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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만남의 의미 (요 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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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한 15년 전쯤으로 기억이 됩니다. 제가 이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서 1년 정도 전임사역자로서 교회를 사임하고 교회를 한 부서만 맡고 시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대개 여러 가지로 준비가 되는 대로 기도원에 올라가서 나름대로 시간을 정하여서 기도하기로 작정하고 기도원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그전까지 제가 잘 다니던 기도원이 있는데 제가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운영하는 기도원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별로 큰 집회나 모임 행사 등이 없었고 주로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이 되면 학생들 혹은 청년 장년들의 수련회 장소로 사용하는 수양관 성격의 기도원이었습니다. 그러니 기도원 관리하는 분외에는 저 혼자밖에 없었습니다. 큰 예배당에서 정한 날을 채우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금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도움 받을 필요 없이 그냥 혼자서 있으면 될 뿐이었습니다.

때가 학생들이 수련회 오기에 한 달쯤 전 정도 되는 것 같았습니다. 운동 삼아서 크지 않은 기도원 마당을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당 한 가운데 흙이 보글보글 올라와 있는 자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뭔가 좀 이상하다 싶어서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개미가 집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열심히 땅 밑에 있는 굴속에 들어가서 무엇인가를 물고 나오고 또 열심히 다시 무엇인가를 물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흙을 물고 들어와서 계속해서 확장해서 짓고 또 먹을 것을 물고 들어가서 거기다 저장을 해두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개미집을 보는 순간 제 마음속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개미가 집을 지어놓은 그 부분이 바로 마당 한가운데여서 여름방학이 되면 학생들이 공놀이를 하거나 또 뛰어다니는 운동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장년들이 집회를 가지게 되면 자동차를 타고 와서 주차를 하게 되는 주차장 역할을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공놀이를 하다가 부글부글 흙을 파다가 모아놓은 그 부분의 개미집을 밟지 않을 리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개미들은 그렇게 수고했던 모든 것들이 허사가 될 것입니다. 더욱이 장년들의 집회가 있어서 무거운 자동차가 그 옆을 지나가게 된다면 일거에 그 집이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에 기도원 공사를 계속 했었고 또 끝난 지 얼마 안 되어서 벽돌을 쌓아 놓은 것이 있어서 제가 그것을 가져다가 개미집 주변에 동그랗게 둘레를 막아 놓았습니다. 그러면 아마 그 부분에 주차를 하지 못하겠지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더 높이 쌓아 두고 싶었지만 그럴 필요 없다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마음먹으면 아마 그 벽돌 치우고 그 부분에 주차할 것이라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또 학생들도 운동장 가운데니 그 벽돌 치우고 열심히 운동하고 공차고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대단한 연민의 정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조그만 개미들이 자기들의 온힘을 다하여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집하나 지었는데 그 집 한칸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일시에 외력에 의해서 무너져 버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참 안됐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고해도 소용없는 일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고해도 소용없고 앞을 내다 볼 수 없고 또 내 힘의 범위를 넘어서는 다른 힘을 내가 받게 되었을 때 어떻게 이겨볼 도리 없는 것이 세상에 사는 미물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 생각됩니다. 아마 우리 인생에도 이와 같은 일이 여럿 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 이 분당 신도시가 생길 때 분당의 모습을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 주변 모든 것도 마찬가지고 모델하우스가 생기고 처음에 사람들이 방문할 때 좁고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왔다가 차가 막혀서 매우 큰 고생을 하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 지역은 그저 평평한 야산 지역이었고 일부 촌락들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별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신도시를 만든다고 해서 높은 곳을 깎아서 얕은 곳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고 그곳에 집을 지었습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사람들은 거대한 군락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분당이나 용인이나 수지나 구성이나 광주나 이 주변일대 모든 것을 다 합치면 아마 10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에 지나다니면서 현재의 모습을 볼 때 정말 인간들의 힘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네발 다 땅에다 대고 기어 다니는 동물들은 아무일도 하지 못하지만 두발로 걸어 다니고 두 손이 자유로운 인간들은 머리로 생각하고 그 손으로 무엇인가를 직접 만들고 해내는 것을 봅니다. 