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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 전파의 사명 (렘 20:7~9, 딤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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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교회를 연구하는 미국 학자 가운데 가장 걸출한 학자인 레너드 수윗은 그의 책 ‘영성과 감성을 하나로 묶는 교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성교회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교인수가 제일 적은 교회를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111년 된 교회의 목사로서 약간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기성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오랜 전통을 가진 교회입니다. 기성교회는 교인수가 적은 교회라고 하는데 우리 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인가 하는 질문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도 ‘생로병사’의 과정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처음에는 굉장히 거부반응이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무슨 죽음이 있어?”, “교회가 죽긴 왜 죽어, 하나님의 교회인데”. 그런데 교회가 죽어요. 성경에 나오는 교회들을 보세요. 소아시아 7교회가 다 죽었습니다. 지금은 그 곳에 가면 기둥 몇 개만 남아 있는 폐허가 된 교회들입니다.

  이유야 어쨌든 우리나라도 교회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한 때는 한국교회의 대표이고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평양의 장대현교회가 죽었습니다. 서문밖교회, 산정현교회가 죽었습니다. 그 밖의 많은 교회들이 죽었습니다. 교회도 분명히 죽습니다. 죽으면 안 되는 교회가 죽습니다. 우리 교회는 전통이 깊은 교회입니다. 좋은 의미에서 오랜 전통이지 나쁘게 말하면 늙은 교회입니다. 늙음 다음에는 죽음인데 우리교회로서는 교회의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절대 죽으면 안 됩니다. 교회는 생명체입니다. 유기체입니다. 교회는 영생의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주인이며 기초이며 머리인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절대로 죽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죽은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성장하는 교회의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끊임없는 복음전파의 열정을 가진 교회입니다. 복음적 말씀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예배의 역동성을 가진 교회입니다. 복음전파의 열정으로 교회의 생명을 다시 공급하는 일에 우리 교회가 앞장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전통 있는 교회이고 늙은 교회이지만 늙은 교회가 죽지 않고, 경륜을 갖추고 잎이 푸르고 열매를 맺는 교회의 모습을 보이기를 바랍니다.

  최근 일본에서는 암 환자를 찾는 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 개의 코는 훈련을 받아 정상인과 다른 입 냄새로 100% 암 환자를 식별한다고 합니다. 개보다 사람이 못한 것이 많습니다. 냄새도 제대로 못 맡는 것들이 잘난 체 할 때가 많습니다. 개는 냄새를 잘 맡습니다. 이 사람이 환자인지 아닌지 민감합니다. 우리는 영혼에 대한 민감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보고, 냄새를 맡아보고 영혼의 병이 들었는지 아닌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저도 신학교에 다닐 때는 참 민감했습니다. 그 때 버스를 타고 교회에 가려면 장충단공원을 지나야 했습니다. 주일 이른 아침에 공원에서 아침부터 운동하며 모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갑자기 “저 사람들이 다 구원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런 민감성과 감정이 사라지는 제 모습을 보며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효자입니까? 부모의 마음을 읽는 자녀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데 민감성을 가진 자녀가 좋은 자녀입니다. 마태복음 18:14에는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잃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또 요한복음 6:40에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닌 것은 하나라도 잃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인 것은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잘 헤아리는 좋은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복음전파는 엄한 명령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말한 적은 없습니다. 엄숙하고도 강력한 명령입니다. 복음전파에 하나님을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겁니다. 그의 나라를 건겁니다. 복음전파는 목숨을 걸고 해야 할 일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란 말을 ‘새번역’에는 “기회가 좋든지 안 좋든지”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스튼이란 분은 “사람이 듣든 듣지 않든”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고대 교부인 크리소스톰은 “특별한 때를 가지려 생각하지 말고 언제나 때라고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전파는 누구든지 해야 합니다. 언제든지 해야 합니다.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모두 복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화장실 청소하라”는 명령은 목숨까지 걸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전쟁 중에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은 목숨을 걸어야 할 명령입니다. 돌격하든지, 아니면 내 목숨을 내 놓든지 해야 합니다.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부대장은 사살할 권리가 있습니다. 복음전파는 화장실 청소가 아닙니다. “돌격 앞으로”입니다. 목숨을 내 걸 엄한 명령입니다.

