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일곱 교회 순례(3): '버가모 교회' (계 2:12-17)

  • 잡초 잡초
  • 474
  • 0

첨부 1


버가모 교회: 「발람을 따르는 목회자, 니골라당의 교훈을 쫓는 교인들」

<세상을 변혁시키는 교회>
리처드 니이버(Richard Niebuhr, 1894-1962)의 명저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이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 문화 사이의 관계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석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 니이버는 두 가지 양극단적인 입장을 소개합니다.

먼저 극단적으로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입장을 'Christ Against Culture,'
즉 '문화에 대적하는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절대로 세속적인 문화와 타협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언제나 세상을 죄악시해서 세속 문화에 등을 돌리려는 입장이지요.

그 다음에 극도로 자유롭고 개방적인 입장을 'the Christ of Culture,'
즉 '문화에 함몰된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교회와 세상 사이의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세상 풍조를 그대로 따라하는 입장이지요.

니이버는 이와 같은 양극의 입장이 다 문제가 있다고 보면서
가장 적절한 해결책으로서 'Christ as the Transformer of Culture,'
즉 '문화의 변혁자로서의 그리스도'라는 입장을 제시합니다.

저는 니이버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교회가 세속 문화를 등지고 산 속에 칩거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무섭다 해도 교회는 홀로 거룩한 척, 고립해서 살 수 없습니다.
세상 한 가운데,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세상을 위해, 주님의 거룩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함께 떠내려가서도 안 됩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세상풍조가 이런데 교회라고 별 수 있나" 하면서
세속 문화와 야합하려는 자세도 큰 문제입니다.

교회가 지향해야 할 자세는, 니이버가 주장한 그대로, 세상을 변혁시키는 일일 것입니다.
온갖 죄악과 불의와 우상숭배가 판을 치는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혁시켜야 합니다!

<양극으로부터 유혹을 받은 버가모 교회>
오늘 우리는 소아시아의 세 번째 교회, 버가모 교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버가모의 교회는 세상 문화를 변혁시키는 교회가 되라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한편으로 믿음의 순수성을 잘 지키는 교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 세속 문화와 완전히 타협하여 끌려 다니는 교인들도 많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이 보시는 버가모 교회의 진짜 모습은 어떠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버가모 교회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버가모는 소아시아의 일곱 도시 중에 가장 북쪽에 위치한 소아시아의 수도였습니다.
에베소 다음으로 번영했던 도시가 버가모였습니다.

그런데 '버가모' 하면 퍼뜩 떠오르는 것은 황제숭배와 우상숭배였습니다.
로마 황제를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하는 황제숭배의 본거지가 버가모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상잡신을 섬기는 신전들이 즐비한 곳이 또한 버가모였습니다.
버가모 사람들은 특히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라는 뱀신을 숭배했는데,
그 이유는 뱀이 각종 병을 치료하는 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뱀신을 '구주 아스클레피오스'라고 부르면서 거대한 신전까지 지어놓고
뱀신 숭배에 열을 올렸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뱀을 사단의 모형으로 보았기 때문에, 본문 2: 13의 '사단의 위(位),'
즉 '사단의 보좌'라는 표현은 특히 이 뱀을 숭상하는 신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버가모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버가모에는 무려 20 만권의 도서를 소장한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책을 일일이 손으로 베껴 써야 할 때였는데
20 만권이나 되는 장서를 소장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버가모'라는 이름은 책을 쓰는 양피지(PARCHMENT)에서 왔다고 합니다.
'책의 도시'가  바로 버가모였다는 사실이지요.

버가모 교회는 역사가 짧았고 교세도 빈약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는 그 어느 교회보다도 양극단적인 압력과 유혹을 많이 받은 교회였습니다.
한편으로,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은둔형 교회가 되는 유혹이었습니다.
'Christ Against Culture'의 유혹을 받았던 것이지요.
이 경우 믿음의 순수성을 지킬 수는 있지만 선교의 어장을 잃게 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세상과 타협해서 복음의 순수성을 훼손시키는 유혹입니다.
'Christ of Culture'의 유혹입니다.
이 경우 우상숭배하고 음행하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지는 않습니다.
세상과 더불어 할 것 다하고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 문화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주님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 말씀은 세상 풍조에 빠져 쉽고 편안한 길을 가려는 'Christ of Culture'를
지향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경고하시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虛와 實>
여러분, 그렇다면, 버가모 교회는 도대체 어떤 교회였을까요?
주님이 평가하시는 버가모 교회의 참모습은 무엇이었을까요?
버가모 교회도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장점과 단점이 다 있었습니다.
먼저 주님이 칭찬하신 장점은 무엇입니까?

