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영혼을 살리는 교회 (마 18:15-20)

  • 잡초 잡초
  • 915
  • 0

첨부 1


  헨리 나우엔 박사라고 하면 지난 세기에 있어 가장 존경받는 인물의 하나였으며, 목회자들의 설교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예화로 사용된 인물이었습니다.  하버드대와 예일대에서 존경받는 교수로 있었던 헨리 나우엔은 교수직을 사임하고 최후에 캐나다 토론트의 교외에 있는 장애인 공동체인 '데잇브레이크 커뮤니티'라는 장애인 공동체의 사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그 곳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쓴 책은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자신은 바로 탕자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세상에 살면서 온갖 명예와 부와 허영과 욕망을 따라 살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영화를 누리기 위하여 분주하였던 탕자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지난 날 영적인 탕자로서 진정 외로웠으며, 방황하고 있었고, 춥고 어두운 밤을 보내었노라고 말합니다.  이제 탕자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 그의 참된 모습을 찾았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어 "아담"이라는 책에서 장애우 소년인 아담을 섬기면서 그의 발을 씻어주고 그의 힘든 부분을 담당해주면서 아담 안에서 새로운 아담을 발견합니다.  곧 예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어느 날 그가 돌아보고 있던 아담이란 소년이 고마워하며 더듬거리며 "나는 당신이 너무 좋아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소년 아담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도 이렇게 진지하게 살고 의미 있게 마쳐야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회를 나오고,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가 되고 보니 인간관계라는 것이 형성됩니다.  인간관계라는 말은 사람과 사람이 모이면 특별히 몇몇 사람들이 가깝게 지내기도 하고, 친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친하게 지낼 기회가 없다보니, 그냥 알고 지내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이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하고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심리적으로 안정을 얻으려고 하면 한 사람은 6명 정도의 신뢰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고, 서로 도와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짤라먹지 말고, 나이 들어 갈수록 사람을 가깝게 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이후에 교인들 간에 부르는 호칭이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친근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말은 "형제"라는 말입니다.  형제라는 이름은 듣고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좋은 이름입니다.  잠언17:17에서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위급한 상황이 되었으면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은 형제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형제들이 있다는 것이 정말 든든합니다.

  우리 기독교를 말할 때에 형제주의라는 말을 합니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고 보니 다 형제요, 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오래되고, 점점 대형화되어 가면 끈끈한 형제애보다는 조직이 교회를 이끌어가고, 몇몇 사람이 운영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는 다 형제라고 했습니다.  마23:8에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장자요, 맏아들이시며 독생자이신 예수님 아래에 들어가면서 우리는 한 아버지를 모신 형제와 자매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영주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는 주님의 형제들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좋은 교회요,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앞으로도 더욱 좋은 교회로,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시고, 서로가 신뢰하시고, 서로가 칭찬하시고, 좋은 장점을 살려주시고, 단점을 서로 가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선배를 존중히 여기시고, 후배를 사랑하시고 이끌어주시고 높여주셔야 합니다.  과거의 믿음의 귀한 선배들이 있었는데, 후배들이 우리 시대를 보고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회상하면서도 그 때 그들은 좋은 선배였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잠10:12을 보면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니 다툼이 일어납니다. 

  벧전4:8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 사랑이 명약입니다.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약은 사랑입니다. 

