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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도전 (단 2: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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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의 차이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

사람에게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다섯 가지 “감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감을 통해 “감동”을 받습니다. 감동이란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각의 실체와 감동 중 어떤 것이 사실일까요? 사람들은 흔히 감각은 사실이고, 감동은 거짓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다릅니다. 실질적으로 감각의 실체는 사실이 아닙니다. 어느 한계 영역 안에서만 사실이며, 그 범위를 벗어난 더 큰 영역에서는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 눈에 사람의 몸이 보이는 감각은 가시광선 영역에서만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 눈에서 인식하는 감각이 가시광선이 아니라 X선이나 감마선이라면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을 구성하는 원자의 핵과 전자 사이의 공간을 감마선이 뚫고 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시광선의 파장은 그 사이의 거리보다 길기에 때문에 통과하지 못하여 우리 눈에 인식됩니다.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 후각, 미각, 촉각도 동일합니다. 가시광선 영역, 가청주파수 영역 등 한계 내에서만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감각의 실체들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어떤 모습에 마음이 움직여서 감탄하기도 하며, 즐거워하기도 하고, 슬픔과 기쁨을 느끼며, 두려워 떨기도 하고, 괴로움 속에서 고통을 느끼기도 합니다. 사랑하기도 하며, 미워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마음들은 몸에 들어오는 감각을 통해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감동은 마음의 움직임의 사실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진실한 감동의 사실을 통해 새로운 움직임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이때 사람들의 움직임은 두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감동을 준 감각의 실체를 알고자 하는 방향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감동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방향입니다. 두 방향 중 사실 파악을 위한 방향만 있다면 감동은 그에게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또한 감동을 표현하고자 하는 방향만 있다면 그 실체의 잘못된 적용으로 어려움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과 지혜와 총명으로 자신에게 감동을 준 감각의 실체를 분별할 줄도 알고, 또한 그 감동을 표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 이후, 죄로 타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감동에 속아 넘어갑니다. 자신을 감동케 한 감각을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그 감각의 사실 여부를 살필 여유도 없이 감동 받은 그대로 그 감각의 실체를 사실로 알고,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기에 바쁩니다. 그 감각의 실체를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무조건 대적합니다. 그 감각의 실체를 무시하고 경멸하거나, 두려워 떨며 공경합니다. 즉 자신이 받은 감동이 감동으로 끝나지 않고 그 감각의 실체를 사실로 판단하는 척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주신 감동은 우리를 움직일 뿐이지, 어떤 대상의 진실을 판단하는 척도가 아닙니다. “아름답다”라는 감동이 그 대상의 아름다움 자체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떤 대상의 판단은 지혜와 총명으로 그 대상을 살핀 후에나 가능합니다. 감동은 우리가 누려야 할 부분이며, 감각의 실체는 우리가 살펴야 할 부분입니다. 이 두 가지가 분리되지 않으면 언제나 감동에 속습니다. 이것이 안목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감동과 감각의 실체의 분리 능력이 안목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감동과 감각의 실체를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안목으로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이러한 안목으로 이루어진 삶이 세상을 이깁니다. 그러나 감동받은 것을 감각 자체의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안목은 절반의 안목이 부족한 잘못된 안목입니다. 이러한 안목은 어떤 대상을 정확히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잘못 판단된 진실의 실체를 대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점점 어려움 속에 빠집니다.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의 차이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합니다.

2. 승리의 인생은 감동의 안목이 아닌 감각의 실체를 아는 안목에 있다.

단 2:31-35에서 알려주는 느부갓네살의 꿈과 관련된 정황들은 이러한 안목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느부갓네살이 꾼 두 가지의 꿈 중에서 단 2:31-33의 첫 번째 꿈은 사람들의 안목의 차이에 따른 결과가 얼마나 큰지 알게 합니다. 첫 번째 꿈에서 본 신상의 모습은 사람 모양의 신상이었습니다. 크기가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모양이 심히 두려운 모습입니다. 높이와 폭이 10:1의 비율인 압도적인 모습입니다. 그 모습은 그것을 감각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두려운 모습입니다.

