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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이키라 (눅 15: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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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을 가리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곡조 붙은 기도라고 흔히 말합니다. 정성으로 마음을 다해 찬송을 부르기 때문에 찬송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한다. 찬송을 통해 위로받고, 변화되고, 치료되는 것을 체험합니다.

<커크패트릭>이라는 사람이 1892년 펜실베이니아의 한 집회에서 찬송가를 인도하고 있었을 때 목소리 좋은 한 청년이 독창자로 초청되어 많은 성도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단지 노래를 잘하는 직업적인 가수였을 뿐이었습니다. <커크패트릭>은 그의 영혼구원을 놓고 기도하던 중 찬송가의 가사를 쓰고 곡을 붙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작사 작곡한 노래를 그 청년에게 주어 집회에서 부르게 했습니다. 그 청년은 그날 밤 찬송을 부르면서 주를 영접했습니다. 그때에 불렸던 찬송이 331장 <나 주를 멀리 떠났다>입니다.

백화점 왕 J.C 페니는 시골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에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아내가 일찍 사망했습니다. 1929년 미국을 강타한 경제 공황으로 백화점 사업과 자선사업의 선두주자를 꿈꾸던 그의 꿈을 무너지면서 우울증 치료를 위해 약물을 의지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병원 복도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과 기도소리가 그를 예배실로 인도했습니다. 그때 들은 찬송이 43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이었습니다.
그는 찬송의 능력을 통해 새힘을 얻어 96세까지 왕성한 사업을 수행하다가 1971년 노먼 빈센트 필의 장례식 설교 가운데 소천했습니다. (시40:3)“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 찬송 331장(나 주를 멀이 떠났다)을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이 찬송가는 자기의 삶을 청산하고 주께 돌아온 한 신앙인의 신앙고백 형식으로 작사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연상케 합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자기에게 돌아올 상속 재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먼나라로 떠납니다. 그는 그곳에서 가진 재산을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모든 것을 잃고 돼지치기로 전락하나, 그는 문득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아버지에게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11-19). 후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작은 아들과 그를 환대하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20-24).

탕자의 비유가 우리들에게 교훈하는 진리가 아주 큽니다.

1. 하나님 아버지의 품이 얼마나 풍요로운가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긴 방황을 통해 아버지의 품이 얼마나 풍요로운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집을 떠날 때의 아들과 돌아 왔을 때의 아들의 가치관는 분명히 달라 보입니다. 집을 나갈때의 둘째 아들에게는 분명히 자기 나름의 욕망이 있었습니다. 특히 부자에 대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부자가 되면 세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품에서 느낄 수 있는 풍요로움은 생각에 없었습니다. 가정안에 훈훈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부자가 된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물질지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집을 나서면서 아버지의 재산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는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재산의 삼분의 일을 받을 수 있습니다(신21:17). 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욕망은 아버지의 재산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자 도구였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아버지와의 이별에서 얻을 수 있는 자유로운 독립, 그리고 물질과 능력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으리라는 탐욕, 소유욕, 권력욕, 등을 그를 충동질하였던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아버지께 순종하면 아버지의 뜻안에서 무슨일이든지 가능하였습니다. <아버지께 순종한는 삶>이란, 아들이 아버지의 수족이 되어 피동적이고 부자유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통해서 아버지의 지혜를 얻고 아버지가 이미 가지고 있는 넉넉함을 누릴 수 있는 풍요로운 삶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그는 이러한 축복의 잔을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믿음의 눈이 아닌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는 아버지의 풍요로움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품에 있을때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의 지혜와 경험을 무시한 그는 인생관과 세계관을 질서와 진리와 지혜를 벗어난 곳에서 찾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2. 아버지 품을 떠난 아들의 결과는 비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 있을때 세상을 바로 보는 믿음의 눈을 가지 못한 이 아들은 철저한 실패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질은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분명한 물질관이 없었던 그는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13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가 경험한 지혜를 무시하고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절제하지 못하였습니다. “허랑방탕하여”라는 뜻의 헬라어는 ‘아소토스’라는 부사로서 ‘무절제하게’, ‘방종하게’, ‘타락하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침내 재산을 다 탕진하고 그 나라에 흉년이 들게 되자, 그는 돼지를 치는 비천한 직업을 갖게 됩니다(15절), 돼지는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동물중에 하나였습니다. 올바른 물질관, 세계관, 인생관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천한 삶만이 주어집니다.

