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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수고를 합시다 (살전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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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열심히 일해서 자기 가족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까마귀가 눈먼 올빼미를 먹여 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가 무엇인가? 사람들은 맘씨가 좋아서 가난한 사람을 잘 도와 주는데!' 그래서 그는 일하는 것을 그만 뒀는데, 오래지 않아서 그는 거지처럼 가난해졌습니다. 이 사람의 형편을 본 지혜로운 이웃 친구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일을 그만 두었소?" 그는 까마귀가 눈먼 올빼미를 먹여 살리는 것을 봤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웃 친구는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은 왜 하필 눈먼 올빼미 신세가 되려는 거요? 왜 까마귀 노릇을 하지 못하는 거요? 당신은 눈먼 사람이 아니지 않소? 당신은 까마귀처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어야 하오. 당신 아내와 자녀들을 도와주어야 할 것 아니오?"  "당신 말이 옳소. 나는 어리석었소. 이제 마음을 고쳐먹어야겠소. 하나님께서 내게 남을 도울 수 있는 힘을 주셨는데, 눈먼 올빼미처럼 남에게서 얻어먹고만 있어서야 되겠소?"(반팅)
사랑에는 수고가 따릅니다.

사랑의 수고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롬 16:6)
제주시에서 성산포로 가는 길가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항상 떠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느 늙은 아버지 가 있었다 합니다. 지난 60년대에 월남전이 일어났을 때, 그의 아들은 월남전에 참전하기 위해 집을 떠나면서 "아버지,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겠습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월남전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전사 통지서가 왔을 때에 그의 가족들은 아버지에게는 알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웃 마을에 살던 그 젊은이의 친구들은 모두 돌아왔는데 자기 아들만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아버지는 아침식사 후면 언제나 길가에 나와서 해가 질 때까지 아들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매일을 하루같이 길가에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이같이 집 떠났던 모든 가족이 다시 돌아오기를 밤낮으로 기다리고 계시는 부모님들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 누구도, 무엇도 이러한 사랑을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일입니다. 스위스에 있는 한 육군병원에서 가련한 병사가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병사의 아버지는 급히 아들에게 달려왔습니다.  "넌 죽어서는 안 된다. 여기 돈도 있고, 약도, 음식도 원하는 대로 주마." 그러나 아들이 가망 없어 보이자 그제야 아버지는 가방을 열고 빵보따리를 꺼냈습니다. 그러고는 한 덩이를 떼어 조용히 아들의 입에 넣어 주면서 "네 어머니가 만들어준 거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병사는"네, 알아요. 참 맛있어요." 하며 그 빵을 먹었는데 그 때부터 점점 기운을 차려 소생하였습니다.