정말 인간의 힘이 만만치 않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 개미들이 자기들이 집을 지은 것처럼 우리 인간도 자연의 재해 앞에서는 꼼짝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지진이라도 한번 나면 해일이라도 한번 쓸리면 폭풍이라도 불어오면 우리의 모든 수고는 하루아침에 스러져 나간다는 생각을 하니 그 개미나 우리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도대체 그 죽음의 문제를 맞이할 때 그 한계의 지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살아갈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그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모든 수고한 것이 아무 소용없는 것이 되는 것인지 우리 인생을 생각해 볼 때 참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는 것도 우리들에게는 늘상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힘을 능가하는 불가항력적인 여러 가지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도 도무지 방법이 없는 상황 그저 무능하게 그 상황을 접수해야만 되고 당해야만 하는 이와 같은 상황 속에 놓여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그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살렘에 있는 양문의 곁에 즉 양문이라는 것은 예루살렘의 여러 문 중에 양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문입니다. 그 문 곁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이 베데스다라는 말뜻은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많은 병인 소경 장애인 혈기 마른 이들 즉 요즘 말로 따지면 중풍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때 천사들이 내려와 그 물을 동하게 하면 그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뛰어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낫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병자들 중에 특별히 가련한 사람 하나 있습니다. 38년이나 되는 중병으로 장병을 앓고 있는 환자였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38년이나 병을 앓고 있다면 이 사람이 얼마나 피폐되고 초췌해 있겠습니까? 너무나도 처참한 지경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물이 동하면 자기도 좀 들어가 낫고 싶었지만 자기의 몸으로는 도저히 기력이 안 돼서 갈 수가 없었고 누가 자기를 도와서 거기다 넣어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다가가 대화를 시작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사람은 자신의 소망과 자신의 현재에 위치한 모습을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네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치유와 자유를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낫게 되어 일어나 걸어가게 됩니다. 시간이 흐른 후 예수님께서 세 번째 그 사람과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으니 바로 나은 이후에 성전에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38년 된 병자와 물음과 명령과 유지 및 바른 생활을 위한 이와 같은 지도의 세 가지 대화의 사건을 통해서 이 사람이 온전한 자유와 기쁨을 얻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가운데 몇 가지를 생각해 보고 과연 우리 주님을 만난다는 것이 내가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무엇보다도 자비의 집 베데스다 즉 하나님의 은혜의 곁에 있어도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여전히 병든 상태 속에 있는 가련한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 곁에 있는데 자비의 집이라는 이름의 못가에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병이 낫고 있는데 전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은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합니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픈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배가 아프거나 머리가 아프거나 어떤 아픈 것이 있으면 병원에 가서 의사들의 치료를 받거나 아니면 약을 먹거나 아니면 나름대로 상식을 가지고 내가 그 병을 낫기 위해서 애를 쓸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길 찾으려고 우리에게 어떠한 노력과 수고와 애씀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른길 찾지 못하고 엉뚱한 길로 달려가면 열심을 내도 소용없는 것이 됩니다. 일단 바른길이 선택되어질 때 힘껏 달려가게 되면 그것이 우리들에게 유익한 길이 될 뿐입니다. 오늘 그것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자비의 집’ 하나님의 은혜의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고통 속에 애련한 심정으로 아파하며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음을 봅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지만 내 마음에는 다른 생각으로 갈등이 있고 다른 생각이 문득문득 스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이에 생각이 혼미해고 또 다시 상념 속에 잡히는 분들은 계시지 않습니까? 38년 된 중병환자처럼 내가 주님 앞에 나온 지 오래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까지 예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사시는 분들은 계시는 것 아닙니까? 오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찾아오신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 찾아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일정 기사를 보니 어떤 류마티스 환자를 주로 치료하는 대학병원의 의사분인데 그분에게 진료를 받으려고 삼천칠백명이 대기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삼천칠백명이 진료신청을 하고 대기를 하는데 적어도 2년 이상은 기다렸다가 몇 분정도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진료접수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명 짧은 사람은 그 가운데 먼저 갈 것 같아요. 그런데 오죽 답답하면 삼천칠백명이 앞에 대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뒤에 접수를 하겠습니까?