버가모 교회의 장점
본문 13절 말씀을 다같이 보세요.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버가모 교회의 장점을 지적한 말씀인데 크게 두 가지를 칭찬하시고 있습니다.

첫째로, 버가모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습니다.
믿음의 순수성을 지켰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조를 지켰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버가모 교인들이 주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은 환경이 어떤 환경이었습니까?
사단의 위, 즉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단의 본거지, 사탄의 총사령부가 있는 곳이 버가모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버가모는 뱀신 아스클레피오스의 본거지였으며,
로마 황제숭배의 총사령부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주변에 우상잡신을 섬기는 사탄의 세력들이 맹위를 떨치는
환경 한가운데에서 버가모는 주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사탄을 섬기는 사람들은 버가모 교인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부인할 것을 종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어떤 유혹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둘째로, 버가모 교회는 순교자가 속출하는 와중에도 주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안디바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버가모 교회가 낳은 순교자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안디바는 틀림없이 뱀신을 섬기는 사람들이나 황제숭배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안디바는 불로 달군 놋쇠 안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순교당한 주기철, 최권능 목사님 같은 순교자였던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안디바와 같은 순교자들이 속출하는 가운데에도 지조를 꺾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담력을 가지고 끝까지 주님의 이름을 믿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와 같이 참 어렵고 가혹한 시대에
신앙의 지조를 잘 지켜낸 버가모 교인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버가모 교회와는 매우 다른 분위기 속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핍박을 받거나 순교당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어 아주 쉽게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시대 속에 삽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인 원리가 변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기 쉬운 시대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 어렵고,
예수 믿기 어려운 시대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가 오히려 쉽다."

편안하고 자유롭게 예수 믿을 수 있는 시대에 오히려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핍박과 순교가 몰아치는 엄혹한 시대에 오히려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 내리교회는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서 안 될 것입니다.
예수 믿기 쉬운 시대일수록 참된 마음으로 신앙생활하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우리는 버가모 교회와 같은 핍박이나 환란을 당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우상들과 세속주의의 유혹에 둘러 쌓여있습니다.
버가모 교인들이 순교 한 가운데에도 주님의 이름을 붙들고 주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신앙의 지조를 잘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버가모 교회의 단점은 무엇일까요?

버가모 교회의 단점
본문 14-15절을 보세요.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렇게 믿음의 순수성을 잘 지켜냈던 버가모 교회도 몇 가지 책망받을 일이 있었습니다.
밖으로부터 찾아오는 환난과 순교는 잘 참아냈는데 안이 문제였습니다.
외부의 적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 훨씬 더 무서웠습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드라마를 보더라도 왜적을 맞서 싸우는 것은 쉬운데
내부의 적을 이겨내는 것은 정말 어렵지 않습니까?

버가모 교회는 뱀신 숭배자들이나 황제숭배자들이 가하는 핍박은 잘 이겨냈는데,
교회 깊은 곳으로부터 생겨난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첫째로, 목회자들이 마치 발람처럼 하나님의 참말씀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발람이 누구입니까?
타락한 선지자의 대표가 발람 아닙니까?
'발람'은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참말씀을 전하지 않았던 거짓 예언자였습니다.

민 22-25장 말씀을 보면 '발람'과 '발락'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족속들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를 두려워 한 모압의 왕 발락이 꾀를 냅니다.
선지자인 발람을 자기 나라에 초청해서 이스라엘을 제발 저주해달라는 작전이었습니다.

발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이었음에도 하나님께서 계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발락이 보낸 사자들이 발람을 찾아왔을 때 처음에
발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그들의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모압으로 가서 발락이 원하는 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발락이 더 높은 사람들을 보내고 계속해서 물질 공세로 유혹했을 때
마침내 발람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발람은 결국 돈이 탐이 나서 발락에게로 나귀를 타고 가게 되었는데
이 나귀가 길을 벗어나 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발람은 길을 똑바로 가지 않는다고 해서 나귀를 세 번씩이나 때렸습니다.

그러나 나귀가 모압으로 가는 길을 가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을 막아섰기 때문입니다.
나귀는 칼을 든 천사를 보았는데 발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돈과 명에로 눈꺼풀이 뒤집어 씌어있었기 때문에 안 보였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뽑아 세우신 지도자 발람은 이렇게 나귀만도 못한 사람으로 추락했던 것입니다.

