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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세 가지 줄 (고전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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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에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사는 형편이 초라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불행한 기색이 없이 늘 만족하게 지냈습니다. 하루는 그리스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저녁 무렵이었는데 디오게네스가 통에 기대어 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내 들어주리다."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대답하기를 “대왕이시여, 햇볕을 가리지 말고 비켜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알렉산더 대왕은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구나”라고 했다고 합니다.

자.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정답을 말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행복의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함께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에서 성공 출세하는 것을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드물긴 하지만 디오게네스처럼 어떤 형편에서든지 만족할 줄 알아야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행복의 기준은 그야말로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그런가하면 나에게 행복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오늘의 행복이 내일의 불행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변화무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행복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실망할 날을 만나게 됩니다.

참 행복은 세상이 줄 수 없으며 오직 천지만물과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습니다. 2천년 교회사에서 사도들을 제외하고 가장 위대한 인물로 손꼽히는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그는 신학자로서 이단 사설로부터 기독교의 정통교리를 지키는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진리를 위해 헌신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20세가 채 되기 전에 이미 사생아를 둘 정도로 방탕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의 지혜를 의지하고 수사학 교수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가 원하던 부와 명성과 쾌락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더구나 마니교라는 이단 종교에 빠져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영혼은 곤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로 그는 회심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참회록에서 고백하기를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 전까지는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결국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와 같이 영적 기근에 고통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요!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는 자유롭지만 물밖에 나오면 죽습니다. 사람은 물 밖에서는 자유롭지만 물속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이처럼 물고기와 사람은 살아가는 세계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 세인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간 저는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세 가지 줄”이라는 제목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착념해야 할 세 가지 보배로운 가치에 관해서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줄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비유컨대, 믿음은 구명줄과 같습니다. 망망대해에서 배가 파선되었는데 마침 그리로 지나가던 다른 배가 보고는 다가와서 구명줄을 던져주었다고 합시다. 죽음의 바다에서 살아나려면 그 구명줄을 붙잡아야 합니다. 죄인들이 구원받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던져주신 구명줄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죄인입니다. 아무리 도덕적인 사람이라도 죄인입니다. 사람의 의로움이란 나은 자와 못한 자의 차이가 오십보백보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보면 똑같은 죄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망망대해에서 배가 파선하면 수영을 잘하는 자나 못하는 자나 누가 와서 구해주지 않는 한 결국은 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 짓고 불의한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뿐인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당케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데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습니다. 오직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있을 뿐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고 하셨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나님의 품에 돌아오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반면에 고집을 부리고 자기의 힘으로 무언가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수영 실력을 믿고 구명줄을 붙들지 아니하고 망망대해를 헤엄쳐 나가려는 것과 같아서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받은 은총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첫째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 보니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 중 한 사람은 고통 중에서 예수님을 보고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부탁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셨습니다.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

둘째로, 거듭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거듭난다 함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영이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였는데, 이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14절 이하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넷째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고 했습니다.  미국 시민권만 가져도 얼마나 으스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다섯째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 하신 대로. 믿는 자들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에는 믿는 자에게 풍성한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한편, 믿음은 죄인이 구원받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성도들은 언제나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로마서 14장 23절에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믿을 때 은혜를 누리고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두 소경이 예수님을 따라 오며 소리 지르기를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시니 소경들이 따라 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고, 곧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도 마찬가지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무덤 앞에서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시니 마르다가 대답하기를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순종하여 돌을 옮겨 놓았더니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려내셨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무슨 일에나 믿음으로 행하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세상을 이기는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소망의 줄을 붙잡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6장 19절에 보니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라고 했습니다. 소망은 우리 영혼의 닻과 같습니다. 배가 항구에 정박할 때는 닻을 내립니다. 그러면 닻이 바다 속 바위에 걸리거나 바닥에 박혀서 배를 붙들어주기 때문에 바람이나 조류에 흘러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소망을 가질 때 죄악의 물살이 거세게 밀려와도 요동치 않고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시험과 환난의 광풍이 불어 닥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반면에, 소망이 없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낙심하고 될 대로 되라고 하면서 자포자기하고 맙니다. 또한 소망이 없는 사람은 매사에 절제하지 못하고 계획이 없이 살아갑니다. 이 같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나 배경이 아니고 소망입니다. 소망이 있을 때 눈에 빛이 나고, ‘나도 한번 해 보아야겠다’는 의욕을 갖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무엇일까요? 먼저, 알아 둘 점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이라는 사실입니다. 죽은 소망이란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을 소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솔로몬은 전무후무한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는 인류역사상 하고 싶은 것을 다 해 보았던 유일한 사람입니다. 소망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이같이 탄식했습니다. “2)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 8)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전 1:) 솔로몬은 이 땅의 헛된 것을 소망했기에 그 모든 소원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헛된 인생이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산 소망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것이므로 산 소망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로 4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3)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사실이지,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기뻐하자면 행복하게 살기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의에 빠져서 지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것을 소망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기업을 소망하기 때문에 세상 일로 인해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에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했습니다.