눈에 보이는 신상에 대한 감각은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꿈을 꾼 느부갓네살 자신이나 그 꿈을 설명하며 해석하는 다니엘의 마음에 일으킨 감동은 모두 두려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에게 첫 번째 꿈을 설명할 때, 단 2:31에서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신상을 바라보는 느부갓네살이나 다니엘에게 모두 동일하게 두려운 마음을 일으키는 모양이었습니다. 이처럼 감각은 세상 사람들에게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 신상에 대한 판단은 다릅니다. 그 신상에 대한 반응은 다릅니다. 느부갓네살은 두려움 속에서 그 꿈을 기억하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 꿈으로 인해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그의 감각에 들어 온 실체가 주는 감동을 따라 자신이 느낀 신상의 실체를 실제로 그러한 존재라고 인식하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신하들을 죽음의 곤경에 처할 정도까지 몰고 갔습니다. 문제 해결도 없이 문제만 만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두려운 감각이 가져다주는 마음의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먼저 두려움을 주는 그 감각의 실체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확인된 감각의 실체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다니엘이 확인한 신상의 실체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실체였습니다. 외형은 10:1로서 사람들의 감각을 압도하였지만, 그 실체는 곧 무너져버릴 존재였습니다. 정금 머리, 은으로 된 가슴과 팔,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 철로 된 종아리, 철과 진흙으로 된 발로서 능력 없는 존재였습니다.

다니엘은 그 신상의 근본적인 실체를 보았습니다. 신상이 안고 있는 두 가지의 근본적인 실체를 확인하였습니다. 첫째는 머리가 무겁고, 발로 내려 갈수록 약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살아 있는 인격체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인조적인 신상이라는 것입니다. 정금 머리지만 철과 진흙이 섞여서 조만간 부서질 수밖에 없는 발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생명력이 없는 인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반응하고 표현합니다.

감각에 의한 감동에 따라 표현하며 움직이는 느부갓네살 왕은 두려워 떨며 자신과 자신의 모든 영역을 곤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감동을 준 감각의 실체를 바라보는 다니엘은 오히려 느부갓네살에게 자신 만만하게 그 사실을 설명합니다. 이것이 느부갓네살 왕과 다니엘의 안목의 차이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두려운 감동을 감각의 실체가 지닌 사실로 받아들이는 안목으로 표현하며 곤고하게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감동의 실체를 파악한 후 표현하며, 더욱 담대해져 갔습니다.

단 2:43의 설명처럼 철과 진흙은 절대 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발은 그 신상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그 신상은 이미 무너지고 있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제아무리 사람들을 압도하는 외모를 지녔다고 하여도 무너지고 있는 그의 모습을 확인한 사람은 그 신상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담대함으로 그 신상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바라본 느부갓네살 왕의 첫 꿈의 신상은 다니엘을 더 이상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다니엘은 그 신상의 실체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느부갓네살의 꿈의 신상은 오늘날 우리들이 맞이하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모습들은 우리들을 압도하는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들이 맞이해야 할 직장의 모습, 세상 문화의 모습, 세상 지식과 기술의 모습들은 느부갓네살의 꿈의 신상의 모습처럼 그리스도인의 감각 속에 두려운 대상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도 가는 곳마다 두려움을 느낍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우리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신상의 모습처럼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두려움을 세상 실체의 진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느부갓네살처럼 두려움과 번민 속에서 곤고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실체는 본질적으로 그 신상처럼 철과 진흙이 섞인 발에 지탱되는 존재로서 무너지고 있는 실체라는 사실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인격이 없는 인조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첫 감각이 주는 두려움의 안목으로 세상을 맞이할 때는 실패하지만, 그 감각의 실체가 무너질 신상의 모습임을 아는 안목으로 맞이할 때는 승리합니다.

3. 두려운 감각의 세상 신상은 하나님의 능력에 무너질 세상이다.

단 2:34-35에서 설명하는 느부갓네살의 두 번째 꿈은 그 신상의 미래를 더욱 분명하게 확인해 줍니다. 단 2:34에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또 왕이 보신 즉”이라고 하면서 왕이 본 두 번째 꿈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왕이 바라 본 두 번째 꿈은 첫 번째 꿈을 다 보여준 후 이어서 보여 주신 꿈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꿈과 연속적인 관계에 있는 꿈입니다. 두 번째 꿈은 첫 번째 보여준 꿈을 바라보는 안목의 차이가 어떤 결말에 이를 것인지 명확하게 선포해 주시는 꿈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라는 표현에서 “뜨인(게자르)”이라는 단어는 아람어로서 “쪼아내다, 잘라내다”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뜨인 돌”이란, “산에서 사람이 연장을 사용하여 쪼아 낸 돌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능력이 전혀 미치지 않는 산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잘라내어진 돌을 말합니다. 첫 번째 꿈에서 보여주신 신상을 상대할 자는 느부갓네살도 아닙니다. 다니엘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직접 잘라내신 뜨인 돌만이 상대하십니다.

