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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거절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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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 한가지 견디기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절입니다. 거절을 하는 일이나 거절을 당하는 일이나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다같이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거절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때로는 얼마나 좌절감과 분노가 옵니까.  더군다나 여러분이 크게 기대하고 또는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거절을 당한다는 것은 그 애정과 존경과 사랑이 몽땅 다 슬픔과 좌절과 증오와 분노로 바뀔 수 있는 결과를 갖고 옵니다.  거절은 우리의 인생이 당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동시에 거절을 한다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사람, 아끼는 사이에 거절을 해야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힘든 일입니다.  거절을 하면 상대방에서 어떻게 반응할지를 안다고 할 때 더군다나 거절을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거절이라고 하는 아주 힘든 관계가 있어 왔습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이런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사람을 옮겨오신 후 모든 것을 다 허락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피조물은 인생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물을 주실 그런 마음으로 에덴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생명나무 열매도 맡기셨습니다.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한가지 하나님이 주시기를 거절하신 것이 있습니다.  거절이지요.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선악과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거절하셨습니다.  다 주시는데 그것은 안돼, 라고 거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절이지요. 
왜 선악과를 거절하셨을까. 

창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먹는 날에는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거절하셨습니다. 이것이 인류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첫번째 거절이었습니다.  이 거절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분명히 에덴동산을 주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인생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거절하신 것을 보면 분명히 이 거절은 미움에서가 아니라 사랑의 뜻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허락하시고 나서 거절하시는 것이니 계획과 뜻이 깊은 거절, 바로 사랑의 거절입니다.  사랑으로 거절한 그 속에 하나님의 크신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지혜와 판단력이 필요하면 하나님이 주실 것이다, 다른 것도 다 주셨으니 그것도 주실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내가 직접 너에게 주는 지혜로 살아라, 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지혜,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분별력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하나님은 또 하나의 큰 거절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죄를 지은 인생에게 가죽옷을 입히신 은혜의 일 직후에 일어났습니다.  가죽옷을 입히신 것은 하나님께서 죄지은 인생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기를 가리려는 모습을 불쌍히 보시고 튼튼한 가죽옷을 입히신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어린양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시고 그 은혜의 옷으로 우리를 입히실 것을 예언하신 일이었습니다.  그 놀라운 사랑의 옷을 입히시고 은혜의 옷을 입히신 다음 하나님의 하신 일은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으신 일입니다.  에덴에서의 생활, 생명나무의 길을 걷는 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은혜의 옷, 가죽옷을 입히신 다음에 거절하시는 것이지요.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이것이 인간이 경험한 하나님의 거절, 두번째입니다.  이 거절은 역시 사랑의 거절이었습니다.  거절을 통해서 인류는 선악과의 판단력대신 하나님의 성령의 판단력을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에서 거절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의 영원한 생명에 직접 초대되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거절됨으로써 천국으로 인도되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거절은 반드시 더 나은 은혜를 예비하신 후에 있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사랑하시기에 때로는 아주 심각한 거절을 하시는 것입니다.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의 거절. 이 것은 정말 큰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징계는 거절의 일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징계의 거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깊이 배우게 됩니다.  진정한 사랑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히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사랑의 거절. 우리는 이 거절의 체험을 통해서 사랑의 거절을 배우며 그 안에 있는 중요한 일, 즉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게 됩니다.  거절을 통해서 말입니다. 좌절과 낙심, 화나고 대들게 할 만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반응을 저울질 하시고 그리고 기다리시다가 큰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한 여인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거절의 극치를 경험한 한 여인입니다.  그 여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의 거절을 당했고 그리고 극복했으며 어떤 결과를 얻게 되었는지는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교훈이 됩니다.  거절을 당해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우리는 한 여인의 이야기에 주목하기를 원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의 북쪽 해안지역 게네사렛 지방에서 복음 전하실 때였습니다. 참고로 말씀 드리면 게네사렛이란 구약성경에서는 긴네렛(왕상15:20)이라고 하던 곳인데 갈릴리 바다 북서안의 비옥한 평야지역입니다.  갈릴리 바다를 게네사렛 호수라고도 부른 이유가 이 지역 때문입니다.  그만큼 좋은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셨는데 물론 이곳은 다 유대인의 사는 지방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갑자기 그 지방을 떠나시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 곳으로 방향을 잡으십니다.  그 곳은 이방인들이 사는 땅, 두로와 시돈 지방이었습니다. 

