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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뛰어난 자(2) (창 4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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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우리 나라 출산율이 세계 최하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자녀를 낳지 않으면 2030년에 인구가 현격하게 줄고, 점점 사회가 고령화시대로 들어가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가기도 힘들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부가 출산을 장려하고, 자녀를 많이 낳는 가정에 특별한 혜택을 많이 준다고 합니다. 우리 교단에서도 이번 총회에 출산을 장려하는 운동을 실시하기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느 새 나라가 이렇게 변했는지 참 놀랄 일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해방과 전쟁의 세대만 해도 가정에 자녀들이 참 많았습니다. 저희 부모님도 7남매를 낳았는데 하나가 죽고 6남매를 두었습니다. 그 중에 제가 순서로 다섯째, 아들로 세 번째입니다. 어떤 성도는 제가 외아들인 것으로 아시던데 그렇지 않습니다. 저의 가정이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가정은 8남매, 10남매, 12남매, 그리고 더 많이도 있었습니다.

  성경적으로 분명 자녀는 축복의 열매입니다. 물론 옛날과 지금의 생육과 번성의 기준이 다르지만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문제는 자녀가 많으면 제대로 잘 통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이가 둘, 셋도 쩔쩔 매는데 여섯, 열 정도가 되면 부모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많은 가정에 그래도 주목받는 자녀는 첫째, 그리고 막내입니다. 중간의 자녀들은 관심도 적고 잘 눈에 띄지 않습니다. 스스로 커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자녀들이 자립심과 독립심이 강하다고 말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12명의 자녀가 있었던 야곱의 가정에 주목을 받던 아들이 장남이었던 르우벤과 막내였던 요셉, 베냐민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면으로 보아 주목을 받지 못하는 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성경의 흐름과 메시야 족보의 맥을 이어갑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과연 그의 뛰어남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본문과 당시 배경을 통해 오늘도 세 가지로 유다의 뛰어난 면이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해결자로 나타납니다. 죽음의 위기를 벗어난 요셉은 상인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유다를 비롯한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짐승의 피로 물들인 요셉의 겉옷을 보였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야곱은 요셉이 죽은 것으로 알고 통곡하며 아들 잃은 아픔에 한동안 슬픈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 뒤 2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세월동안 야곱의 가정은 평온하게 보냈지만 요셉은 달랐습니다. 애굽으로 팔려온 날부터 요셉은 고통과 시련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크고 작은 어려움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감옥에 들어가 외롭고 힘든 삶의 투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이런 역경의 세월 22년이 지난 어느 날,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워 주셨습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었을 때 당시 가나안땅을 비롯한 근동지방에는 극심한 흉년이 찾아 왔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심각했는지 일반 역사학자들도 이 부분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곳곳에 극심한 가뭄으로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렇게 땅을 정복하려고 싸우던 전쟁도 모두 중단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흉년으로 온 나라들이 시련을 당할 때 유독 애굽만 넉넉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함께 한 요셉이 왕의 꿈을 해몽하고 7년 동안 경제정책을 지혜롭게 펴서 애굽은 곳간에 먹을 것이 풍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변의 온 나라가 애굽으로,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기 위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2년 동안 버티던 야곱의 가정도 이제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귀중품을 싸들고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형제들은 거기에서 총리가 된 요셉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습니다. 22년의 세월이 지났고, 요셉도 많이 변했기에 이들은 그들 앞에 있는 총리가 요셉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처음 이들은 정탐꾼이라는 오해를 받고, 우여곡절 끝에 극적으로 양식을 구한 뒤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잠깐 먹을 양식을 가지고 돌아온 형제들은 다시 애굽으로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애굽으로 갈 때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야곱의 막내아들인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동생인 베냐민을 간절히 보길 원했고, 베냐민을 데리고 오는 조건으로 시므온이 애굽에 볼모로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냐민을 데리고 가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야곱은 베냐민을 어디를 잘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물론 형제 중에서 가장 어리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요셉을 잃은 뒤 야곱은 베냐민에게 사랑을 쏟고 있어서 그를 늘 자기 곁에 두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야곱의 말년에는 더욱 심했습니다. 베냐민이 없으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창세기 42장 38절에 보면, 야곱이 얼마나 베냐민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의 심경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베냐민)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요셉)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베냐민을 데리고 가면 죽겠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떠난 뒤 베냐민으로 위로를 삼고 살았는데 그를 데리고 가면 자기도 죽고 말 것이라는 그야말로 폭탄선언입니다.

  야곱의 가정에 커다란 문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어야 하는 상황이고,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야 했는데 아버지의 완강한 거절로 만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같은 문제에 직면했을 때 문제를 풀기 위해 나선 사람이 바로 유다입니다. 여기에서 돋보이는 유다의 모습은 바로 그가 해결사로 나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어떤 사람인가, 한마디로 문제의 해결사였습니다.

