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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요 4: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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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 예수님은 누구인가? 여러분에게 있어 예수님은 누구신가?
지나가는 나그네? 아니면, 먼 옛날 이스라엘에서 있었던 한 유대인 남자? 아니면, 선지자?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물 좀 달라” 할 때, 지나가는 유대인 남자가 자신에게 수작 부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와 대화해 보니까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마 이 분이 선지자인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오시면 알려주신다고 전해진 예배에 대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주 속 시원하게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 주셨습니다. 그 순간 “아! 이분이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구나”하는 감격이 있었었습니다. 그리곤 동네로 뛰어가서 “와 보라. 이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외쳤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 낮에 물 길러 나온 여인. 그러나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물동이까지 팽개치고 동네 사람들에게 달러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신앙은 입으로만의 고백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행동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 니고데모는 “어떻게 어머니 배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어머니 배속에서 나오는 것은 한 번의 일인데 어떻게 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 니고데모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한 번이 아니라 평생이 삶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한번이 거듭남이 아니라 평생 삶으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여인 그리스도를 만난 여인,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가 들어가서” 물동이는 물을 담기 위한 그릇입니다. 물은 그 여인에게 있어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려두고” 지금 이 여인은 먹어야 사는 생명보다도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하는 생명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오해 혹은 착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 주신다.”하니 예수님이 “생명”이란 것을 건네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건네받으면 그 다음에는 예수님과 무관해지는 겁니다.
아닙니다. 예수 자신이 생명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버려두고 무엇을 가져야 합니까?
이것을 바로 하는 것이 가치관이라 그러는 겁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여쭈었던 것,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 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산”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배하기 위해 지은 성전이 있었던 곳입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도로를 중심으로 한 쪽은 그리심 산, 한 쪽은 에발 산이 있습니다. 신명기 27:11이하에 보면, 이스라엘 12지파 족장들 중 그리심 산에 오른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축복하고, 에발 산에 오른 사람은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 저주했습니다. 지금도 그리심 산에는 풀과 나무가 있으나, 에발 산은 자갈밭과 암석으로 되어 있는 바위산이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혼혈이 되었다고 유대인들이 천대하고 상종도 하지 않자, 유대의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 할 수 없어, B. C 450년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리심 산에다 성전을 지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불타 버리긴 했지만…….
그러니 사마리아 여인은 궁금한 겁니다. 어디서 예배 드려야 하나? 그리심 산인가? 예루살렘인가?
어디서? 이곳 입니까? 그곳 입니까?
예수님의 대답.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이 산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말고…….” 그 어디도 아니라는 겁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배하는 곳은 그 당시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곳으로 정해 놓으신 곳이 아닙니다. 열왕기상 12:26-30에 보면, 북 왕국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된 여로보암은 아무리 생각해도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다스리는 백성들이라도 때만 되면 르호보암이 다스리는 예루살렘으로 내려가 여호와의 전에서 예배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두었습니다. 그리곤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의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거기 30절에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그랬습니다.

그리심 산의 예배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가 아니라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 놓은 예배, 그런 예배는 하나님께 안 받으십니다.
예루살렘 예배 역시 형식과 위선과 거짓과 부패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성전에 가셔서 돈 바꾸는 상자를 뒤집어 없고 비둘기 파는 자를 내 좇고 하신 것입니다.
타락한 종교, 형식만 남은 종교.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방법으로 조작한 예배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의 형식만 갖춘 예배도 싫어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심 산도, 예루살렘 성전도 이미 예배 할 곳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예배 할 때가 이르리라” 그렇다면 이 때가지 드린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는 것 아닌가? 솔로몬부터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진 예배는 뭔가? 그 동안의 예배는 예배가 아니란 말씀인가?
어떤 사람이 절에 갔다가 중보고 “예수 믿으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중이 와서 뺨따귀를 때리더랍니다. 왜 맞은 지 아시지요?
조상 대대로 드려온 예배.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예배가 아니다. 이제 너희가 아버지가 예배할 때가 올 것이다.” 하셨으니…….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일까?

