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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곤고한 날에 이것을 생각하라 (전 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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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속담에 “시냇가에 돌들을 치우지 말라. 걸린다고 해서 돌들을 치워 버리면 시내는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돌들이 있기에 시냇물은 흘러가면서 노래 소리를 발합니다. 고난도 이와 같습니다. 고난이 없는 삶은 언뜻 보기에 편하고 행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의미하고 단조로운 삶으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사람의 정신은 계속해서 신선한 자극이 가해지지 않으면 무사 안일에 빠져서 둔해 지고 타락하게 됩니다. 인류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은 대체로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 그 일을 이루어 냈습니다.

이는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2천년 교회사를 보면, 교회는 핍박의 시대에 오히려 신앙이 견고해졌고 부흥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교회가 국가 권력의 보호를 받게 되어 핍박이 사라진 시대에는 타락했습니다. 역사상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심이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시기는 초대 교회 당시였습니다. 그 때는 예수 믿기 위해서는 핍박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를 비롯해서 열 명의 황제가 기독교를 심히 핍박하였던 약 250년에 걸친 기간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이 땅에 전파되었을 당시에 기독교인이 되려면 핍박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배들은 아름다운 신앙의 본을 남겼습니다.

거기 비하면 오늘날은 핍박이 사라졌음에도 신자들이 역동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불변하시는 신이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복음은 항상 새 포도주와 같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담는 부대인 사람들의 심령은 항상 새 것으로 남아 있지 못하고 낡아져 갑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심령이 날로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온전한 신앙인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고난으로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이 시간 저는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는 제목으로 고난에 대한 성도들의 올바른 태도를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 째로, 고난을 만났을 때 삶의 의미를 생각하십시오.

고난을 이겨내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라도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너끈히 고난을 이겨냅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맙니다.

유대인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플랭클은 2차 대전 당시에 나치에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비롯해서 여러 군데의 수용소를 전전했습니다. 그의 모친과 아내는 가스실에 보내졌습니다. 언제 가스실로 끌려갈는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절박한 상황에서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의 태도를 관찰하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는 그들을 삶의 의미를 갖고 있는 부류와 의미를 상실한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언제 가스실에 보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삶의 의미를 가진 사람들은 자포자기하지 않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들은 쉽게 질병에 걸려서 죽거나 정신적으로 폐인이 되어 죽어 갔다고 합니다. 나치의 패망과 함께 수용소에서 석방된 빅터 플랭클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로고테라피”라는 새로운 정신 치료방법을 발표하였습니다. 로고테라피란 환자에게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줌으로써 병든 정신을 치료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가 환자에게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 안에서 비로소 발견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삶이 무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도 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올바로 깨달아서 어떠한 고난도 능히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두 번 째로, 고난을 만났을 때 우리는 자신의 신앙상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는 배에 오르자마자 맨 밑층으로 내려가서 잠을 청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양심의 가책을 그런 식으로 피해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광풍을 대작케 하시니 요나가 탄 배는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선원들이 모든 기구와 화물을 버렸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말하기를 ‘이는 필시 신의 노여움을 산 사람이 이 배에 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선장이 모든 사람을 모아 놓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배 밑층에서 잠자던 요나도 끌려나와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랬더니 요나가 뽑혔습니다. 무리가 묻기를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고 하였습니다.

요나가 대답하기를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했습니다. 그러자 무리가 심히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고 했습니다.

바다가 점점 흉용하자 무리가 요나에게 묻기를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요나가 대답하기를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요나는 고난을 만나자 비로소 자신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 광풍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큰 물고기의 뱃속에 들어갔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러나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정한 회개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불순종하던 요나, 영적으로 잠든 요나를 깨우셨습니다. 지금 고난을 만났습니까? 고난의 때를 여러분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인생의 좌표를 바로 잡는 유익한 기회로 선용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 째로, 고난의 때를 성숙한 믿음을 갖추는 기회로 선용하십시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이것은 세인들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사단이 모인 곳에서 사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욥에게 무서운 고난이 다가왔습니다. 하루아침에 그는 모든 재산을 약탈당했습니다.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의 열 자녀가 한꺼번에 몰사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욥은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온 몸에 악창이 나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욥의 비참한 모습을 보다 못해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치 아니했습니다.