세상에는 아무리 애써도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무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 인생에는 우리 자신의 힘만 가지고는 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아니면 너희는 쉴 수 없으니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도대체 왜 우리 인생들은 내게 주신 어려움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나름대로의 고통과 아픔 속에 괴로워하는 것일까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어진 어려움을 해결할 만한 능력이 있는데 왜 해결 못하겠습니까? 내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방법도 알지 못합니다. 방법을 알아도 그것을 실행할만한 힘이 없이 때문입니다. 방법조차 알지 못하면 더 답답하고 방법을 아는데 더 힘이 없다면 더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런데 병든 상태 속에서 38년이나 기다리고 있는 환자처럼 우리 생활의 늪 가운데서 도저히 헤쳐 나오지 못하는 이와 같은 아픈 인생들의 모습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앞에 마음이 간절해 지는 것입니다. 정말 38년 된 병자가 마음속에 애련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간구하듯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임하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온 이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다가 오시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 두 번째는 우리 인간의 문제 해결은 결국 우리들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해결은 예수님과 만남의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를 모르시는 분들 예수를 만나서 믿음이 생길 때 그것으로 우리 문제 해결의 시초가 됩니다. 이미 믿는 분들 절실한 기도 속에 주님을 만남으로 문제가 해결됩니다. 말씀에 충격에 부딪쳐 기도 가운데 내 마음속에 주님의 응답의 뜨거운 역사 속에 그리고 내 생활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권세 속에 우리의 문제를 해결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얼굴을 직접 면대해서 만나는 방법, 그 사람의 글을 통해서 만나는 방법, 그리고 그 사람이 한 얘기를 통해서 테이프를 듣는다든지 아니면 그 사람의 모든 어록을 통해서 만나는 방법 여러 가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시대에 살았던 사람들과 그 사람의 기록을 통해서 그 사람과 만남으로 우리는 대화하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주님과의 대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그리고 생활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기도 속에 주님의 뜻을 마음속에 확신 받음으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다양한 만남은 결국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의 접근임을 봅니다. 오늘 38년된 환자에게 와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하신 것은 그의 상태를 이미 아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유도질문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환자가 낫기 원하는 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묻는 것은 그 환자의 입술로 낫게 되기를 고백하는 것을 듣고 고쳐주시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자신의 사정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어려움과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있는 그대로를 고백합니다. 심지어는 그의 소망까지 고백합니다. ‘누군가 나를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혹시 당신이라도 나를 넣어주시면 나는 저기 들어갈 수 있겠습니다’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명령하십니다. ‘일어나 걸어가라’ 그리고 그의 병이 나아 그 문제가 일거에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의 삶이 달라진 것을 통하여 그에게 영적인 문제까지 해결해 주시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는 순간 명령을 듣고 실행하는 순간 우리들에게 새로운 은혜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문제가 해결됨을 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은혜를 입으면 해결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 은혜의 체험입니다. 이 은혜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더욱더 깊어집니다. 오랫동안 예수 믿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왜 아직도 어려움을 겪고 있을까요? 그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는 것을 우리는 늘 의문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에게 닥치는 어려움은 왜 닥치는 것일까요? 오늘 이 자리에 오셨을 때 어떤 한 가닥의 소망과 희망을 가지고 이 자리에 오신 분들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초정해서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온 것입니다. 내 마음에 오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오고자 하는 마음을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누가 주장하십니까? ‘내가 오늘 예배 가야지. 예배드려야지.’ 