1.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참된 예배는 구원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만약 구원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 예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구원이 없다면 지금 여기 우리가 모인 의미가 뭔가? 왜 모였는가? 왜 예배 한다고 여기 있는가?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누구에게서 난다고요?
“유대인”
지금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 때문에 유대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대화하셨다면 “이는 구원이 다윗 자손에게의 남이라” 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곳곳에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있는데, 그 예언들을 종합해 보면 메시야는 다윗은 자손에게서 오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셨을 때 백성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 메시야에게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겁니다. 메시아라는 겁니다.

따라서 예배를 구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빠진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물 좀 달라.”는 말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예수님께서 여러분 속에 샘물이 솟아나오는 우물을 파 놓으신 것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최신형 양수 펌프를 시설해 놓으신 것 아닙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곧 예수 자신인 것입니다.

예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구원을 약속하시고 복과 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셔도 누가 없으면? 예수님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구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곧 복이요 은혜이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잘못된 예배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예배 드려도 예수님을 만나는 감격이 없습니다. 예배 드려도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이 없습니다. 만나러 교회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 만나러 교회 옵니다. 예배 후 예수님을 만나는 감격과 기쁨이 있어야 하는데,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사람 때문에 신경질 내고 돌아갑니다.

나폴레옹 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만약 내 방에 소크라테스가 들어온다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할 것이다. 그러나 내 방에 예수님이 들어오신다면?” 어떻게 한다고 했을 것 같아요? “나는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할 것이다.”

19세기 중엽, ‘헨리워드 비쳐’라고 하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유명한 설교자였고, 그의 누이동생은 미국 노예의 참혹상을 폭로한 유명한 소설 ‘엉클 톰스 캐빈’(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스토우 부인입니다.
헨리워드 비쳐 목사님의 설교는 화려하지도 않았고, 재미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요사이처럼 사람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그런 설교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헨리비쳐 목사님의 설교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어느 주일 설교시간. 교인들은 당연히 비쳐 목사님이 설교하실 줄 알았는데, 손님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겁니다. 알지도 못하는 손님 목사. 그래서 일부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신 손님 목사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헨리 비쳐 목사를 예배하기 위해 오신 분들은 지금 다 나가십시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하기 위해서 오신 분들은 그 자리에 앉으십시오.” 그랬다는 겁니다.

시편 29:2,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 거룩한 곳을 입고 여호와께 경외할 지어다”
“거룩한 옷을 입고” 성전 예배는 먼저 거룩해지는 것이 조건입니다. 그래서 거룩하다고 할 수 없는 사람은 성전예배에 참석 못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 역시, 여자라고 하는 이유 때문에, 또한 다른 사람 보기에 온전치 못하다는 이유 때문에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진정한 예배란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구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배하는 것이다.”라는 겁니다.
거룩해서가 아니라, 비록 죄인이지만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을 받기 때문입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장대 높이 매단 놋뱀을 보면 살았듯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예배의 주인공은 누구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으십시오.

2.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신령’ 헬라어 성경에 보면 정관사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럴 때는 그냥 ‘영’으로 해석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여인의 물음, “예배는 어느 곳에서 해야 합니까?”
여인은 예배를 단순히 모이는 장소나 의식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그 장소에, 그 의식에 몸으로 참석하면 곧 예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몸으로 예배합니다. 예배하는 자리에 왔다간 것만으로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찬송함으로서 예배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만 들으면 예배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헌금을 드려 나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예배 했다고 만족합니다.
아닙니다.
영으로서의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참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을 영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만나든, 찬송과 기도를 통해서 만나든, 하나님의 임재를 여기서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진리와 거룩하심과 자비하심과 권능과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체험 하면서, 그 받은 은혜대로 찬양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 참 예배인 것입니다.
보통 예배에서 자기 감정으로 신나 합니다.
아닙니다. 예배란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진정’ 이것은 ‘진리’라는 말입니다.
“진리로 예배한다.”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는, 진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 하나는 ”진실하게“ 예배해야 한다는 겁니다.
진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는 말씀 드렸고, “진실하게 예배”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진실하게 하나님을 만나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5:8-9,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어 경배하는 도다.”
찬송할 때 옆 사람 의식하거나, 기도 할 때 옆 사람 의식하거나, 헌금 할 때 다른 사람 눈치 보면서……. 이런 것은 진실한 예배가 아닙니다.

