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중까지 견디는 사람 (마 10:16-22)

  • 잡초 잡초
  • 266
  • 0

첨부 1


마태 10장은 예수님께서 12 사도들을 이 세상으로 파송하시면서, 이들이 간직해야 할 자세와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이들이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8절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의 심정으로 주어진 일들을 감당하라는 말씀인 줄 압니다. 이러한 빚진 자의 심령은 예수님의 제자들로 하여금 교만해지지 아니하고, 끝까지 겸손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은 그저 나약한 모습으로 만 지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는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이라는 10절의 말씀에서 볼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권위가 있음을 말씀해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14~15절,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 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니라.”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디를 가든지 평화를 세우도록 애쓰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들을 감당하는 제자들 스스로가 평안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11~13절,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이 제자들에게 주어질 박해의 상황을 염두에 두시며 가르치신 말씀이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부분입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일해야 할 이 세상의 모습을 이리떼가 우글거리는 모습으로 비유하시면서, 이러한 세상으로 나가는 제자들의 모습은 양과 같은 모습이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모든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을 염두에 두시면서 구체적인 지침을 내려주시는데, 그 첫째가 오늘 본문 22절에 나와 있는 “나중까지 견디라”라는 말씀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26절에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master key처럼 사용하고 적용할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16절의 말씀, 곧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17절~22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나중까지 견디라”는 주님의 가르침의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나중까지 견디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몇 가지 예언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제자들을 핍박하게 될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이 받게 될 핍박은 아주 심각한 특징이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중적으로 더하여지는 핍박이라는 것입니다. 첫째로 이러한 핍박은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같이 이루어지는 핍박입니다. 17절에 나오는 “공회에 넘겨준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이것이 정치적인 핍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는 표현에서 이는 종교적인 핍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핍박은 같은 동족뿐 아니라, 이방민족에게서 같이 당하는 핍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18절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같은 동족에게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핍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러한 핍박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서도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1절,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우리는 이 21절의 말씀에서 이러한 핍박은 살아가는 현실의 과정에서만 일시적으로 받는 것을 넘어서서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그러한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제자들에게 가해지는 핍박의 특징은 이중적으로 더해지는 그러한 핍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중적인 형태의 핍박은 어느 다른 어려움보다 그 고통의 농도가 아주 심한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으면, 동시에 그 반대되는 대상으로부터는 동정이나 사랑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 사람에게 미움 받더라도, 저 사람에게는 동정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경우, 아빠에게 혼나면 엄마에게는 위로를 받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만일 양쪽 모두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면 얼마나 서글플까요? 또한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가정적으로 화목함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의 말씀이 잠언 17:1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고기와 생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우면서도 또 가정적으로도 불화가 끊이지 않는다면 얼마나 힘든 가정일까요? 또 어떤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아프고 힘들지만, 정신적으로는 안정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 반대로 정신적으로 힘들고 괴롭지만, 육신적으로는 다행히 병이 없어 아프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힘들고 아프면 그 괴로움이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제자들이 받게 될 핍박은 바로 이렇게 이중적인 핍박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들이 받았던 핍박과 그로인한 고난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우리는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은 우리 신앙의 최초 선배들인 초대교회 성도들이 겪었던 이중적인 아픔이요, 고통이요, 핍박이었습니다. 이분들이 이렇게 핍박받은 현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들은 이러한 핍박가운데에는 놓이지 않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제자들이 이러한 핍박의 상황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예견을 하시면서도 이러한 제자들에게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끝까지 견디는”이라는 말에서 “견디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견디다”라는 말의 우리말 어감은 어딘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기분이 들지만, 이 말의 헬라어인 “휘포메이아스”라는 말은 이렇게 수동적이거나 소극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의 단어라고 합니다. 이는 단순히 참고 버틴다는 그런 모습을 넘어서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의 적절한 사용을 히 12:2~3에서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여기서 “십자가에 ‘참으사’” 그리고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에 나타나는 “참다”라는 말이 바로 이 “견디다”라는 말과 같은 말인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대제사장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악을 쓰는 군중들 앞에서,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의 현장에서 예수님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참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견딘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배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엄청난 굴욕을 당하셨지만, 결코 당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미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저주를 받으셨지만, 결코 낙담하지 않으셨습니다. 욕을 당해도 맞받아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문자 그대로 원수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견딘다’라는 말의 뜻입니다.