  ‘전파하다’는 말의 원래의 뜻은 여러 가지입니다. ‘케루쏘’라는 단어는 선포하다, 공포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앙겔리조’라는 단어는 좋은 소식을 전하다는 뜻입니다 ‘카타레고’라는 단어는 남김없이 말하다는 뜻입니다. ‘라레오’라는 단어는 얘기하다는 뜻입니다. 신약에는 이런 복음전판의 단어가 112번 나타납니다. 복음전파는 막중한 사명인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가서 선포하든, 전하든, 남김없이 말하든, 얘기하든 어떤 방도이든지 복음은 전파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복음전판의 열정을 보세요. 사도행전 5:20에는 옥중에 있던 베드로와 요한이 천사들의 도움으로 풀려나면서 천사가 말합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그리고 25절에는 대제사장이 보낸 사람들이 탈옥한 사도들을 목격하고 와서 보고합니다. “옥에 가두웠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가서 서서 말하라고 한 명령을 문자적으로 가서 서서 전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복음에 대한 열정과 순종이 필요합니다.

  삶이 전도라고 많이 말합니다. 우리가 말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이 전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말로 전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말로 아예 안합니다. 그렇다고 삶이 대단히 전도가 된다고 자신하십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의 변명이고 잘못된 자세입니다.

  성경은 복음전파의 방법을 말합니다. 첫째는 오래 참음으로 해야 합니다. 왜 참음으로 해야 합니까? 로마서 9:22에는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내하시고 관용하시기에 우리도 인내하고 관용해야 합니다. 복음전파는 오래 참음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누가복음 15:4에는 “잃은 양을 찾아다니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양의 실수를 지적하지 않고 오랜 집념으로 찾습니다. 이런 인내가 있는 복음전파가 되기를 바랍니다.

  병상 세례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 병상 세례를 합니다. 평생을 권해도 듣지 않고 기회를 잃고 있다가 교회에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서 세례를 받는 경우입니다. 병상에서 세례를 받게 되면 목회자 입장에서는 참 감사하지요. 한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오래 참고 있으면 이렇게 병상에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일이 있습니다. 복음전파란 인내와 끈기가 필요합니다. 십자가상의 한 강도처럼 평생을 못된 짓을 하다가 극적으로 죽기 전에 구원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께 있으므로 우리는 인내하며 전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가르침으로 경책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삶의 복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경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셨는데 때로는 이런 경책도 필요합니다. 얼마 전 인터넷에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화장실 변기 앉으면 병 걸리나?”라는 것입니다. 변기 위에는 임질, 요충, 회충균 등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지만 감염될 정도로 많진 않다고 합니다. 사실은 사무실 책상이 변기에 비해 400배나 더 많은 박테리아가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꼭 감옥에 가고, 나쁜 일에 앞장서고 이래야 죄인 줄 압니다. 모든 사람이 세상의 여러 가지 균과 죄와 더불어 삽니다. 사는 것이 죄 짓는 것이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셋째는 경계하며 권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너는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등의 권면이 있습니다. 엄격하게 경계하고 권해야 합니다. 믿는 자들의 영적 권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나타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14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무슨 빚을 졌겠습니까? 복음의 빚입니다. 복음의 빚 외에는 빚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었다는 것만 가지고도 빚진 자입니다. 고린도전서 9:16에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 합니다. 복음에 대한 철두철미한 소명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저의 고등학교 동창생 가운데 장로님이 여러분이 있습니다. 그들을 볼 때마다 참 자랑스럽습니다. 친구 가운데 한 장로님은 서울 우리 교단 교회의 장로님이시고 재벌 그룹 회사의 사장이십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의 부인인 권사님은 하는 일이 전도밖에 없습니다. 일년에 많이 할 때는 450명이나 전도하였다고 합니다. 아침을 먹고 나가면 저녁까지 전도합니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은 거의 전도하느라 다 씁니다. 재벌 그룹의 사장 부인이 얼마나 놀게 많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는 일은 전도밖에 없습니다. 몇 해 전에는 교통사고를 당해서 정신도 온전치 못하고 몸도 많이 약했습니다. 그 때는 남편도 못 알아보곤 했습니다. 그러나 정신이 돌아오니까 그 때부터 또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함께 식사하면서 그 권사님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전도하라고 다시 건강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분명히 면류관이 클 것입니다.

둘째, 복음전파는 고난을 받으며 해야 할 직무입니다.