주님이 그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그 마음 주셨다면 우리에게 그 무엇인가 원하는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때로 우리들에게 어려움 주신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사사기 2장 18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함으로 말미암아 대적들로 인하여 압박과 괴롭힘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버리고 거역하는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고통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돌아와야 그들이 은혜와 축복을 받으니 대적을 통해서 고통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어려움 속에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하기를 원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어려움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고 그 하나님께 돌아오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이루시는 여호와의 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약 20년쯤 전에 서울에 화곡동이라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외곽지대여서 별로 붐비지 않는 곳입니다. 저희 집 마당에 사과나무 큰 것이 있었습니다. 2층 마루에서 내려다보면 사과나무가 굉장히 커서 2층 위까지 올라가서 아주 크기도 하고 아름다운 사과나무였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그곳이 공기도 맑고 그런 곳이었는데 그 잎사귀에 아침에 아침이슬이 맺혀져 있을 때 햇빛이 비치면 그 영롱하게 빛나는 모습들 그리고 파릇한 작은 잎사귀들 또 커지기도 하고 또 새들이 와서 나무위에 앉아서 우짖기도 하는 것을 보면 정말 너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사과 꽃 보셨어요? 여러분 배꽃은 많이 보신 것 같은데 사과 꽃은 많이 잘 못 보셨을 거 같아요. 여러분 사과 꽃도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불면 사과 꽃이 막 떨어져서 되는데요. 나무 전체에 꽃이 핍니다. 사과가 그 나무 전체에 매달리기 때문에 사과 꽃이 나무 전체에 핍니다. 그래서 꽃들이 막 바람에 떨어지는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꽃이 아주 화사하게 핍니다. 그런데 그 사과나무가 사과를 먹으려고 심은 건 아니죠. 나무는 굉장히 크긴 한데요. 왜냐하면 거름을 많이 줘야 하는데 집에서는 그렇게 거름을 많이 줄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사과나무가 사과는 작게 열렸다가 대부분 떨어집니다. 거름을 많이 주지 않으니까. 그러면 사람들이 오면 사과라고 주기도 하고 또 그런 맛으로 관상용으로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참 아름답고 또 마음속에 많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신대원 3학년 때로 기억이 되는데 어느 날 학교가면서 동네 화원에 가서 부탁을 했습니다. 사과나무에 가지가 너무 많은 것 같은데 가지 좀 쳐달라고, 전지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돌아와 보니까 사과둥지만 남기고 싹 잘아버렸어요. 저는 좀 황당했습니다. 사과 먹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자를 수가 있는가 좀 화가 나서 전화를 했는데 그분이 설명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그 사과나무 1, 2년 자르는 것도 아니고 매년 잘라드렸는데 올해는 나뭇가지가 너무 번성해서 그 위에서 양분을 뽑아 올릴 때 그 나무가 가지고 있는 뿌리에 비해서 양분을 너무 많이 뽑아 올릴 것 같았고 그렇게 되면 나무가 죽기 때문에 올해는 가지를 싹 치는 것이 나무에게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얘기를 듣고 역시 사람이 무지하면 용감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제가 몰랐으니까 그렇게 분기가 팽창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죄송하다고 얘기하고 제가 참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는 너무나 많은 가지들이 있습니다. 그 가지가 각자 양분을 뽑아 올리면 그 뿌리가 그 양분을 감당하지 못해서 결국 죽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각각 너무 곁가지를 많이 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지를 자르시는 것입니다. 똑 하고 전지가위로 자를 때 정말 똑똑똑 소리가 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뚝뚝뚝 잘라버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한쪽을 다 잘라버려요. 이쪽도 다 잘라버려요. 위까지 다 쳐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뚝뚝 잘릴 때마다 얼마나 눈물을 흘리겠습니까? 똑똑 잘리는 소리마나 그냥 아픔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고 가슴아파하고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더 아름다운 주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냥 놔두면 안 되겠기에 우리의 가지를 자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치기를 하실 때 우리는 내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없는 아픔과 괴로움과 섭섭함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것을 통해서 나를 견고하게 만드시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그 때를 참으며 기다리며 하나님의 은혜의 때는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는 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이와 같이 인생의 가지를 치고 하나님 앞에 훌륭한 믿음의 거목으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씀을 합니까? 그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을 찾게 하시고 하나님을 찾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만나게 하시고 하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대면하여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주심이 아닙니까?

