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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수와 같은 사람, 바르실래 (삼하 19:31-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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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간, 우리 사회의 제일 큰 이슈가 있었다면 그것은 단연 지난 8월31일에 정부가 발표한 "부동산 특별대책"일 것입니다. 그날 이후 주요 일간지들은 "이제 서민들은 세금폭탄을 맞았다느니,,," "이제 서민들은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느니,,," 하면서 마치 정부의 부동산 대책이 크게 잘못된 듯한 분위기로 여론을 유도하기에 바빴습니다.

경제나 특히 부동산에 밝지 못한 저로서는 최근에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를 중심해서 사태의 진위를 밝혀보려고 노력해 보았습니다. 지난 8월 말 현재 우리 나라의 주민등록상의 세대가 1,777만세대였습니다. 이 가운데 집을 한 채 이상 가지고 있는 세대가 54.6% (970만 세대) 였고, 집을 한 채도 가지고 있지 못한 무주택세대가 45.4%가 되었습니다. 집을 가진이와 가지지 못한 이가 반반 정도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제는 농촌이나 산골짜기까지도 주변 경관과는 상관없이 고층아파트들이 가득 가득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저렇게 많은 아파트를 지어대는데 아직도 자기 집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절반이나 된다니... 하는 마음으로 늘 안타까웠습니다.

통계로 보면, 한 세대에서 집을 두 채 이상 가지고 있는 세대가 5%라고 합니다. 이 5%의 사람, 곧 89만 세대가 사실상 이번 8. 31 부동산 대책의 주요 대상자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집값이 6억원 이상이 되는 집을 가지고 있는 세대가 과세 대상이라고 하는데, 지금 부천에서 가장 좋다고 하는 현대홈타운도 30평 기준으로 볼 때 평균 3억-4억 정도 밖에 안 되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일부 신문들은 무슨 서민들이 세금폭탄을 맞았느니... 하며 여론을 잘못 유도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아마도 대통령이 밉다 보니까 그가 하는 모든 것을 다 밉게 본 현상이랄 수도 있지만, 언론의 사명이 막중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왕 우리가 주택 이야기를 했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한 세대에서 주택을 11채 이상 보유한 세대가 14,023 세대나 있었고, 심지어는 한 세대가 집을 무려 1,083채나 가지고 있는 기가막힌 사실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세금을 좀더 많이 부과하겠다는 것입니다. 요즘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 진출해 모든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박지성이나 이영표 같은 선수를 부러워 하는 것은 단지 그들의 명예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예를들어 박지성 선수의 연봉이 70억원이라며 모두가 부러워 하지만, 실상 영국에서는 50%가 세금으로 거두어 가는 제도속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모은 재정으로 노인복지, 어린이 복지를 위해서 정부가 쓰겠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바르실래라고 하는 사람을 소개하면서, 그의 인격과 신앙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시므이와 시바, 그리고 므비보셋이라고 하는 세 유형의 사람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바르실래를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알아 간다는 것은 무척 흥미진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 왕에게 가까이 다가와 이런 저런 모양으로 영향을 끼쳤던 4가지 유형들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진정한 동역자를 발견하는 안목과 그들을 여러분의 파크너로 삼는 기쁨을 함께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시므이는 이해관계에 따라서 약삭 빠르게 처신하는 카멜레온과 같은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시바는 주인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여 점수를 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므비보셋은 처음에는 왕이 오해하여 서운한 마음을 가졌었으나, 후에는 그의 진실함이 증거되어 오히려 신임을 크게 받았던 사람입니다. 보이는 곳에서 잘 하는 사람들이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라면, 어떤 유형의 사람들을 여러분의 동역자로 삼으시겠습니까?

최근 서울의 큰 교회들은 권사나 안수집사가 장로가 되는 일이 너무나도 어렵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음지에서 열심히 충성하여도 성도들이 자신을 알지못하기 때문에 장로 투표에서 2/3를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적은 표를 받아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고민 끝에 내놓은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주차장에서 봉사하는 것이라고 어느 방송국에 근무하는 장로께서 알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는 요즘 주차장 안내 봉사가 안수집사들 사이에서는 가장 인기있는 봉사자리라는 것입니다. 묵묵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며 헌신한다는 것이 쉽지않다는 것을 실감하는 장면입니다.