  바울은 “고난을 받으면 전도자의 일을 하며”라고 합니다. 복음전파는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헬라어에서 ‘증거’란 단어는 ‘순교’란 말입니다. 증거한다는 것은 순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 그 자체가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디모데후서 1:8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복음이란 고난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로마의 박해를 보세요. 당시의 박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카타콤에서의 삶은 고통이며 죽음이었습니다. 복음을 지키려고 죽음을 택하고 고난을 자초한 삶이었습니다.

  연변과학기술대학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정신으로 세워진 학교입니다. 그 학교의 김진경 총장님을 지난 주간에 만났습니다. 학교에 전화를 하시는데 학교에서 보고합니다. 학생들이 두 팀을 이루어 훈춘에 전도하러 갔다가 체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학생들은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체포되었다고 총장이 너무 좋아하였습니다. 복음을 알고 나니 견딜 수 없어서 전도하러 나갔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고난 가운데 전파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죽임을 당하고, 추방당하고, 동네 사람들의 집단 테러를 당하고, 강도를 만나는 것이 복음전파입니다. 지금도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예나 다름없는 고난이 따릅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낍니다. 바울은 로마서 8:17에서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고난을 받는 것이 영광의 지름길입니다. 바울은 고난을 받는 복음전파의 방법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둘씩 제자들을 짝을 지어 보내시면서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전파는 신중해야 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 삶에 적용됩니다. 특히 복음전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해야 합니다. 복음전파는 지혜와 순결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열정만 가지고 해서는 안 됩니다. 조용한 동네에 스피커를 대고 떠드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봅니다. 지혜를 가지고 적절하게 전략을 세우고 정책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효과적인 전도가 됩니다. 작은 비용을 들이고도 큰 효율을 얻습니다.

  또 어떤 분은 전도하면서 “우리 교회 안 나오면 죽는다”, “다른 교회 가면 저주 받는다”, “옆의 교회에 가시면 하나님이 야단치신다”고 하는데 이런 비정상적이며 신중하지 못한 복음전파는 오히려 교회에 누가 됩니다.

  둘째는 전도자의 일을 다 해야 합니다. 남김없이 죽을 때까지 전도자의 사명을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24에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이런 복음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복음전파는 가능합니다.

  제가 잘 아는 집사님은 어느 회사의 사장이신데 자신의 비서에게 전도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전도를 많이 하지만 비서에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드디어 자신의 비서에게 전도하였습니다. 그 비서는 “고맙습니다. 저는 사장님이 저에게 전도하지 않으시길래 희망 없는 사람인줄 알았어요”라고 하더랍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집사님이 미안하고 너무 충격을 받았다고 하십디다.

  예레미야 20:9에는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고 합니다.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우리에게도 불일 듯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죽임을 당하는 것만 고난이 아닙니다. 요즘은 그럴 일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을 내고, 물질을 투자하고, 정성을 쏟는 것이 현대적 고난이라고 봅니다. 이런 고난이 있어야 복음은 열매를 맺습니다.

결론

  인터넷 동영상에 ‘호랑이 진짜 열 받겠다’라는 것이 올라왔습니다. 원숭이가 호랑이를 가지고 노는 장면입니다. 원숭이가 호랑이를 때리고, 꼬리를 잡고, 약을 올립니다. 호랑이가 숨어 있다가 달려오면 나무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올라가 버립니다. 왜 밀림의 왕자가 이런 수모를 당합니까? 왜 호랑이는 원숭이에게 상대가 안 되지요? 땅에서 노는 것과 하늘을 노는 것의 차이입니다. 아무리 힘이 세도 올라가 버리면 당할 수 없습니다. 독수리는 하늘을 납니다. 독수리가 날개 쳐 올라가면 땅의 것들이 당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배워줘야 합니다. 이 땅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사는 것이 승리란 것을 가르쳐 알게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진정한 삶은 하늘의 삶이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들의 한결같은 결론은 찾은 자의 기쁨입니다. “즐거워하자”, “먹고 즐기자”란 말이 나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의 심장을 가지고 세상을 치유하고 변화시키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전파는 잃은 자를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이라는 일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가장 큰 효도입니다. 잃은 자를 찾지 않으면, 잃은 자를 찾은 것을 싫어하면 우리도 어쩔 수 없는 탕자의 비유의 첫째 아들 같은 불효자입니다. 아버지에게 불충한 아들입니다. 이번 기회에 꼭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전파에 우리 마음이 불붙게 되기를 바랍니다.

꼭 복음전파에 앞장 서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성 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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