'버나드 뉴만'이 불가리아의 한 농가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댁 딸이 열심히 바느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드레스에 수를 놓는 일이었습니다. 뉴만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아가씨는 끝없이 계속되는 그 일이 싫증이 나지 않소? 피곤하지도 않소?' 그녀는 '아니오, 이것은 나의 웨딩드레스인 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랑이 담긴 수고는 이처럼 언제나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의 마음, 사랑의 정신에서 수고할 때 그 일은 빛납니다.
사랑의 수고는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수고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롬 16:12)
점심시간이 되자 모두들 도시락을 먹기에 바빴습니다. 그렇지만 집이 가난하여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학생 있으면 선생님께로 와요. 선생님이 김밥을 많이 싸왔으니 선생님 것을 나눠줄께요." 선생님의 이 말이 끝나자 몇 명의 아이들이 앞으로 나왔고, 선생님은 김밥을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자기 도시락이 있는 아이들도 김밥을 받으려고 거짓으로 나왔어요. 선생님 김밥 주지 마세요." 한 아이가 소리쳤습니다.  "그래도 괜찮다. 이 중 한 명이라도 도시락을 안 싸온 학생이 있다면, 난 그 학생을 위해서 모두에게 김밥을 나눠 줄 수도 있단다." 말을 마치신 선생님은 다시 김밥을 나눠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으면, 그는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 두고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마태복음 18: 12)" 선생님은 점심을 굶는 아이들을 위해 김밥을 싸오셨습니다. 그런데 거짓으로 김밥을 먹으려는 아이들에게 김밥을 주지 않기 위해 모두에게 김밥을 주지 않는다면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아이들은 점심을 굶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김밥을 달라는 아이들 모두에게 김밥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단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아낌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마저도 말입니다. 우리도 그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사랑으로 희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느 학교에 언제나 한 아이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알고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하여 설득해 보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마침내 선생님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자를 들어 그 개구쟁이의 손바닥을 때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소란을 피우는 이 불한당에게 자를 들어 때리려던 순간, 어떤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이번엔 다르게 해보자. 이 개구쟁이에게 내 손바닥을 때리게 해 보자.' 그래서 자기의 손바닥을 때리라고 하자 놀랍게도 이 개구쟁이는 자기 손바닥에 호된 일격을 가하는 것이 아닌가! 그 후로 선생님은 단  한 번도 그로 인해 고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미국 시카고의 어느 마을 아이들은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선물을 받으려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낡은 옷을 입고 있었고 양말을 신은 아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앞에 서 있던 열 살 난 남자아이가 자기 뒤에 서 있는 여자아이를 보니 신발도 신지 않은 발이 더 추워 보였습니다. 남자아이는 모자를 벗어서 여자아이의 발 앞에 던져 주며 "자, 그 위에 발을 올려 놔. 그러면 좀 따스할 거야." 하고 말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크리스마스 날 선물을 기다리는 이 여자아이에게 이 한 마디 말은 더없이 아름답고 따뜻한 선물이었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고, 덴마크에 거주하던 모든 유태인들에게 가슴에 노란별을 달게 하였습니다. 그 당시 덴마크에는 왕이 바로 크리스천 10세였습니다. 크리스천 10세는 그 나라의 국민인, 곧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노란별을 달자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태인들이 노란별을 달아야 하는 그 날이 밝았을 때, 가슴마다 노란별을 단 덴마크 국민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던 것입니다.
유태인도 덴마크 시민이니 차별하려면 우리도 함께 차별하고, 죽이려면 함께 죽이라는 시위였습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이 가장 적었던 점령지가 덴마크였습니다.

사이러스 햄린이라는 열 살 된 소년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어느 국경일을 맞아 어머니가 소년에게 용돈을 7센트를 주었습니다. 사이러스는 그 돈으로 빵과 사탕을 사먹으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이러스, 그 중에서 1센트나 2센트는 파러 아주머니 댁에 있는 선교 모금함에 넣는 것이 좋지 않겠니?" 사이러스는 파러 아주머니 댁으로 가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골치 아픈 문제였습니다. '선교헌금으로 1센트를 넣어야 하나, 2센트를 넣어야 하나? 어머니가 딱 몇 센트를 넣으라고 정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한참 만에 사이러스는 2센트를 넣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양심의 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뭐라고? 배를 채우는 데는 5센트를 쓰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겨우 2센트를 내겠다고?' 그리하여 사이러스는 군것질에 4센트, 헌금에 3센트를 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가볍질 않았습니다. 드디어 선교 헌금함에 다다른 사이러스는 순간적으로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얼마를 넣는 것이 옳은지를 결정하는 것이 어린 소년의 마음에는 커다란 점이었습니다. 사이러스는 눈을 딱 감고 용돈으로 받은 7센트 전부를 헌금함에 털어 넣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사이러스는 허기로 지쳐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자기가 굶게 된 경위에 대해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접시에 빵과 우유를 가득 담아 사이러스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자랑스럽게 웃고 계셨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Sunday School Times-디럭스바이블-7센트의 고민 )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도 희생은 따릅니다.

