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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흔적 (갈 6: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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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서남 아시아를 휩쓸고 간 쓰나미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지난 주간 미국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미 역사상 최대 자연재해로 기록되고 있고 미국이 9·11 테러 이후 최대의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사망자는 전체적으로는 수천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며, 피해 규모도 최고 350억 달러까지 전망되고 있습니다. 미 언론들은 이런 상황을 “미국판 쓰나미”로 부르고 있습니다. 재해와 전쟁이 남긴 흔적이나 고난의 흔적은 언제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예전 1960년대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최대의 공포의 대상은 나환자와 상이군인이었습니다. 나환자에 대해서는 “보리밭에서 아이 잡아 먹는다더라”는 낭설 때문이었지만 잘려진 손목에 갈고리를 끼워서 다니는 상이군인들은 동냥을 하면서도 어찌나 행패도 심하고 당당했는지 어른들이나 심지어 지서의 순경까지도 어쩌지 못하는 듯 했습니다. 아마도 국가를 위해 싸우다 생긴 부상이라는 강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이들은 천형의 흔적을 가졌든 전쟁의 흔적을 가졌든 그들의 몸에는 강한 흔적을 가진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놀라운 존재입니까? 오늘 말씀 17절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흔적이라고 하면 옷이나 종이에 더러운 물기가 묻어 얼룩진 것을 연상하지만 헬라어로 "흔적"(스티그마타)은 그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낙인을 말합니다. 소떼를 가진 주인은 자기 소떼에게 낙인을 찍습니다. 오른쪽 넓적다리에 찍힌 낙인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떼한테만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도 낙인을 찍었습니다. 죄수들, 전쟁포로들, 노예들, 탈영자들에게 낙인을 찍었던 것입니다. 이 낙인이 찍힌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자기 신분을 감출수가 없었습니다. 이 낙인은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말을 사용하여 자기 몸에 예수의 낙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자랑스런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낙인이라는 수치스러운 말이 그리스도인의 손에 들려지면 영광스러운 말로 변합니다. 

유대인들은 몸에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흔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할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 받은 것을 최고의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부정한 자요, 멸망 받을 자라고 여겨,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대 그리스도인과 섞여 사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마음 가운데 갈등이 생겼습니다. 몇몇 유대 그리스도인이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할례를 받도록 강요한 것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위협합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은 할례를 자랑하나 예수를 믿는 우리는 할례가 아무것도 아님을 압니다. 바울은 15절에서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것도 아니로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든지, 안 받든지 그것은 구원받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곧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일로 인해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기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죽음에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누가 자기 아들을 죽음에 내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대가없이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입니다. 스티그마타 이 흔적은 하나님의 마음에 찍힌 낙인입니다.

바울에게 예수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님만 자랑하고, 예수님만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해 어떤 핍박도 견뎌냈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에게만 예수의 흔적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 보통사람들은 몸에 문신을 새기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문신을 새기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직폭력배들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속한 조직의 일원임을 보여주고 조직에 충성됨을 보여주기 위해 몸에 문신을 새깁니다. 그 문신은 평생 지워지지 않습니다. 일류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자신이 그 회사의 사원임을 보이기 위해 배지를 달고 다닙니다. 그런데 하물며 예수를 믿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흔적을 자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몸은 예수님께 충성하는 가운데 그 예수님의 흔적을 새기는 책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보시는 것은 우리 몸에 남아 있던 예수님의 흔적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흔적이 우리 몸에 새겨질 때에 우리 몸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우리의 상급책에도 동시에 새겨질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작든 크든 예수님의 흔적,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발전되었고 부흥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흔적을 남긴다면 그 흔적은 어디에 남겨야할까요?

그리스도의 흔적을 내 영혼에 남겨야 한다.

이 말은“중생해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적으로 거듭난 체험, 나의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경험을 말합니다. 이것은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실질적인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청송 감호소와 서울 구치소에서 교도관 생활을 오래 하셨던 박효진 장로님의 간증에서 그 분은 생일이 세 번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생일은 육신의 나이로 51세라는 육의 생일이 있고, 또 한 번은 청송 감호소에 있을 때 “너의 몸이 거룩한 성령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말씀을 읽고 지금까지 신앙과 삶이 따로였던 이중적인 신앙을 바로 잡은 날이고, 세 번째는 서울 교도관으로 있으면서 윤도영이라는 사형수가 영생의 확신을 가지고 죽음조차 의연하게 맞이하는 것을 보고 받은 충격으로 순교적 결단을 한 날을 또 다른 생일로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흔적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 연륜이나 학문적 업적이나 물질의 유무나 명예의 높고 낮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하고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이 흔적을 남기는 것보다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어떻게 내 영혼에 예수의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요?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여야 하고 그 다음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죄 사함의 방법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구원자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영혼에 예수님의 흔적이 남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을 내 육체에 남겨야 한다.