오늘 이 병자는 병을 고치는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고 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영적인 문제까지 해결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어느 날 베드로가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깊은데 그물을 내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로서는 전혀 상식적으로 안 맞는 일입니다. 그런데 순종해서 내렸습니다. 물고기를 가득 잡았어요. 두 배에 가득 채우고도 동료의 배까지 불렀습니다. 그리고 배에서 내려서 베드로는 뭐라고 말했했습니까? 물고기 많이 잡아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뭐라고 말했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육신의 문제의 현상을 보고 그는 영적인 깨달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물고기를 이렇게 많이 잡게 하신 분은 누구신가? 이것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고기를 많이 잡고 나니 난데없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고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 삶 속에 육신적인 문제의 해결을 통해서 근본적인 영적인 문제 해결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의 육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영적인 문제 해결을 통하여 우리 삶에 있는 모든 육신의 문제를 주의 천국의 역사의 거리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순간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삶의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예수를 만나고 믿어 변화를 받은 사람들이 지속적인 효과를 위하여 경건한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그 사람을 또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더 중한 병이 생기지 않기 위하여 너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간음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한다라고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들에게 권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다시 그런다면 나도 그때는 어절 수 없다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예수 믿고 기쁜 생활을 하고 싶은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내 마음에 원하는데 그것이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하고 애쓰고 절제하려고 해도 그것이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와 같은 우리 마음의 고비를 넘어 주님의 은혜의 지경이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끔가다 예수 믿으시죠? 우리 믿음생활에 이제 진력합시다. 우리 헌신합시다. 그러면요 이런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세상이 아직도 너무 재미있어요.’ 여러분 세상이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세상이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아직까지는 예수 믿는 전력하기는 힘드십니까? 여러분 예수 믿으면 세상이 재미있는 것 보다 훨씬 재미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세상이 재미있는 것 보다 훨씬 재미있습니다. 자 따라서 합시다. ‘예수 믿으면 상실이 아니라 소득입니다.’ ‘믿음은 짐이 아니고 힘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은 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면 우리 인생이 끝장나는 것 같죠? ‘난 이제 더 이상 세상의 쾌락도 못 누리고 내가 만나던 친구들도 못 만나고 나는 더 이상 내가 누리던 것도 못 누리고 내 인생 끝나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으면 내 인생이 새로운 세계로 펼쳐지는 것을 말씀합니다. 여러분 늘 말씀드리지만 상위가치를 발견하면 하위가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상한 진리의 도를 발견하면 이 세상에서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던 모든 것이 마치 배설물처럼 여겨진다고 사도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우리 인생이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으면 우리 인생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머니에 은 덩어리 가득해요. 아니 은 덩어리 말고 돈이라고 합시다. 지폐가 가득해요. 그런데 길거리를 보니까 금덩어리가 주르륵 있어요. 그런데 아무나 가져가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부터 할까요? 금덩어리부터 잡을까요? 아니죠. 집어넣으려면 넣을 주머니를 비워야 합니다. 주머니에 있는 것들을 다 꺼내놓고 돈을 막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저 사람 미쳤어. 미친 사람이 아니죠? 더 귀한 것 있으면 그것 넣기 위해서 다른 것은 꺼내 버리는 것입니다. 즉 상위가치 발견되면 하위 가치는 속히 제거해 내야 상위가치를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예수 믿는 것이 정말 기쁘고 감사하고 내 마음에 감격스럽다라는 것을 우리는 마음에 느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삶 속에 정말 세상이 어렵고 거짓말쟁이 같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혼탁한 것 같지만 우리 눈에 쓰고 있는 믿음의 안경을 깨끗하게 닦으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이 많음을 봅니다. 세상이 어두운 것 보다 내 마음에 흐린 것은 아닌지 내가 쓰고 있는 삶의 안경이 흐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더불어 주의 역사를 이루고 싶어하는 이 세상 속에 우리가 해야 될 몫은 얼마든지 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더 이상 더 중한 병이 생기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경건하게 살아라 하는 것을 듣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믿었으면 주님이 원하시는 은혜의 삶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제 이 말씀만 드리고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두주 전에 1박2일로 설악산을 다녀왔습니다. 