭐 그냥 서울가서 치료를 하자, 그리고 그냥 붙들고 그 이튿날 아침에 일어났어요.
뭐 그래도 콰이트타임(Q T)을 해야 되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을 펼치고 딱 그날 그 콰이트타임 본문이 야고보서 1장1절부터 7절이더라구요 그래서 1장2절을 딱 보니까 "네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그러니까 어떻게해요 기뻐해야지요, 그래서 하나님 되게 아프네요,
그런데 하여튼 기뻐하라고 그러니까 기뻐하겠습니다. 이유도 모르지만 목적도 모르지만 하여튼 기뻐하겠습니다. 말은 딱 해놓았는데 속으로는 기쁘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 제가 왼쪽 팔목만 부러뜨려도 제가 기뻐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오른쪽 팔목이잖아요 여기 오른쪽 팔목, 딱 제가 부러뜨린후 제가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뭐냐하면 설교준비 어떻게 하지? 설교준비, 써야 되는데, 말씀준비 어떻게 하느냐, 그게 제일 먼저 걱정이더라구요. 그리고 뭐 기뻐하라고 그랬으니까 기뻐는 하지만 하나님! 하~ 이게 하필이면 오른쪽 팔목입니까?
자, 이제 서울 와서 주일날이 되어가는데 지금 말씀준비를 해야 되는데 말이죠 써야 되는데 쓸 수가 없잖아요 전혀 움직이지 못하겠더라구요. 그래서 평생 처음 컴퓨터 자판을 왼손으로 이렇게 두들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제가 아주 처음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만져본 순간이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평생 제가 컴퓨터를 사용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항상 기계는 비인격적인 것이다 멀리할수록 좋다고, 아 이런 인생관을 가지고 살았거든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저의 집에 하여튼 그 벽에 못 하나 제가 박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기계쪽하고는 공과계통하고는 나는 상관없는 사람이다, 해야 한다면 그게 마누라 책임이고, 그리고 어떻게 뭐 컴퓨터를 두드리면서 성령의 영감이 올 수가 있느냐, 말씀준비는 기도하면서 이렇게 써야지.
제가 좋아하는 챨스 스윈들이라는 분의 어느날 책을 읽어보니까 그분이 아 자기는 컴퓨터 안한다고, 왜냐하면 말씀을 이렇게 묵상하면서 쓸 때 거기에 성령의 영감이 임한다고, 아~ 나하고 똑같은 인생이 또 하나 있구나, 그래서 나는 컴퓨터에 내가 가까이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하여간 그래서 한 석달 동안 계속 이것으로 찍어가면서 설교 준비하니까 되더라구요. 신기하게 되더라구요.
제가 그 후에 다시 연필 쓰는 데로 돌아갔을까요, 안돌아갔을까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요즘 와이프가 뭐라고 그러는 줄 압니까? 당신, 컴퓨터 이제는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중독환자가 되었다고 그래요. 푹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해보니까 굉장히 좋은 점이 많아요 너무 편리하고, 그리고 많은 자료들을 활용할 수 있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하나님이 내가 컴퓨터 하기 원하시는데 워낙 고집이 쎄어서 안하고 있으니까 그냥 부러져라! 이렇게 탁 부러뜨린 것 같아요 ~ 그게 훨씬 더 유익이야,.
제가 지금 감사할 수 있거든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와요. 하나님의 휴머 였구나, 그렇게 해서 나로 하여금 시간을 잘 사용해서 말씀 준비와 그리고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도록 주께서 내 삶 속에 이렇게 역사하셨구나
때로는 감정이 따라주지 않지만 그러나 이 고난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며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바울 사도의 고백도 동일한 것이였다고 생각합니다.

9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9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거기에 "도리어 크게 기뻐함은" 이 단어를 주목해 보세요
10절을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거기도 무슨 단어가 또 강조됩니까 "기뻐하노니" 기뻐하노니,
자, 고통은 아픔입니다. 가시는 우리를 찌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엎드려 깊이 기도하면서 드디어 하나님의 목적을 붙잡았습니다. 나를 겸손하게 하실려고 또 이 가시 때문에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실려고, 하나님 주님이 도와주셔야 저가 오늘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아프지만 괴로웠지만 기도 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나와 함께 있고 나는 여전히 복음전할 수가 있었고 뭐 육체의 가시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에 조금은 방해가 된 것 같이 생각되지만 별 방해가 없어요.
나는 여전히 기도했고 여전히 주님의 임재를 체험했고 여전히 함께하시는 주의 거룩한 능력을 경험했고 그리고 나는 여전히 하나님과의 의존 속에서 그 신뢰 속에서 내게 맡겨진 복음의 사역을 당당하게 내가 감당 할 수 있었다면 그렇다면 바울은 이 고통은 좋은 거야, 그렇다면 나는 이 고통을 자랑할 수가 있다 내 약함을 자랑할 수 있다. 이 약함 때문에 나를 무릎 꿇게 했고 내 이 약함 때문에 전능하신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더니 주의 임재가 주의 도우심이 나와 함께하고 있었다면 나는 기뻐해야 해, 이것이 바울 사도의 고난에 대한 결론이였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런 삶을 붙잡을 수가 있었을까요? 저는 그것이 그의 주님에게서 배웠던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고난 주간인데, 다시 주님의 삶의 장으로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고난의 한 주간, 그리고 십자가를 앞에 둔 마지막 고난의 저녁 그 밤을 생각해 보십시요.