머리는 생각하는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믿음의 생각을 하려면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며 패배적인 불신앙의 생각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둘째로, 천국의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언제 이 세상을 하직하더라도 천국에 들어갑니다.

셋째로,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주 강림하실 때 무덤 속에 잠자던 자들이 일어나고 우리도 홀연히 변화되어 영원히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과 그에 속한 악한 자들은 심판을 받고 영원한 불못에 던짐 받게 될 것입니다.

넷째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십니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백세가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갔습니다.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그의 믿음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4장 17절에 보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산 소망을 주십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잊고 떠날 때가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끝까지 붙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면한 모든 어려움과 불행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쓸 수 있는 것입니다(롬 12:12).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절망할 때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가능성을 바라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세상적으로 볼 때 소망이 없는 여자였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를 가리켜 전에 일곱 귀신 들렸던 자라고 했습니다. 일곱 귀신에 들렸다 함은 전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사로잡고 있던 일곱 귀신을 쫓아내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가장 정숙하고 거룩한 성도의 모범으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유명한 깡패요 술주정뱅이였던 청년 김익두를 변화시키셔서 훌륭한 부흥사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소망을 붙잡은 사람은 고난을 인내로 이겨냅니다.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주 안에서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심으로 날마다 영적 승리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줄을 붙잡아야 합니다.

사랑은 믿음, 소망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4절에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사랑으로 행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사랑으로 가족을 대하고, 교회에서도 사랑으로 믿음의 형제들을 대해야 합니다. 직장이나 이웃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에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인데, 그러면 나만 손해 보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줌으로써 더 풍성해 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요즘은 다들 수돗물을 마시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우물물을 길어다 마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우물이 있는 집은 동네에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과 우물물을 나누어 마시는 것이 싫어서 우물에 자물통을 채워두고 혼자만 마시면 어떻게 될까요? 오래지 않아 샘 근원이 막히고 고인물이 썩어서 악취를 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꾸 퍼주면 언제나 신선한 물을 길어 마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언제나 기쁨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많이 수고해도 피곤하지 않고 드리고 또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사랑했으므로 순전한 나드 향유를 옥합채 깨뜨려서 주님의 머리에 부어드렸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이를 보고 분을 내며 말하기를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이 봉사하면 왜 나만 일을 많이 하느냐고 불평하게 됩니다. 그런 봉사는 덕스럽지 못하므로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먼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일서 4장 10절에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디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사랑의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저절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도 사랑을 나타냅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1서 4:11)고 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형제 사랑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형제의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랑이 없으면 형제의 허물만 눈에 띱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고 말씀합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한다는 것이 오히려 형제를 괴롭히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이라고 부르는데, 사랑의 내용을 이같이 열거합니다.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저는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속에 사랑이 충만하고, 가정에도 사랑이 충만하고, 우리 교회에도 사랑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은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먼저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10)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고 말씀합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본문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이 세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믿음, 소망, 사랑의 삼 겹줄이 우리를 영원한 천국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아 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믿음, 소망, 사랑으로 행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며, 교회에 덕을 세우며, 이웃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 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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