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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 기도하라 (III) (마 6:11, 신 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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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기도하라 (III)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태복음 6장 11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장 2절-3절)

오늘도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문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주님이‘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면서 가르쳐준 기도문 중에서 땅에 속한 것 중에 제일 먼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땅에서 사는 동안 제일 필요한 것이 <양식>이기 때문일 줄 압니다.

1. 인간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모두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합니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60년대만 해도 먹는 문제가 제일 심각했습니다.
애들이 집에 오자마자 하는 말은‘엄마 밥줘’라는 말이었습니다.
남편들도 직장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여보 나 밥줘’였습니다.
우리나라 인사법이 어른들을 만나면‘진지 잡수셨습니까?’였습니다.
어린이들 동요에서도
‘토끼야, 토끼야 산속에 토끼야, 겨울이 되며는 무얼 먹고 사느냐? 흰눈이 내리면 무얼 먹고 사느냐?’
고 먹고 사  는 것을 걱정하는 노랫말이었습니다.

이것은 땅에서는 배고픔이 제일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문호 괴테의‘눈물을 흘리면서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참맛을 알 수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처럼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절실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그 나라의 도래를 바라보면서,
그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도록 힘쓰며 사는 사람들에게도, 제일 우선은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이 먹는 것 때문에 기독교 국가이었던 제정 러시아에서 낫과 망치를 든 노동자 농민들의 피의 혁명이 일어났던 것 아닙니까?

여기서 <양식>이란 말이 함축한 뜻은 경제 전체를 의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적 문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경제적 생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총체적 삶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양식을 주소서’라고 구하는 것은 물질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양식을 달라’는 것은 내가 먹고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임을 깨달아야 함을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밥에 의지하여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 그러면 <일용할 양식>이란 말의 요지는 무엇인가?

헬라어 원어로는‘에피우시온’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매일’(daily)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
‘오늘을 위한’(for today)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킹 제임스 번역에는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우리의 매일의 양식을 오늘 주옵소서)라고 번역했습니다.
요즘 새 영어번역에서는 Give us our food for today (우리에게 오늘을 위한 양식을 주소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매일의 양식이던, 오늘의 양식이던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늘 걱정거리입니다.
경제적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돈을 많이 번 사람도 늘 불안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큰 재벌 총수도 걱정이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지난번에는 모 재벌이 자신의 회사 빌딩에서 뛰어 내려 자살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두 경제적인 것에 얽혀진 문제들이라고 봅니다.

또 경제 문제는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두 내일을 염려 합니다.
‘내일 내가 어떻게 될까?’하여 염려들을 하게 됩니다.
내일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내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내일을 염려하며 살게 됩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아무리 창고를 넓히고 양식을 쌓아 미래를 준비했다 해도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양식으로 내일의 생명을 보장 받았다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의 출애굽 과정에서 드러났습니다.
그것이 <만나>의 교훈이었습니다.
만나의 근본 교훈이 신명기 8:2-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양식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려고 만나로 살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8: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3. 그러면 <일용할 양식>이 얼마만큼의 양식인가?

필요한 만큼의 양식입니다.
필요한 만큼이 어느 정도인가?
이 답이 잠언 30:8절에 나타났습니다.
배불러 하나님 모른다고 교만한 죄를 범치 않을 수 있을 정도이고,
가난해서 도적질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
이것이 바로 필요한 양식입니다.

이렇게 필요한 양식을 구하라는 것은 물질이 인간생활에 필요하지만 그 물질을 탐하면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은 끝없는 탐심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탐하는 탐욕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되고,
결국 물질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필요한 양식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필요한 양식을 내게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골고루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정신이 기독교 사랑의 공동체 의식입니다.
참된 사랑의 공동체는 우선 밥상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밥상 공동체가 기독교 정신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기독교 사회개혁 운동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스스로 이루어지도록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주님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일용할 양식을 골고루 주소서...’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물질을 경원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물질을 숭배하는 종교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의 밥그릇에 필요한 대로 채워 달라’고 기도하고,
그런 세상이 되도록 힘써 노력하는 종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요,
하늘 아버지의 원하시는 뜻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계를 돌아보면 이 세상 여러 곳에서는 아직도 밥그릇이 비어 있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져 하루에 12만5,000명이 죽었는데, 지금 세계에는 원폭에 떨어져 죽은 만큼의 사람들이 3일마다 기아로 죽어가고 있고, 10억에 달하는 인류가 영양실조에 걸려 있으며, 세계 인구의 ¼이 하루에 1달러 미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돕고 있는 미얀마 신학생들의 월 기숙사비가 6불이면 한달 생활비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이 기도문은‘모든 사람의 밥그릇에 밥이 골고루 차는 날이 오도록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라는 것이고,
또‘그런 일을 위하여 살도록 내가 오늘 밥을 먹게 하소서’라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잔치에 비유하였습니다.
천국은 마치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하면서 잔치로 비유하였습니다.
잔치 날에는 모두가 다 배불리 먹는 날입니다.
또 눅 22:27절에서 제자들 가운데 누가 크냐에 대하여 시기하는 것을 보면서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면서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나는 너희들 가운데 섬기는 자로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의 본래의 의미는‘잔치 집에서 밥을 주는 자로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밥을 골고루 주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결론입니다.
우리가 왜 식사를 합니까?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한자로 식사(食事)를 먹을 식(食) 죽을 사(死)로 <먹다 죽는 것>으로 먹다 죽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먹을 식(食)에 생각할 사)를 써서 <먹으면서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식사라고 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한 그릇 밥을 먹으면서도 두 가지로 갈라진 것입니다.
오직 배고픔의 창자를 채우기 위해 먹다 죽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도 미래를 생각하며 먹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느 쪽에 속한다고 보십니까?
모름지기 우리 신앙인들은 한끼 밥을 먹으면서도 먹다 죽는 인생들이 되지 말고, 비록 어려운 환경에서 한 그릇의 밥을 놓고도 미래를 바라보며, 감사하면서 먹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매일 대하는 밥과 모든 물질적인 필요 속에 담긴 깊은 진리를 깨닫게 해 줍니다.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우리의 유한한 생명은 궁극적으로 밥을 주시는 하나님께 의존된 생명이라는 진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밥은 오늘의 배고픔만을 면하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꿈, 내일의 목적을 위해 먹는 것이라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노력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
(김 이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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