다가오는 십자가 앞에서 주님도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뭐에요? 이 고난을 옮겨달라고,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기도하셨어요. 인간성을 입으시고 오셨던 주님이시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알았습니다. 곧 기도 속에서 그 고난은 옮겨질 수 없다는 사실을, 그것이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을, 십자가는 그 분이 져야 할 하나님의 계획이고 목적이였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침내 그 밤에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는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뜻에 집중했습니다. 이것이 나에게 아픔이어도 고통이어도 내가 십자가를 짐으로 말미암아 나를 이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함으로 말미암아 나의 피흘림을 통해서 이땅을 살고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경험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있다면, 그 다음에 다가오는 십자가 앞에서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우리가 히브리서12장2절에 보시면 십자가를 향한 주님의 반응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 다음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십자가는 고통이 였습니다. 아픔이 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 앞에 있을 즐거움을 바라보셨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지시므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죄 사함 받고 구원 받고 새로운 삶을 살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워질 수많은 이땅의 인생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러분은 가시나무새의 아름다운 전설적인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일생에 단 한번 우는 전설의 새가 있었다고 합니다.그 울음소리는 세상에 어떤 소리보다도 아름다운 소리였다고 합니다.
자기의 보금자리 둥지를 떠나간 바로 그 순간부터 이 새는 가시나무를 찾아 헤맵니다. 그리고 가장 길고 예리하고 날카로운 가시를 발견하는 순간 이 가시나무 가시에 스스로 찔려 피를 흘리면서 죽어갑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그 순간 그는 자기생애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 새의 운명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이였다고 생각을 해요.
그가 이땅에 오심은 십자가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찔리기 위해서, 이 가시나무에 그가 부딪혀 찔려 피를 흘리기 위해서, 그러나 그가 부를 노래를 위해서, 십자가의 마지막순간에 그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마지막 한 순간에 그가 외치셨던 말, "다 이루었다! " 이 한마디의 노래를 위해서, 우리의 죄 사함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바로 그분, 그가 가시나무에 찔리므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하덕규가, 여러분이, 저도 새로운 생명을 얻고 인생의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면, 그렇다면 오늘 인생을 살아가는 삶의 길에서 여러분과 저의 인생의 고난이 아무리 힘겹고 버거운 것이라 해도 우리는 이 십자가의 가시나무에서 찔려 고통을 받으신 그분 앞에서 또 그분을 통하여 인생의 새로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와 슬픈 노래를 부르든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이렇게 노래하든 하덕규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이 그 마음에 쉴 곳을 차지하자 마자 그는 가수로서 세상에서 받는 명망, 우리 주님을 찬양하는 일에 이 형제가 자기인생을 바치고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던 것처럼, 십자가나무 위에서 당신을 위해 나를 위해 찔리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분이 이제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 오시사, 그 분이 참으로 내 안에 쉬시고 좌정하신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당신은 나는 슬픈 노래를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운 노래를 부를 수가 있습니다.
삶은 아직도 고통이지만 가시는 아직도 우리를 찌르고 있지만 그러나 이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이상한 마음속에 솟아나오는 기쁨을 가지고 고통 속에서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삶은 고통이지만 주님 저는 기뻐요. 이 기쁨으로 고통을 이기고 내 생애 속에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이 놀라운 인생, 이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길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다 일어나십시다 기립하시고 함께 같이 기도하실 때 고난을 생각하는 이 주간, 그렇습니다. 인생의 길은 쉽지않습니다.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신 주님도 몸소 그것을 체험하셨습니다. 그가 고난을 체험하셨기에 고난 받는 우리를 그분은 이해하십니다. 그리고 그 고난 앞에서 절망하지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기도해도 고난이 떠나지 않거든 우리를 위해 그가 예비하신 그 놀라운 목적을 바라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바라보면서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아프지만 여전히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번 그 놀라우신 그의 목적을 발견하는 순간 찌르는 가시는 아직도 나를 괴롭히지만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노래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소망이라고,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오! 하나님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이 한 주간 우리 인생의 길에서 고난을 이기는 승리를 살아가도록 저에게 새로운 노래를 승리의 노래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길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 고난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손길과 목적을 바라보며 찬양하겠습니다. 찬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며 인생의 길을 승리로 걸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인생의 길이 아무리 험하고 힘들고 버거운 길이어도 주님이 함께하신다면 이땅에 오셔서 몸소 고난을 체험하신 나를 이해하시는 그분이 함께하신다면 또 주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그 놀라운 목적을 제가 보고 알 수가 있다면 저는 좌절하지 않을 것 입니다. 찬양할 것입니다. 기뻐할 것 입니다. 눈물보다도 더 진한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님과 같이" 찬양하시겠습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주 자비 강같이 흐르고 주 손길 치료하네
고통 받는 자녀 품으시니 주밖에 없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이 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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