백담사 계곡을 거쳐서 희운각 대피소에서 하루 쉬고 곡령 능선을 거쳐서 비선대로 넘어오는 코스로 왔습니다. 한 이틀 동안 쉬다 걷다 해서 총 걸은 시간이 22-24시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매우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둘째 날은 하루 종일 비가 와서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시원하구요. 그런데 하룻밤을 자야 되는데 그 희운각 대피소가 옛날이 지은 것 같아서 아주 상태가 열악했습니다. 요새는 산에 대피소 지으면 깨끗하게 잘 지어 놓는 것 같은데 이것이 옛날 집이라서 그렇게 썩 좋은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공간도 아주 좁게 배정해주었습니다. 다른 데는 담요 접으면 반장이 한사람 자는 공간인데 거기는 반에 반인 거 같아요. 그러니까 눕지 못하고 옆으로 누워야 한 사람 잘 수 있는 공간을 한사람 앞에 배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약도 안 받아서 일행 중에서 두 분이 미리 뛰어 가셔서 일찍 도착하셔서 거기에 장소를 확보하셨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늦게도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비는 죽죽 밤새도록 오는데요. 저희는 그래도 좁아도 잠들기 전이 좁지 잠들고 나면 좁은지 넓은지 모르지요. 그런데 보니까 비가 줄줄 내리는데도 밖에서 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물론 천막을 쳐놨지만 그 한데에서 밖에서 자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등산가다보면 대피소에서 1박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꼭 이렇게 예약도 못하고 늦게 온 사람들이 있으면 대피소 추녀 끝에서 자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처음에 예약한 사람이 자리를 잡고, 그 다음에 마루나 그 다음에 다른 데 그 다음에 사람들이 끼어서 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거기도 자리 못 잡으면 등산화 신발 놓은데 그 신발장 옆에서 쭈그리고 자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이 등산화가 냄새가 상당히 많이 납니다. 그런데 그 옆에 쭈그리고 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못하는 사람은 밖에 추녀 끝에서 또 자요. 그 비닐 깔고 또 덮고 또 이렇게 침낭하나에 의지해서 자는데 그것 보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참 안됐어요. 그 몸도 찌부둥할텐데. 그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 자리 하나 마련해놓은 것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 그래도 푹 자고 나면 다음날 힘을 내서 다음날 일정을 진행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때 이런 생각이 늘 들어요. 제가 여러분께 여쭤볼게요. 옆에 사람한테 물어봅시다. 천국에 우리 집이 있나요? 한번 물어봅시다. 천국에 우리 집 있나요? 마련해 놓으셨어요? 집사니까 나는 마련해 놨어. 집샀으니까. 여러분 천국에 마련해 놓으셨어요? 각자에게 마음이 서늘해져서 대답도 못하는 이들이여 천국에 마련해 놓으셨습니까? 마련하셨다면 안심입니다. 그저 예약해서 마련해 놨으면요 밤늦게 가도 거기에 예약해 놨지 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약도 안해놓았다면 불안한 것입니다. 밤늦게 가면 장소도 없고 밖에서 자야 된다면 얼마나 불안합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예수 믿어 구원받고 천국에 이르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행복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등불이 있을 때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신랑이 올 때 기쁨으로 신랑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다섯명을 등불은 있으되 기름이 없어서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문이 닫힙니다. 그리고 뭐라고 얘기했죠?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는 것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주님 앞에 갈 때 ‘주님 여기 내 집이 어디 있죠?’ ‘네 집이 여기야’라고 소개해 주실까? ‘나는 너 모르겠는데. 너희 집 없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마음에 상태가 될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네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할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예수를 믿어 구원을 이루며 천국에 하나님의 은혜의 집을 마련해 놓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이제 우리가 할 일을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그 날까지 주님의 천국을 이 세상에 이루며 주의 역사를 이루며 살다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믿음이란 예수 믿어 구원받아 천국에 이르며 이 세상에 있을 때 구원받은 백성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어 주의 천국을 이 지상에서 이루어 가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이라는 것을 믿고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의 천국에 우리의 집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면 이제는 마음에 따뜻함을 가지시고 이 세상에서 주의 나라를 이루시다 주님 나라에 가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의 성도들에게 정말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동안이나 장병을 앓으면서 고통당하면서 오늘일까 내일일까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다리며 애타게 기다리지만 기회를 갖지 못하는 그와 같은 안타까움을 갖지 말고 우리 주님 앞에 나와 주님과 대화하며 주님께 부탁하며 주님께 소원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는 성도님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 소원을 품고 주님 앞에 기도하고 주님께 소망하는 이들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주님을 바라보고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주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최 종 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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