17절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합니다. 그 당시 바울은 양쪽으로 협공을 당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는 배신자라는 이름으로 같은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짜 사도라는 비난 속에 온갖 모함과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뇌와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것입니다. “나를 괴롭게 말라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가진 흔적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당한 고난목록들이 여러 곳 있지만 가장 잘 요약된 곳이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입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것을 바울은 예수님의 흔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군림하거나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이고, 영광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멸시를 받는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개척교회에서 성전을 짓기 위해 기도회를 하던 중에 어느 여 집사님이 자기 눈 하나를 기증하겠다고 하여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온 교회가 합심함으로서 교회를 지었다는 순교적 미담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까? 내 육체에 주님의 흔적이 남겨지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을 내 재물에 남겨야 한다.

기독교의 물질관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원론적으로 이해하여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식의 물질관입니다. 그 결과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는 인식이 은연중에 배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 사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초대교회에 교회를 어지럽혔던 영지주의적 사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달란트 비유를 통해 재화의 중요성을 말씀해 주었습니다. 많이 남기는 종이 되어야한다는 비유는 물질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잘 못 사용할 때 문제가 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데에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썩어질 물질을 들여서라도 값진 일을 할 수 있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을 내 시간에 흔적을 남겨야 한다.

현대인들에게 시간은 돈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우리는 흔히 물질 좀 드려놓으면 내가 할 일은 다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물질의 요구보다 시간의 요구를 더 많이 하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물질의 기준은 십일조지만 시간은 칠 분의 일을 요구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예배시간, 기도시간, 헌신시간을 도적질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간을 정해서 그 시간은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는 것이 시간에 주님의 흔적을 남기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비극과 불행은 고통스러운 환경과 상황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난 자체가 귀한 일은 아니지만, 고난을 통하여 만나는 주님의 은혜는 최고의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고난 자체가 자랑은 아니지만, 고난을 통하여 받은 은혜는, 그리스도의 흔적이며 영광입니다. 반대로 은혜 없는 고난, 주님 없는 광야는 비극의 현장이므로 고난 자체를 즐기거나 자랑할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만난, 은혜와 성숙을 누리고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광야를, 자신이 가려하지 마시고 은혜로 가는 법을 배우시고 은혜로 사는 법을 알아 가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는 광야는 힘든 곳이지만, 은혜로 사는 광야는 신나는 곳입니다. 내가 믿는 예수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믿는 예수는, 쉽고 즐거운 일입니다. 광야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유일한 생존의 조건이었듯 고난 중에 있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은혜의 통로뿐입니다. 은혜를 입는 것이고 은혜 속에 사는 것입니다. 은혜 없는 삶은 그 어디나 감옥이지만, 은혜 있는 광야는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며 하루하루가, 축제의 날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좁은 길을 걸으며 항상 기뻐하는 것은 주님의 성령이 함께 함께 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영향력이 없는 이유는 죽으려고 예수를 믿지 않고, 살려고 믿기 때문이며 버리려고 믿지 않고, 소유하려고 믿기 때문이고 섬기려고 믿지 않고, 섬김을 받으려고 믿기 때문이며 베풀려고 믿지 않고, 받으려고 믿기 때문이며 포기하려고 믿지 않고, 더 많이 성취하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본 흔적이 필요하고, 예수님 때문에 고통당한 흔적이 필요하고, 예수님 때문에 억울하고, 할 말도 못하고, 인내한 흔적이 필요하고 예수님 때문에 버림받고 핍박받은 흔적들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울이 소유한 거룩한 '스티그마'였으며 그것이 능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스티그마를 소유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전사들이라면 예수님에 관한 지식과 관습을 소유한 사람들은, 병사들일 뿐입니다. 사역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테크닉으로 무장되고, 세련된 지식으로 포장된, 습관적인 사역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귀를 대적하고, 생명을 살려내는 전사 같은 사역자가 절실합니다. 죽은 통나무는, 흐르는 물에도 떠내려가지만 살아있는 송사리는, 흐르는 물을 거슬려 올라갑니다. 이것이 생명의 에너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박제되어 근사하게 장식된 죽은 호랑이가 아니라 차라리 생명으로 충만한, 병아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던 흔적, 눈물로 기도하며 손들어 찬송하던 흔적, 가슴을 설레이며 말씀에 춤을 추던 흔적, 원수를 사랑했던 흔적도, 낮은 마음으로 섬겼던 흔적, 아까운줄 모르고 나누었던 흔적을 확인하시고 다시 그대로 재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조용히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내 영혼에 흔적이 남겨질까봐, 내 육체가 고달플까봐, 내 물질에 손해가 올까봐, 내 시간이 도적질 당할까봐 외면하지는 않았는지요? 세계 최대의 나이아가라 폭포나 최고 높이를 자랑하는 이과수 폭포는 그 웅대함이나 시원함이 보는 이를 흡족하게 하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향한 마음이 이 정도가 되어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에 주님의 흔적을 남기십시다. 내 육체와 내 물질과 시간을 주님께 드림으로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님의 흔적”을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 정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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