결국 발람은 모압왕 발락에게 가서 세 차례나 예언을 했습니다.
세 차례의 예언을 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두 발람의 입을 강권적으로 막으셔서
이스라엘을 저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했습니다.
발람은 자기의 뜻과는 상관없는 예언을 하게 되자 당황했습니다.
그리하여 모압왕 발락에게 참으로 무서운 흉계를 알려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해서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도록 만들었던 것이지요(민 31: 16).
모압 여자들이 자기들이 섬기는 신 바알브올 앞에 우상제물을 차려 놓고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해서 우상숭배와 음행에 빠지도록 계략을 꾸몄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종이나 세상의 명예와 물욕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참 말씀을 전하지 않는 삯군목자, 거짓 선지자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버가모 교회에 바로 이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참 말씀을 선포하지 못하고 뇌물과 명예에
매수가 되어서 우상숭배와 음행을 은연중에 조장한다는 말씀이지요!

무서운 환난과 핍박은 물리칠 수 있어도 부드러운 유혹에는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돈에 넘어갑니다.
명예욕을 이기지 못합니다.
정욕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참길이 아님에도 그 길을 잘도 걸어갑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정욕 때문에
발람처럼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우리 하나님이 뽑아 세우신 지도자들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일제가 환란과 핍박으로서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으니까 뇌물이나 명예, 향락 등으로
지도자들을 타락시키지 않았습니까?
뇌물을 먹은 지도자가, 높은 지위에 올라간 지도자가, 향락에 몸을 맡긴 지도자가
어떻게 신사참배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실로 지도자는 먼저 자신을 정결케 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교인들이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쫓아 기회주의적이고 방종한 생활을 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문제였습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니골라당은 전형적인 상황윤리주의자들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윤리도덕은 시시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음행을 해도 괜찮고 우상 앞에 바친 제물 고기를 먹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칭 진보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신앙인들이었는데
기독교야말로 가장 위대한 윤리종교라는 사실을 뿌리째 뒤흔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도 이와 같이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쫓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분명한 윤리적인 원칙도 없이 카멜레온처럼 상황에 따라 술도 마실 수 있고,
춤도 출 수 있고, 음행을 해도 괜찮다고 자기를 합리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니골라당의 방종주의, 상황윤리를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분명한 기독교적 가치관과 윤리적 원칙을 가지고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 이제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주님이 무엇을 촉구하시는지 봅시다.
16절 말씀을 보세요.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여러분, 이 말씀은 12절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마다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다르게 표현되어 있는데,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의 주님은 온유한 주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무섭고도 두려운 주님의 모습이 아닙니까?

발람이 나귀를 타고 발락에게로 갈 때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빼들고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돈과 명예에 매수가 되어서
어긋날 길을 가는 주의 종들을 치기 위한 칼이었습니다!
결국, 발람은 이스라엘 자손이 휘두른 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수 13: 22).

그렇습니다.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은 날카로운 양날 칼을 들고 계신 주님이십니다!
주의 종들이 세상욕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말씀을 전할 때,
교인들이 분명한 윤리원칙 없이 세상 풍조에 따라 떠밀려 살아갈 때,
이들을 치시기 위한 칼입니다.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혼탁해진 이 세상을 쳐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켜내기 위한 심판의 칼인 것입니다!

<만나와 흰 돌을 바라보며>
이제 결론으로서 17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성령께서 이기는 사람들, 즉 발람과 니골라당의 유혹을 이겨내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첫째로, 감추었던 만나를 주십니다.
만나는 'MADE IN HEAVEN,' 즉 천국 제품입니다.
하나님의 양식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먹여주셨던 하늘 양식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에 승리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신령한 양식을
주시기 때문에 절대로 굶어죽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만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새 이름이 적힌 흰 돌을 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흰 돌이란 고대 로마의 상징물로서 학문이나 체육, 법률
부문에 뚜렷한 성취를 하게 될 때 주었던 상(賞)입니다.
특히 흰 돌은 순결과 성결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복종하여 모든 주권을 주님의 손에 맡길 때
우리의 신분이 거룩하게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이지요.
더 이상 세상의 자녀요 마귀의 자식이 아니라 하늘의 자녀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지요!

고후 5: 17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옳습니다.
우리가 밖으로부터 오는 환난과 내부로부터 오는 유혹을
믿음으로 이겨내면 우리는 새사람이 됩니다.
순결하고 깨끗한 돌에 새 이름이 새겨지듯이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오늘 버가모 교회에 주신 말씀을 우리 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듣고
우리 모두 믿음의 순수성을 잘 지켜내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김 흥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