♬ 『탕자처럼, 258』복음성가를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탕자처럼 방황할 때도 애타게 기다리는/부드런 주님의 음성이 내 맘을 녹이셨네/
/오주님 나 이제 갑니다 날 받아 주소서/이제는 주님만 위하여 이 몸을 바치리라/
/불순종한 요나와 같이도 방황하던 나에게/따뜻한 주님의 손길이 내 손을 잡으셨네/
/오주님 나 이제 갑니다 날 받아 주소서/이제는 주님만 위하여 이 생명 바치리다/
/음탕한 저 고멜과 같이도 방황하던 나에게/너그런 주님의 용서가 내 맘을 녹이셨네/
/오 주님 나 이제 갑니다 날 받아 주소서/ 이제는 주님만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리/

3. 돌이켜 아버지의 품에 돌아오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적 사고로 볼때 “스스로 돌이켜”라는 관용어구는 회개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17절). 둘째 아들의 회개는 과거의 풍족함으로 인한 상대적 빈곤에서 시작되었으며, 실제적으로 아버지의 집과 세상과의 비교에서 느끼는 철저한 회개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18절) 표현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죄라는 개념은 “표적을 빗나감”,“길을 잘못 들어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범한 실수는 아버지를 통해 풍족함을 버리고 스스로 풍족함을 누리려고 한 것이 첫째였고, 둘째로는 이원화된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향하면서 아버지를 등진 것이었습니다. 그가 물질을 통한 풍족함을 얻기 위해서였다면 아버지 집안에서 훨씬 더 완벽한 풍족함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아버지의 품을 떠나보면 행복하지 않겠나?’하는 막연한 행복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품안에서 우리가 생활 할 때 만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하게 생각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 우리들의 말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 우리들의 행동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불필요한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짤라내는 아픔을 겪지 않고는 주님께 돌아올 수 없습니다. 돌아온다는 것은 철저하게 회개한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철저한 회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하심을 성령님의 임재하심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의 우리의 삶을 조명해 줍니다. 우리들의 삶을 스스로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성령 충만은 마치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능력을 믿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이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강조 점을 부정적인 측면에 두면 죄, 불복종, 반역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이고, 긍정적인 측면에 강조 점을 두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새로운 종교적 또는 도덕적 생활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단순히 심령의 변화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는 아버지와의 관계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은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은 비천한 삶에서 풍요로운 삶으로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은 모든 생활이 살아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은 잠들었던 자가 깨어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는 말씀을 선포한 것과 예수님께서도 이와 똑같은 내용을 강조하셨던 이유는 회개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마 3:2 ; 4:17 ; 막 6:12). 18절 서두에 나오는 “내가 일어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아나스타스’라는 말로 ‘죽은자가 살아났다’, ‘깨어났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께 돌아오면 죽은자가 살아나는 것이며, 잘들었던 자가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영혼이 돌아오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압살롬이 아버지를 반역하고 온갖 더러운 반인륜적인 죄를 짓고 처참하게 죽어간 아들의 모습을 보고 “내가 대신 죽었더라면” 하면서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는 다윗의 그 뜨거운 눈물은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하심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방탕하던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오면 당연히 있을 법한 분노 대신 그를 측은하고 불쌍히 여기는 긍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법을 자행하는 세리처럼 남의 것을 토색하고, 창기처럼 세상에게 정조를 파는가하면, 살인자들처럼 이웃의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자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탕자와 같은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불쌍히 여겨 지난날의 잘못과 허물을 묻지 않고 우리를 풍요롭게 복을 주십니다. 아버지 품으로 철저하게 돌아올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고 신 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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