다읫 왕이 바르실래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바르실래는 자신의 나이가 80이라고 소개하면서 또한 자신은 거부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큰 부자라는 이야기입니다.그는 요단강 건너편으로 피난살이를 온 왕과 일행들을 위해서 극진히 공궤하였던 사람입니다. 공궤하였다는 말은 음식물을 가지고 섬겻다는 의미입니다. 다윗 왕 한 사람만 섬겼다고 한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사실상 왕궁이 다 옮겨온것이나 다름이 없는 살림살이인데 얼마나 수고와 헌신이 컸겠습니까? 아무리 부자라고 하지만 얼마나 많은 재산이 축이 났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이제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 나서 요단강을 건너 왕궁으로 돌아갈 날이 되자 왕은 바르실래를 불렀습니다. "너는 나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이제는 내가 공궤하리라" 얼마나 그동안의 공궤를 귀하게 여겼으면 왕이 백성인 바르실래에게 공궤하겠다고 요청하겠습니까? 하지만 바르실래는 정중히 거절하고 있습니다. 내가 왕을 공궤한 것은 당연한 일이요, 왕께서 공궤를 받으신 것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르실래는 자신의 나이가 80세이어서 이제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자신이 왕을 따라가 왕의 짐이 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자신은 왕께 어떤 보상이나 어떤 기대를 바라고 섬긴 것이 아니라, 백성으로서 기쁨으로 왕을 섬겼노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34절에서 37절까지의 바르실래의 고백은 참으로 겸손한 그의 진정한 모습을 보는 듯 하여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본적인 욕망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일 기본적인 욕망은 무엇보다도 건강에 대한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도 축복기도를 할 때 빼놓으 수 없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이 아이에게 건강을 주시사 질병에 놓이거나 병마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옵소서...." 어린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는 우리의 기대가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건강을 주신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병원을 가보면 온통 환자들 뿐입니다. 이렇게 환자들이 많은가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건강하다고 하는 내가 감사를 잊었구나. 당연한 줄 알았는데, 이것보다 더 큰 감사가 어디 있을까? 피아노를 치면서 손가락이 짧다고, 한 옥타브가 안 된다고 짜증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록도를 가 보세요. 문둥병으로 손마디가 다 썩어서 손 끝의 마디가 없어요. 보통 한 마디, 두 마디, 세 마디가 손가락을 형성하고 있는데, 마지막 마디가 다 떨어져서 두 마디 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소록도 교회에 피아노 치는 그 집사님을 보니까 그 두 마디 가지고도 피아노는 잘 치대요. 70, 80세 노인들이 하모니카로 특송을 하는데 손마디가 없는데 손바닥으로 잡고서 하모니카를 부는데 참 잘 부대요.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고, 우리에게 무엇이 불만입니까?

우리에게 건강에 대한 욕망이 이루어지면 사람은 거기에서 또 한걸음 나갑니다. 대개 두가지 유형으로 우리의 욕망이 나갑니다. 첫 번째는 물질에 대한 욕망입니다. 돈돈 하다가 돌아버리는 것이지요. 모든 가치가 돈에 있습니다. 그리고 돈을 벌고 또 돈을 버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아파트를 1000채를 가지고도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전체적으로 보니까 우리나라에 총 주거할 수 있는 주택과 아파트를 보니까 전체 세대수와 전체 주택수가 맞아요. 한 가구가 한 집을 가지고 있으면 다 자기집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있습니다. 더 아파트를 지을 필요가 없는 통계를 가지고 있는데, 문제는 두채, 세채, 네채, 다섯채, 욕심을 가진 사람 때문에 국민의 45%가 자기집을 가지지 못한 거예요.

욕심 때문이지요. 그것이 땅이나 집이 투기의 대상이 되어서 그래요. 그것을 사 놓으면 일년 뒤에 5000만원이 오른다더라, 그런 일들을 불행하게도 우리 크리스찬들에게도 모든 사람들 앞에서 회개선언을 했는데 우리 성도들이 우리 교회가 부동산을 투기해서 이익을 얻었음을 온 국민 앞에 회개한다는 그런 선언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동산 투기에 우리 성도들도 많이 연루 되었을 거예요.