단 2:34-35는 그 신상이 뜨인 돌에 부서지는 모습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뜨인 돌이 첫 번째로 친 곳은 철과 진흙으로 혼합되어 있는 발입니다. 뜨인 돌에 맞아 부서지는 순서는 철, 진흙, 놋, 은, 금으로서 신상이 처음 눈에 보일 때와 반대의 순서입니다. 신상이 부서지는 순서는 발에서 시작하여 종아리, 배와 넓적다리, 가슴과 팔이 부서지고 마지막으로 정금 머리가 부서집니다. 즉 신상이 부서지는 모습은 발이 부서짐으로 인해 와르르 주저앉으며 신상 전체가 부서지는 모습입니다.

외형적으로 두려움을 주는 신상이었습니다. 정금으로 된 우상의 머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뜨인 돌”에 맞은 신상은 모두 부서져 사라집니다. 그 부서지는 모습을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다”고 표현합니다. 모든 것이 가치 없는 존재로 변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외형만 화려하고 위압적인 모습이었지 생명이 없는 우상입니다. 반석과 기초가 없는 우상입니다. 겨와 먼지처럼 사라지는 우상입니다.

감각적인 감동으로 판단하며, 그 감각적 판단을 따라 느부갓네살이 꾼 첫 꿈의 신상을 바라보는 자는 두려워 떨며, 그 우상에게 굴복하며 매여 살아갑니다. 이들은 조만간 겨와 먼지처럼 사라질 우상을 바라보며 더욱 더 고통스런 인생의 구렁텅이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처럼 감각적 감동이 아닌 그 감각의 실체가 되는 신상의 진실을 바라보는 안목으로 그 신상을 담대하게 대하는 사람들은 그 신상의 부서지는 때를 바라보며, 뜨인 돌의 능력에 그 신상을 맡기며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능력인 “뜨인 돌” 앞에서 인간의 능력인 신상은 내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다가갈 직장, 학교, 세상, 각종 문화, 그리고 우리들이 세상에서 다스려야 할 모든 분야가 두려운 신상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에 의해 사라져 버릴 존재들입니다. 감각적인 감동의 안목으로 바라 볼 때는 신상이 돌에 비해 두려울 정도로 위대해 보이고, 권세가 있어 보이고, 능력이 있어 보이지만, 철과 흙의 혼합으로 된 부서져 버릴 발로 지탱하고 있는 극히 불안정한 존재입니다.

또한 인간이 쌓고 있는 모든 수고가 세상을 살아갈 때 능력이 있어 보일지라도 반석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면 뜨인 돌에 의해 부서져 겨같이 날아갈 존재입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두 번째 꿈은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다”는 최종 결론을 알려주십니다. 세상 나라는 영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만 영원함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능력과 권세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능력만 가득해 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힘, 인간의 능력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의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은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한 “뜨인 돌”에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하나님의 뜨인 돌의 능력입니다. 아무리 거대한 신상처럼 보이는 난제라 할지라도 뜨인 돌에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면 어떤 문제와 고난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뜨인 돌의 능력을 의지하여 우리 앞의 거대한 신상을 향하여 도전해야 합니다. 이것은 거룩한 도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인 뜨인 돌의 능력을 의지하는 도전입니다.

우리 앞의 거대한 신상 같은 난제들 속에는 근본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 약점을 볼 수 있고, 깨닫는 안목이 있을 때 담대하게 뜨인 돌의 능력을 의지하는 거룩한 도전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난제, 막힌 담의 약점은 인간의 손과 연장에 의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안목에 보이는 세상 신상의 가장 큰 약점은, 보기만 크고 화려할 뿐 발이 연약한 세상 원리에 기초한 신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뜨인 돌이 그 약점을 쳐서 부서뜨리실 그 날을 사모하며 거룩한 도전에 나서야 합니다. 우리 앞의 거대한 신상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김 종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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