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따라가는 제자들도 많이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왜 갑자기 이방땅으로 가실까, 누구를 만나려고 하시나, 그렇게 생각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어떤 여자 하나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 여자는 가나안 여자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여자인 이 여인인 예수님을 향해 주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치는데 이는 예수님을 메시야, 즉 구주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방여인, 가나안 여인이 이 얘기를 한다는 것은 당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여인은 마가복음7장에 보면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즉 풰니키아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지방의 여인이었습니다.

막7: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더욱이 이 여인은 오늘 본문에서 가나안 여인이라고 했는데 가나안 여인이란 옛날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가나안 땅을 정복했을 때 이스라엘과 싸운 대적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원수의 후손이지요.  마음에 앙심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원수된 마음도 없이 이방인인데도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이 여인은 이미 사실 하나님의 딸이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이것을 알아 줄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께 찾아왔고 예수님은 이 여인의 간구하는 소리를 듣게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의 반응은 아주 냉담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여인이 크게 소리질러 간청하는 모습이었습니다.

15:22 여자가…소리질러 가로되 …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그러나 주님은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주님의 침묵은 거절의 의사를 보이시는 듯 했습니다.  여인은 계속 외치면서 간구하고 제자들은 이제 시끄럽고 번거로워서 주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 어떻게 좀 하셔서 저 여자 빨리 좀 보내주세요, 시끄럽네요, 라고요.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이 여인 같은 문제가 여인에게는 절대적인 문제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귀찮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말한 것입니다, 주님, 뭐 하나 주어서 보내세요, 라는 것일 수 있지요.  이 역시 어떤 면에서 사랑의 응답 같지만 사실은 깊은 사랑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절을 통해서 깊은 사랑을 오히려 보이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주님께는 사명의 집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융통성을 이미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수많은 인생을 구원하실 큰 팔을 사실 벌리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절 속에서 응답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여인의 간구는 계속 되었습니다. 

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여러분 이렇게 간구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다가 그냥 낙심하지는 않으십니까?  어느날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지요.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눅18: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

이 말씀을 하시면서 한 여인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 여인에게 억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의 재판관에게 문제해결을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이 재판관은 하나님도 사람도 무시하는 교만한 사람이었기에 이 여인의 요청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끈질기게 간청하는지 그렇게 거절해도 또 찾아와서 간구합니다.  결국 견디지 못해서 그 요청을 들어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눅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눅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오래 참으시겠느냐, 라는 질문을 하셨지요.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을 보기를 원한다, 라고요.  주님은 우리에게 거절을 통해서 믿음을 확인하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서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때때로 주님의 거절은 가혹합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은 마치 개와 같은 취급을 당하였습니다.  만일 주님이 우리를 개같이 여기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오늘 이 여인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15: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자녀의 떡은 이스라엘이 받는 말씀입니다.  개들은 이방인들입니다.  주님은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방여인의 간청에 응답의 말씀을 거절하시는 듯 했습니다.  아주 냉담하게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것을 뚫어야 합니다.  저는 때때로 꿈과 비전을 가지고 기도할 때 아,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라는 반대나 실망에 부딪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제게 주님은 이렇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사랑의 거절을 뚫고 들어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여인이 대답합니다.

15:27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기서 개란 어떤 들개같이 무서운 그런 개가 아니고 애완용 개, 집에서 키우는 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한 가족 같으면서 그러나 가족은 아닌 그런 입장을 말합니다.  다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서 지음 받은 인생들이나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중에서 천국으로 영접하는 자녀가 있고 그렇지 않은 인생들이 있어서 지옥으로 가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집안의 개가 아무리 귀여워도 천국 가지는 않습니다. 

제가 홍콩에 있을 때 햄스터를 키웠습니다.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고 우리고 귀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것이 많이 귀찮게도 했어요.  조그마하니까 박스에 구멍을 뚫어서 넣어 놓으면 언제 빠져 나가서 침대 밑에도 들어갑니다.  그래서 다시 꺼내는데 힘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죽어갑니다.  아이들이 웁니다.  기도까지 했어요.  그래도 죽었는데 얼마나 아이들이 우는지 , 헐 수없이 비오는 날 장례식을 했습니다.  마당에 가서 비 맞으며 묻어 주었어요.  한 집에 살면서 애완동물이었고 귀여움을 받았지만 그러나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인생이 천국 갑니다.  주님은 우리를 때때로 아주 버리시는 것 같이 하셔서 우리 자신에 대한 한없는 겸손을 일깨우시고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 자격으로 안 되는 구원의 은혜를 간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체험하게 하십니다.  거절은 겸손과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입니다. 