자기가 살고 있는 집 외에 부동산의 의미로 가지고 있다면 아마 자유롭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아니지요. 우리의 욕심입니다. 그 물질적인 우리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제가 어느 성도가 이제 이사가신 분입니다만, 늘 생활이 어렵다고, 그래서 교회에서 헌금도 제대로 못하고, 십일조 생활도 제대로 못 하시길래, 저는 그 분이 굉장히 가난한 분인 줄 알았어요.

나중에 이사갔다가 알게 되었는데 그 분이 저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제가 목사님에게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메일을 보내왔는데, 알고보니 그 분은 집을 세채나 가지고 있었어요. 세 채나 가지고 있는 그 부자가 늘 없다고 그러고 늘 돈이 없다고 그러고, 헌금할 돈이 없다고 그러고 살고 있어요. 자기가 이제 목사님에게 회개하는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인간의 물질적인 욕망은 한이 없어요.

그리고 또 한 그룹은 학문적인 지식이 그런 욕망으로 나갑니다. 여러분, 지식의 가장 정점에 있는 것은 교수님의 지위로 생각됩니다. 그러면 학문의 최고의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나 물질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정상에 오르고 나면 거기서 머무르는 분들이 많지 않아요.

거기서 마지막 인간의 욕망을 향해서 달음박질 합니다. 돈보따리 들고 갑니다. 지식과 학문의 보따리를 들고서 명예를 위해서 달려가는 거지요. 그래서 그렇습니까? 우리나라 대부분 시의원, 도의원들은 대부분이 다 건축업자들입니다. 국회의원도 마찬가지예요. 돈을 번 다음에 마지막으로 해 볼 수 있는 우리의 욕망이 뭐냐? 명예 한 번 얻어보자. 그리고 돈 보따리 들고 다니면서 선거운동 하고, 그러다 보니까 부정선거를 하는 거예요.

우리 교회도 그런게 들어와서 감독선거, 총회장 선거에 돈을 쓰는 어처구니 없는 우리 사회 속에 들어와 있던 잘못된 유형이 우리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이거 우리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고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건강을 주신 하나님, 재물을 주신 하나님, 지식을 주신 하나님, 명예를 주신 하나님, 그러나 그것은 감사의 조건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과 정욕의 대상인 거예요. 고개를 넘어가면 또 하나의 정욕을 위해서, 또 하나의 욕심을 위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그러한 모습 속에 오늘 80이 된 거부로써 왕, 그의 신하와 그의 측근들을 섬기는 바르실래, 그러면서 이제 왕이 그에게 공궤하겠노라고 분에 넘치는 은혜를 갚겠노라는 왕의 제안도 거절하고 저는 이 땅에서 이제 조상의 묘에 돌아가는 것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조금도 그는 그 부분에 있어서 인간적인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순수하게 왕을 섬긴 그것으로 저는 기쁨을 삼고 싶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부분에서 요단에서 바르실래를 만난 다윗왕에게 바르실래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윗왕에게 생수와 같은 사람이었다. 이 광야와 같은 사회 속에서 생수와 같은 사람을 만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우리의 삶에서 바르실래와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조금만 해도, 조금만 자기에게 서운한 일만 해도 우리는 뒤돌아 보지 않는 이러한 사회풍조 속에서 그는 기대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그것을 여겼던 바르실래와 같은 사람, 이 생수와 같은 사람을 저도 그리워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바르실래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 참 신앙의 모범이 무엇인가를 다시한 번 생각하면서 주님, 주님 이 땅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고백하신 것처럼 진정으로 내가 섬김을 받으려고 있는 것인지, 섬김을 받기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 분에게 섬김이 끊어진다면 그 분에게 남을 수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섬김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던 주님, 바로 그 분을 닮고, 그 분의 삶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 마치 광야에 생수와 같은 사람, 바르실래의 삶, 오늘 우리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주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온전히 거하기를 원합니다. 말씀 가운데 거하시는 주님, 오늘 허락하신 말씀 속에 진정으로 신앙의 참 모습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고 이 시대, 광야와 같이 메마른 이 시대에 생수와 같은 사람, 바르실래가 되도록 저희들을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 요 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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