요즈음 예배는 너무 인간적입니다. 영적인 감동이 아니라, 시각과 청각의 감동을 일으킵니다. 시청각 교육의 이점은 “오래 기억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시청각 예배 역시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기억이 아니라 삶입니다. 변화입니다. 단 한 말씀에도 “그렇군요. 그렇게 살겠습니다.” 하는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읽은 책 가운데 하나, 한기총 21세기 위원장 하셨고, 한국 교회갱신 연구원 원장이며, 장로교 서울 교회 담임목사이신 이종윤 목사님의 글 “개혁교파들이 카돌릭에 대항해서 개혁교회를 만드느라고 모든 것을 개혁한 것은 좋은데, 예배의식 마저 벗겨 버렸습니다. 강대 위에 십자가를 다는 일은 대한 예수교장로회 총회 결정으로 금지 했습니다. 우상이라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종탑도 우상이 되고, 강대에 붙인 십자가도 우상이 될 것 아닙니까? 그것이 우상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예배는 영적 예물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적 예물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옷을 보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손의 헌금 액수를 세고 계시지 않으십니다.
영적 예물이란, 진실하고 깨끗한 마음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찬양에도, 기도에도, 헌금에도, 이 마음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 들을 때도 이 마음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하는 것은 생수의 우물에서 생수를 길러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 할지라도 예배가 없으면 그 은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 어디에서도 결코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배는 성도의 기본 행위입니다.
일반적으로 일요일 곧 주일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를 위해서 있는 날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쉬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주일을 오랜만에 쉬는 날로 생각해서 “쉬어야 월요일부터 일 할 거 아니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가 주일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있는 날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주일날 하나님께 예배하므로 일주일 동안의 힘을 얻는 날입니다.
갈수록 예배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을 봅니다. 별로 하는 일 없을 때는 교회 일 열심히 합니다. 예배도 시간마다 참석합니다. 그러나 별로 할 일이 생기면 교회일도 등한히 하고 심지어 예배도 빼먹습니다.

어느 교회, 낮 예배 마치고 점심 식사 그리곤 집에 가면 저녁예배 안나옵니다. 점심식사하고, 선교회 모임도 갖고, 교사 모임도 갖고, 성가대 연습도 하고, 종일 교회 있다가도 저녁 예배 시간이 되면 안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예배는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국민일보에 나온 사진을 기억합니다. “골고다의 고난”을 재연했습니다. 예수님으로 분장한 사람이 큰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오르는 겁니다. 그런데 양산 쓰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참여하려고 모인 사람들이 햇볕이 뜨거워 양산 쓰고 구경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경꾼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오늘 이 말씀 들으면서, “어느 곳에서 예배 하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라, 어디서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꼭 예배당에 나와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주일 낮, 가족과 촉석루에 가셔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머리 굴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배란, 본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테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느 장소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어떤 시간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어느 장소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려거든 특정한 시간인 주일날, 특정한 장소인 교회에서 먼저 예배하는 사람이 될 때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보세요.

교회에서 거룩한 예배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가정에서나 일터에서 혼자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을까요? 교회생활을 등한히 하는 사람이 어디서나 영이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는 것 보셨습니까? 교회는 모든 경건 생활의 모체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 모여 바른 예배하는 것을 통해 가정예배가 이어지교 생활예배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배는 본질은 혼자 드리는데 있지 않습니다. 예배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거룩한 성도들이 함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함께 드리는 예배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기 위해 교회 나와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고, 우리가 전도해서 그들을 교회로 이끌고 나와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는 겁니다.
예배하는 이 자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부르신 자리입니다.
예배하는 이 자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복 주시는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수의 우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생수를 퍼 올려 마시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갈증을 느끼게 되고 결국 목말라 죽습니다. 여러분은 예배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이 생수를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에서, 생활에서, 하나님이 은혜와 기적을 경험하시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예배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먼저 예배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에게 은혜와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예배함으로 메시야 되시는 주님을 만나십시오. 예배함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삶에서 날마다 풍성하게 살아나는 예수님의 생수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이 영 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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