  뛰어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바로 해결하는 능력이 있는 자입니다. 우리 인생은 많은 문제와 난관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문제를 만나면 해결을 보기 전에 자기부터 주저앉는 것을 봅니다. 몹시 흔들립니다. 원망과 불평이 그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해결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더 꼬이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화를 부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문제를 잘 해결하여,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다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흔들리지 않았고, 그가 가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문제와 난관 앞에 나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까? 흔들리는 사람입니까? 혹 나로 인해 더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더 크게 만드는 사람은 아닙니까? 우리는 유다처럼 해결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 삶에 해결의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이 시대는 바로 그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문제가 해결되고, 난관이 극복되고, 희망과 용기가 솟아나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런 지도자가 필요하고, 그런 인격적인 사람이 필요하고, 그런 성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유다처럼 모든 일에 해결자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진실한 모습입니다. 오늘 이 사건에서 유다가 어떻게 그 문제를 풀어 가는가를 유의하여 보십시오. 당시 상황으로 보아 문제해결을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아버지를 설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이 본문의 중심 내용입니다. 여기 말씀을 보면, 유다는 우선적으로 베냐민을 꼭 데리고 가야하는 분명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시므온이 죽고, 나아가서는 온 가정이 굶어 죽는다는 말합니다. 그는 처음 요셉이 구덩이에 빠져 있을 때 요셉을 변호하고 도와준 것 이상으로 여기에서 아버지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글이기 때문이지 만약 음성으로 듣고, 눈빛으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유다의 진실하고 또한 아주 강력한 그의 어조를 더욱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형제 중에서 왜 유다가 이처럼 문제해결을 위해 나서게 되었는지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문제가 터지자 처음 장자였던 르우벤이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없지만 당시 정황으로 보면 다른 형제들도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르우벤도 형제도 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었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것을 유다가 해결한 것입니다. 왜 유다가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그 중요한 이유를 저는 진실 때문이라고 봅니다. 다른 형제들은 말은 하지만 진실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아버지를 속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속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오래 동안 그들은 진실하지 못하게 살아왔던 것입니다. 속일 수 없는 죄가 있었습니다. 그 죄로 아버지를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달랐습니다. 처음부터 유다는 요셉을 살리려고 했고, 사실을 묵인했을 뿐, 형제가운데 부끄럽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 중심과 마음이 아버지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진실이 결국 통한 것입니다.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서 인간세계에는 언제나 진실이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진실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세계는 끝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을 진단하는 기준은 바로 이것입니다. 진실이 통하지 않을 때, 그래서 불의와 불법이 성행할 때, 속고 속이는 일이 이어질 때, 그때가 바로 세상의 마지막입니다. 진실은 이 땅에 마지막 남은 보루입니다. 진실은 밝혀지고, 진실은 전달되고, 진실은 이 땅에서 모든 문제의 가장 확실한 해결책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자리에 온 여러분과 저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업적이나, 우리가 가진 어떤 것이나, 우리가 자랑할만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솔직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보고 싶어합니다. 우리의 모습 이대로, 핑계하지 않는 모습으로, 솔직한 모습 그대로 나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오직 그것뿐입니다.

  제가 이것을 깨닫고 부족하지만 저도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자녀에게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와 함께 일하는 교역자에게도 수시로 강조합니다. “우리 모두 진실하자고...” 우리 모두 하나님과 사람 앞에 솔직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희생하려는 자세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가만히 보면, 아버지의 말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 모든 형제와 함께 보내는 것은 모두가 안전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모두가 불행해질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한순간에 베냐민도, 다른 자녀도 잃을 수 있다는 감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입장을 잘 이해한 것이 유다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9절입니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결국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베냐민을 데리고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내놓겠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이런 자세는 아버지의 마음을 풀기에 충분했습니다. 결국 유다의 노력으로 베냐민은 형제와 같이 동행했고, 처음부터 요셉이 죽이려는 것이 아니기에 베냐민을 만난 뒤 형제들은 기쁨의 재회를 합니다. 가뭄의 때를 넘길 수가 있었습니다. 큰 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유다의 돋보이는 모습입니다. 그는 희생할 자세가 되어 있었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를 뛰어난 사람으로 만든 요인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귀할 삶의 자세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으로 뛰어난 자는 자기를 희생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일이나 삶의 현장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자입니다. 이런 자가 뛰어난 사람입니다. 사실 이런 자세로 살면 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명예만 얻으려고 하지 희생을 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하지 힘든 일은 피합니다. 예수 믿고 복을 받으려고 하지, 예수를 위하여 뭔가 내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신 길이 아닙니다.

  주님이 어떻게 사셨습니까? 처음부터 주님은 희생할 자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쩌면 주님은 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자기 몸을 불살라 내어 던지기 위해 오셨습니다. 한 알이 밀이 되어 죽으시기 위해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그 자세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중심으로 일을 하셨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마음으로 옳은 일을 위해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 자세로 결국 마지막에는 십자가의 길로 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에게 이런 자세가 없다면 우리는 주님을 제대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편하고 좋은 것 다 알지만, 내 희생과 수고 없이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내 시간이 희생되고, 내 것이 들어가고, 내 소중한 무엇이 힘으로 실려질 때,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죽을 각오와 자세로 어떤 일에 덤벼든다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시시하게 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적당하게 하려고 하기에 잘 안 되는 것입니다. 한번 죽을 각오로 해보십시오. 공부도, 사업도, 일도, 관계도, 사랑도, 믿음생활도, 죽을 각오로 한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훨씬 달라질 것입니다. 이런 각오와 자세가 정말 필요한 때입니다.

  유다는 뛰어난 사람입니다. 성경에 그에 관한 많은 부분이 가리워 졌지만 그를 깊이 연구하고 살펴볼수록 성경의 어떤 인물보다도 돋보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후손을 통해 다윗을 낳게 하고, 예수님을 탄생시킨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 유다처럼 어떤 일에 해결자가 되어야 합니다. 늘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희생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을 품고 삶의 현장으로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 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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