. 사랑의 수고에는 열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58)
1993년 미국의 모범 경찰상은 라스베가스 경찰서의 로리 터글(Tuggle)씨가 받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 상은 경찰국장협의회(IACP)가 해마다 대상 한 명과 장려상 약간 명을 결정하여 수여하게 됩니다. 용기나 수사능력만으로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의 화목과 평화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까지 폭넓게 생각해서 적합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입니다.  1992년 4월 30일, 도박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인종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약 2백 명의 폭도가 철봉, 돌멩이, 권총으로 무장하고 도심지 가게들을 방화하며 물건을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넓은 지역에서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어서 경찰력으로 사태를 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때 로리 터글은 가장 사태가 험악한 뉴크러스 쇼핑센터 지역에서 40명의 경찰을 지휘하고 있었다. 폭도는 트럭을 향해 전진했다. 터글은 부하 경찰들에게 발포 금지령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경찰들은 대장을 따라 육탄으로 돌격했습니다. 이것을 본 폭도들은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들이 평소에 사랑하던 로리가 선두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말없이 철봉, 돌멩이들을 내던지고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순간적인 용기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존경과 사랑을 받던 그의 인품의 소산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동료들은 "로리 터글은 미움을 녹이는 마력을 가진 듯했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외치며 폭도를 향해 돌진하던 그 모습은 패튼 장군이 부활한 것 같았다"라고 하며 그에게 찬사를 던지는 걸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떤 교사가 생각 없이 경솔한 행동을 취한 것 때문에 면직 당했습니다. 그는 여러 학교에 취직 교섭을 해 보았으나 매번 거절당하자 교사직을 완전히 포기할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새 학년이 시작되자 그는 다시 복직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담임한 학급은 모두가 공부하기 싫어하고 선생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만 모인 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사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자신이 무능한 교사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자기 교원생활에서 실천하려 하였습니다. 그 정신에는 미천한 직책도 없고 멸시받을 아동도 없었습니다. 그를 애타게 만드는 아이일수록 더욱 힘써 가르쳤습니다. 또한 아이들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지도하고 육성했습니다. 그 해가 다 지났을 때 그는 오랜 교원생활에서 가장 보람 있는 해였다며 기뻐했습니다.

형무소를 제집 안방인양 드나들던 고아가 있었습니다. 계속적인 범죄로 이번에도 재판장 앞에서 재판 받아 형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할 말은 없는가?" 재판장의 말에, 이 고아는 '잔소리 말고 형무소에 빨리 보내 달라'고 말했습니다. 재판장은 어이가 없어서 그 애는 '구제불능'이라 생각하면서, 방청한 고아원 원장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애의 문제는 아무도 그 아이에게 따뜻한 사랑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재판장은 깊이 생각하면서, 그 애를 그 고아원 원장에게 맡겼습니다. 원장은 그 애를 데려다가 아들같이 사랑하여 지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애는 삶의 의욕이 넘쳐 활기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문둥병에 걸리고 굶주린 한 소녀가 마을에서 막대기와 돌을 든 주민들로부터 고향에서 쫓겨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선교사가 그 아이를 팔에 앉고 떠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비켜서며, "문둥이! 문둥이!" 하고 외쳤습니다. 그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를 구해 준 선교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나를 구해 주셨습니까" 선교사는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모두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너는 나의 자매이며 나는 너의 형제이다." 소녀는 물었습니다 "어떻게 제가 당신께 보답할 수 있을까요?" 선교사가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가능한 많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어라." 이 소녀는 죽기까지 3년 동안 다른 나병환자들의 상처를 돌보고 밥을 먹여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을 사랑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함께 동역하는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항상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인하여 감사 기도하는 이유에 대해 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기억함이라 합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성도의 신앙의 핵심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충만하였기에 목회자들의 감사 제목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나타내 주거니와 믿음과 마찬가지로 실천적 행위를 동반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병자와 굶주린 자를 돕기위해 자선을 행하였으며,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열성적 헌신을 다하였습니다(Hendriksen). 이것은 사도 바울이 다른 곳에서 표현한 바, 복음을 위한 수고들입니다(3:5;고전 15:10, 58;고후 10:15;갈 4:11;빌 2:16).
  사랑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야 하는, 본능에 가까운 감정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했는지 모릅니다. 나라를 사랑한다, 백성을 사랑한다는 미명 아래 독재를 휘두르는 정치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한다는 미명 아래 오히려 상대방을 학대하는 오만 불손한 파렴치한 연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한다는 미명 아래 자식을 소유물처럼 생각하고 그 개성과 인격을 무시하여 자기 뜻대로 하려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사랑의 진실을 말하며 사랑에는 수고가 따른다고 합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은 수고 사랑에 의해서 촉진된 수고입니다. 수고는 피곤할 정도로 고된 일을 말합니다. 사랑은 수고할 때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수고 없는 사랑이란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수고 없는, 감정적이며 추상적인 사랑은 쉽게 무너지고 깨어집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희생하는 수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수거하는 달입니다. 사랑의 수고는 여러 모습이 있습니다. 사랑의 수고는 자기희생이 따릅니다. 그러나 사랑의 수고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되 사랑으로 수고합시다. 
(설교 : 강 성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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