이렇게 ‘견딘다’는 것은 많은 고통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고통을 면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피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고통 가운데 있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맡겨진 일을 다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엄청난 고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도 그리고 어떠한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주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사명을 다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 4:7)고 말합니다. 이것이 끝까지 견디는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환난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맙시다. 어떠한 환난과 고난을 당해서 “이것 역시 내게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병들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쉬게 하시는구나’하고 여겨야 할 것입니다. 사업이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어려움도 허락하시는구나’라고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끝까지 견디는 모습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St. Francisco of Assisi)는 늘 주님 앞에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내가 죽기 전에 이 두 가지 은총을 내려 주시옵소서. 영혼과 육체의 괴로움을 겪음으로써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을 맛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 사람마다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만 프란체스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위대하고 또 깊은 신앙의 기도입니다. 또 하나의 기도는 “또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그처럼 끝까지 참으실 수 있게 했던 당신의 그 불타는듯한 사랑을 저로 간직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어려움과 증오를 다 물리칠 수 있었던 그 사랑을 지닐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 과연 우리들에게 무엇이 문제입니까? 환경입니까? 다른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없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처음에 지녔던 그 처음 사랑이 사라진 것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끝까지 견디는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끝까지 견디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18세기에 유럽 대륙을 정복한 바 있는 나폴레옹이 사관학교 다닐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사관학교의 교관이 사관생도들에게 이런 질문했다고 합니다. “제군들, 똑같은 병력, 똑같은 지형조건에서 똑같은 무기를 가진 두 군대가 싸운다고 하자. 과연 어느 편이 이길 것 같은가?” 이 때, 나폴레옹이 일어나서 주저 없이 대답했답니다. “마지막 5분까지 견디는 자가 이길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버티는 자가 이길 것입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인내로써 결정됩니다.”  오늘 본문 2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나폴레옹의 말도 맞고, 주님의 말씀도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끝까지 견디라고 했는데, 그 끝은 어디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끝을 모른다는 데에 어려움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끝까지 견딜” 수 있겠습니까? 끝까지 견디는 비결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 “끝”을 우리가 자꾸 의식하여 그 끝을 우리 마음대로 정해 버린다면 끝까지 견딘다는 것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19~20절에 그 비결이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 비결은 우리 스스로 그 “끝”을 설정하지 아니하고, 순간순간, 매일매일을 성령을 의지하면서 살 때에 끝까지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시점을 의식하여 스스로 정하고, 거기까지만 견디겠다고 한다면 끝까지 견딜 수 없는 법입니다. 이 “끝”은 하나님만이 정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순간순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성령께 늘 의탁할 수 있어야 끝까지 견딜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16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여러분, “끝까지 견딘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끝까지 양이 되어라”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양으로 출발했다가 이리를 만나면 이리가 되고, 곰을 만나면 곰이 되고, 사자를 만나면 사자가 되는 그러한 변신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든 상관없이 양은 양인 것입니다. 온 세상이 변해도 나의 믿음에는 변화가 없고, 온 천지가 변해도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고, 온 인간이 다 변해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 처음 사랑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는 바로 그러한 인내의 사람이 바로 나중까지 견디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견디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내 자체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여러분들은 어떠한 사람들을 만나셨습니까? 이리와 같은 사람입니까? 곰과 같은 사람들입니까? 여우같은 사람들입니까? 하이에나와 같은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어떠한 사람을 만났든지 간에 우리는 언제나 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identity인 것입니다. 특히 우리 이민자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양의 모습을 끝까지 간직하는 것이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릇 우리가 이러한 양의 모습을 간직하고자 한다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견디는 법을 친히 함께 하심으로 허락하실 것입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간직하며 살아가도록 하십시다. (노 강국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