  마태가 속하여 있던 공동체에서는 인간관계가 아주 큰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의 말씀이면서도 마태가 속하여 있던 교회의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이면서도 마태가 속하였던 유대인의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장차 주님의 교회에 성도들 간에 죄를 범하는 일들이 있을 것을 아시고, 분명한 지침을 내려주셨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이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신자들 간에 죄를 범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죄를 범하거든",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물질적인 손해를 입혔던지, 정신적인 피해를 주었든지, 인격적으로 모멸감을 주었든지 죄를 범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성도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당사자끼리 해결하는데, 그 사람이 죄를 범한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 한 사람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권고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엘렝코"라고 하는데, 신약에서 사용된 것을 보면 "꾸짖다, 책망하다, 처벌하다, 정죄하다, 유죄를 선언하다, 훈계하다"는 강력한 말인데, 우리 개역성경에서는 "권고하다", 새번역에서는 "충고하다"는 말로 완화하여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도록 무엇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고, 회개하도록 권고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이 원문의 뜻보다는 아주 부드럽게 번역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어 성경이나 공동번역 같은 다른 성경을 보면 "잘못을 타일러 주라"고 번역합니다.  영어 성경들도 여러 말로 번역하지만, 대체적으로 "꾸짖다, 비난하다, 책망하다"는 "Reprove"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죄에 대하여 생각나게 하시고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하십니다.  이것은 성령이 하시는 주된 일이었습니다.  요16:8에 보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하셨는데, "책망한다"는 말과 "권고한다"는 같은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서 사실 설교자로서 조금은 고민했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다고 하여 일일이 찾아가서 잘못을 알려주고 회개하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성령의 감동하심에 맡기고 나로서는 참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의 말씀대로 한 사람을 찾아가서 그의 잘못을 꺼내면서 그것은 잘못한 것이니, 앞으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하였더니, 그가 정말 부끄러워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내가 잘못했고, 앞으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요, 이것으로 하여 우리 사이에 금이 가지 않고 더 좋은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잘 받아들이면 "네 형제를 얻은 것이라"는 말씀대로 되어진 것입니다. 

  "얻은 것"이라고 하는 말은 인간관계가 악화되지 않고 이익을 주었다는 말이요, 사람을 얻었다는 말은 역으로 생각하면 사람을 잃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돈을 잃어버려도 사람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서로 조심하고 신뢰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것입니다.

  16절의 말씀입니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혼자 가서는 잘못을 시인하지도 않고 문제만 키워 가지고 왔습니다. 

  두 번째 단계로는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고,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두세 증인이 따라갔으니, 그가 하는 말마다 들을 사람이 있게 되었습니다.

  신19:15에서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 두세 사람이란 증인의 수였습니다.  증인이란 경험자요, 목격자요, 그것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담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17절입니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이제는 문제가 더욱 깊어가고,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교인으로 신앙과 행위가 성경이나 헌법에 위배되었다고 하면 그것은 범죄입니다.  예배를 방해하였다거나, 이단 행위와 그에 동조하는 행위, 기독교인으로서 심히 부도덕한 행위나, 치리회 석상에서 폭언하거나, 폭행하거나 기물을 파손하는 행위는 범죄입니다.  이럴 때 교인에게 주는 책벌이 있습니다.  견책, 수찬정지, 출교가 있습니다.  견책이란 당회에 불러다놓고 다시는 그러지 말고, 자숙하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견책보다는 수찬정지는 좀더 엄한 벌입니다.  성찬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무거운 것은 교회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직원에게는 시무 정지, 시무해임, 정직, 면직 등이 있습니다.  출교라는 것은 교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요, 구원받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요, 심한 말로 하면 지옥에 가라는 말과 같습니다.

  요즈음에 교인을 당회로 불러서 권면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화를 내고 싸우자고 할 것입니다.  "예, 좋습니다. 교회가 여기 뿐일 줄 아십니까?  다른 교회로 가면 될 것 아닙니까?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아무개 집사가 말했습니까?  그 집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말하는 당회원들도 망신스럽고, 교회는 무슨 꼴이 될 것입니까?  그래서 좋은 것이 좋지 하고, 말하지 않고,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하면서 넘어가다 보니 오늘의 교회들이 수백 개의 교단으로 분열되고 싸우고 갈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정말로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요, 형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자 찾아갔을 때에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두 세 사람 찾아가고 몰려다니면 교인도 잃고 교회도 시끄러워지게 됩니다.  두세 사람이 끼어 들면 파당을 짓게 되고, 몰려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커져갑니다.  말이란 한 사람 건너갈 때마다 침소봉대하여 원래의 뜻이 달라지고, 나중에는 하지도 않은 말들이 나돌고 겉잡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랑이 없이 이방인처럼 여기고 세리처럼 여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고, 용서하는 사람들 관용을 베푸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18절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이었는데, 이번에는 교회에게 주시고 있습니다.  마16:19에서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앞에서, 그리고 교회 앞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좋은 인관 관계를 회복하면 하늘에서도 문제가 해결될 것이요,  그는 구원을 받을 것이요, 교회가 이방인처럼 여기고 세리와 같이 여기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말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교회의 결정은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가 결정한 것이 무엇이 그렇게 대단하냐고 하실 지 모르나, 우리 주님은 교회는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하셨고,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모름지기 교회란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 중에서 조금만 실수하여도 불러놓고 야단치고, 책망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책벌하는 것이 교회가 아니라,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권징하는 것만이 교회의 할 일이 아니라, 한 영혼을 놓고 기도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19절-20절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것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교회로 하여금 치리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방인이나 세리도 우리의 사랑할 대상이요, 구원할 사람이지, 우리가 상종하지 못할 사람으로 여기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원망하고 비판하고 못살게 하는 그를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하지 않았으면 찾아가서 권면할 것도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교인들 간에 풀지 못한 그 무엇이 있다고 하면 풀어버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예배드리러 나오셨습니까? 