먼저,
첫째, 겸손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절하시는 것 같이 하셔서 겸손으로 인도하십니다.  아무리 대단한 일을 주장하고 의를 주장하고 이루려고 해도 교만하면 물리치십니다.  그리고 교만하지 못하도록 겸손한데도 불구하고 그 안에 있는 교만의 가능성까지 씻으시려고 거절하시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 죄인인 우리는 우리가 사실 개와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은 개와 같은 것입니다.  강아지 애완견이지만 그러나 개는 개입니다.  우리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존귀합니다.  사실 우리가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의 가치를 확인하시기 위해서 히딩크가 2002년 월드컵 때에 유명한 해외 파 안정환 선수를 무시한 것 같이 하면서 그의 승부욕을 자극하여 훈련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만든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정말 좋은 일꾼들은 그렇게 무시함으로써 자기 가치와 가능성과 믿음과 겸손과 열정과 헌신의 가능성과 변화의 은혜를 발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겸손한 세계에 서게 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겸손히 외치게 하십니다.  거절은 겸손의 세계로 인도하는 사랑의 막대기입니다.  그리고 그 겸손의 세계에서 내심으로는 이미 아, 내가 개이지만 그러나 자녀이다, 그러나 나는 자녀라 칭할 자격은 없다, 라는 탕자의 각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루한 모습 그대로 오히려 나타날 용기를 갖습니다. 

둘째, 은혜의 믿음을 주십니다

거절을 통해서 우리는 정말 회개하고 부족함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은혜를 구하는 일에는 죄인이라도 가능하다는 용기를 갖게 하십니다.  겸손과 용기를 동시에 주시는 것이 거절입니다. 거절도 당하다 당하다 보면 오히려 용기가 생깁니다.  그리고 큰 믿음이 생깁니다. 아, 나를 이렇게 거절하시는 저 분은 결코 나를 버리실 분은 아니다, 내심으로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것이 생깁니다. 거절에 대한 감각이 달라집니다.  이 단계에 서면 우리는 거절되어도 더 크게 간구하고 믿습니다, 주여,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여인은 이미 믿음으로 구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서서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마음, 그 믿음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4장12절에서 시작한 게네사렛 지방 갈릴리 지방 전도를 마태복음15장20절까지 하시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신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입니다.  오늘 마태복음15장21-28절에 이 여인, 가나안 여인이야기가 나오고 같은 사건이 마가복음7장24-30절에 나오는데 다같이 예수님의 두로 시돈 지역 방문은 다른 특별한 일이 없고 오직 이 여인 하나 만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신 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 하나를 보시려고 두로 시돈 지역으로 가신 것입니다.  물론 그 지방에서 다른 일들을 하셨을 수 있지만 기록은 없습니다.  이 여인의 딸을 구원하는 일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사랑의 거절의 신비가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시간에 인생에 쓰디쓴 거절을 경험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거절의 자리에서 낙심하지 않도록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거절의 자리에 서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거절당할 모든 죄와 이유를 짊어지시고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때 주님이 느끼신 것은 하나님의 거절이었습니다.  버리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외치셨습니다.

마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러나 이 거절 속에서 십자가의 속죄와 용서와 구원과 부활과 천국의 모든 은혜가 성취된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은혜입니다. 

요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고후6:2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은혜의 날에 거절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확신을 주십니다.  큰 믿음 속에는 거절을 이기는 확신이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 시로 응답 받는 신속성도 따르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거절은 한 여인을 놀라운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반드시 응답을 받아야 할 그 절박하고 꼭 필요한 소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는 필요와 소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소망의 인내를 해야 합니다.  기도로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여인으로부터 배우면서 주님의 사랑의 거절 앞에 설 각오를 합시다.  사랑의 거절을 하기도 어렵지만 받기도 어려운데 그러나 사랑의 거절을 통해서 은혜의 세계를 엽시다.  그리고 소원대로 되는 큰 응답의 세계에 초청됩시다.  이 은혜의 세계가 활짝 열리는 가운데 거절되었던 에덴보다 나은 축복의 세계가 열리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오치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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