그 얼마 후에 욥이 재앙을 만났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욥이 당한 형편이 너무나 비참한지라 할 말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곧 그들은 이는 필시 욥에게 감춰진 죄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온갖 말로 욥을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불난 데 기름을 끼얹는 것과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욥도 자기가 무슨 이유로 고난을 당하는지 알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위인답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고백합니다. 고난당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 그가 확신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의 신앙이 정금같이 만드시기 위해서 연단을 허락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욥과 같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성도들도 고난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욥을 생각해야 합니다. 욥이 순전한 사람이었으나 그에게도 정금같이 되기 위해서는 연단이 필요했습니다. 하물며 욥에 비할 때 부족한 것 투성이인 우리에게 연단이 없을 리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기 전에 먼저 그릇을 준비시키십니다. 우리를 깨끗한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불로 연단하십니다. 또한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훈련시키듯이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단련시키십니다. 그런즉 고난이 다가올 때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시고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들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네 번 째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대한 애착을 끊기 위해서 고난을 주십니다.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믿음의 길에서 떨어지고 맙니다. 데마는 한 때 사도 바울을 도와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으나 그만 세상을 사랑하여 사명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성경에 “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17)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세상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보내셔서 세상에 대한 애착을 끊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셨을 때,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떡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떡이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고 무역을 하지 않았으나 한 사람도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느냐 하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보내셔서 우리가 평소에 의뢰하던 모든 세상적인 배경과 물질이 끊어버리십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바라보던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만 의뢰하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지금 고난과 역경을 만났습니까? 혹시 내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 적은 없는지 조용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가하면 주님을 위해 사는 데도 고난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그 날부터 오로지 복음을 위해 살았지만 극심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그런즉 우리는 어떤 연유로 인한 고난이 다가올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자신을 의뢰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뢰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기회로 선용해야 하겠습니다.

다섯 번 째로, 고난은 우리에게 자족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만사가 형통할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기 쉽습니다. 다 자기가 잘나서 잘 되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만나 인생의 쓴맛을 맛본 사람은 마음이 낮아져서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이전에는 진수성찬을 놓고도 감사할 줄 몰랐는데 지금은 박한 음식을 놓고서도 국이 다 식도록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죽을병에 걸려 본 사람은 자기가 숨을 쉬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도 감격해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돈이 많아야 행복한 줄 압니다 마는 진정한 행복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현대인들은 가진 것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빈곤 의식 때문에 불행합니다. 자가용이 없었을 때에는 소형차라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차를 소유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타고 다니는 차와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비교 의식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으면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할 줄 아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우리가 예수 한 분으로 만족할 때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이같이 자족하는 마음을 소유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섯 번 째로, 고난의 때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고난을 이기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자가 한량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때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하고 힘과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조국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붙잡혀 가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하고 다시금 힘을 얻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20-2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 29:11)고 하셨습니다. 우리로 고난당하게 하시는 그 자체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종내는 고난에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복을 누리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만들어줍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 이하에 고난의 뜻을 이같이 말씀합니다. "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진심을 바로 알 때에 우리는 모든 어려움을 인내할 힘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믿고 고난의 때에 구원의 손길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잠 24:16)고 하였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극렬한 풀무 불 가운데서 건지시고 다니엘을 사자의 입에서 보호하셨던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을 모든 고난과 역경에서 능히 보호하시고 건져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곤고한 날에 무엇을 하십니까? 전도서의 권면처럼 생각하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고난이 가져다 줄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또한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주님만 의뢰하고, 자족을 배우는 기회로 활용하십시오.

그와 동시에,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기대하십시오. 그리할 때 그 어떠한 고난이라도 성도님들을 쓰러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고, 고난을 통하여 성숙한 신앙인이 되고,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풍성한 은혜를 받았노라고 간증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 양 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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