  마5:23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형제와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성도들 간에 용서하고 용서를 비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교회가 화목하고 하나되고, 바른 교회들이 되려면 치리하고 권징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합심하여 기도하고,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힘, 하나되게 하는 힘은 바로 기도에 있습니다.  어떤 일에 증인이 되기보다는 중보자가 되어 기도하여야 합니다.  증인이 되었습니까?  기도의 중보자가 되지 않으면 증인들이 더 큰 문제만 일으키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얻으려고 힘써야만 하고, 한 영혼도 놓치지 않기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는데도 어느 한 사람도 아는 척하지 않습니다.  내가 교회를 나가도 교회를 다녀갔는지, 교회를 안 나가도 누구 하나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알아주려고 하고 내가 먼저 다른 성도들에게 다가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개인적인 신앙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 공동체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일생 하나님의 교회와 더불어 우리의 신앙을 키워나가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어떻게 해든지 교회는 영혼을 사랑하고 사람을 잃지 않으려고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암적인 존재가 되기 전에 미리 짤라버리고 베어내라는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한 사람을 권하고 교회 안에 깊이 들어오도록 해야 합니다.  복음의 근본적인 정신은 출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돌이키게 하고 회복하게 하고, 살리는데 있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현자가 하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자연을, 우주를 만드실 때에 그 때마다 좋았다는 말을 하셨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만드신 후에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어찌하여 없었습니까?"  그 물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고 있습니다.  "사람은 완성품이 아니고 미완성의 존재로서 이제부터 자기 스스로 온전하게 만들어 가야하기 때문에 보기에 좋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노라"고 했습니다.  아프리카 초원의 맹수들은 태어나자마자 뛰어다니고 며칠만 지나가면 숲을 뛰어다니는데, 우리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불안전한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우리는 서로 성숙한 자리에 나아가기 위하여 서로의 돌봄을 필요합니다.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고, 또 우리는 용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속하여 신앙을 유지하고 있기에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일과 바른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영혼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야 하고, 한 영혼도 잃지 않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목자의 마음과 성품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뉴욕의 유명한 시장으로 알려진 '라과디아'란 분이 즉결 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빵을 훔치다 체포되어 기소된 노인을 재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노인에게 어찌하여 빵을 훔쳐먹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배가 너무나 고파서 자기도 모르게 빵집에 들어가서 빵을 훔쳐먹었으나 저의 잘못입니다. 진심으로 후회하고 뉘우치고 있으니 용서를 빕니다"라고 했습니다.  재판장 라과디아는 "당신의 죄는 10불 벌금형에 해당합니다.  벌금 10불을 내시오"라고 판결하였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선고를 내리고 자기의 지갑을 열어 10불을 내놓으면서 "이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처럼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고 있었는데 나는 그 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 죄로 이 벌금은 내가 내겠습니다.  혹 여기에 나 같은 죄인 있으면 여기 모자를 돌릴 테니 벌금내실 분은 내십시오."라고 하여 그 자리에서 47불을 모금해서 노인에게 주었습니다.  그 노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재판장을 걸어나갔으며, 훗날 라과디아는 뉴욕의 시장이 되었고, 그의 훌륭한 인격과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뉴욕의 여러 개 공항 중의 하나를 '라과디아 공항'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한 나라나 사회나 교회도 그렇습니다.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의를 이루고 법을 세우는 명확한 잣대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회가 되고, 용서하고, 돌아오는 교회가 되어, 한 영혼도 잃어버리지 말고, 아름다운 교회를 세워나가야겠습니다.
(성 홍 목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