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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마 10: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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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오늘은 9월 11일로서 지난 2001년 미국에서 World Trader Center가 폭파를 당하게 된 끔찍한 비행기 테러(terror)가 있었던 날입니다. 이 일은 피해를 당한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테러의 공포에 시달리게 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 일이 도화선이 되어 미국은 테러 조직을 숨겨주었다고 알려진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을 폭격하여 쑥대밭을 만들었고, 나아가서는  이 일이 간접 원인이 되어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는 전쟁을 일으킴으로 지금까지 전쟁상태로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복하는 모습에 대해서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보복심은 사실 두려움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실행에 옮긴 사람이 마틴 루터 킹(M. L. King Jr.) 목사입니다. 킹 목사는 흑인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백인들이 우리를 그렇게 못살게 구는 것은, 장차 우리가 그들에게 보복할 것이 두려워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보복할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주자”고 하면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갖는 두려움이란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키는 원인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올해는 이러한 모습은 아니지만, 카트리나(Katrina)라는 큰 태풍으로 말미암아 루이지애나 주의 뉴 올리언즈(New Orleans) 시가 완전히 물에 잠겨,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일 역시  우리들에게 자연에 대한 커다란 공포를 가져다주는 일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나 우리 주변에 이러한 참사에 관계된 모습이 있다면 이러한 두려움은 더욱 실감 있게 느껴질 것입니다. 9.11 테러 사건은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고 해서, 그래서 거기에 대한 보복 및 대책도 나름대로 강구할 수 있겠지만, 태풍으로 인한 이러한 엄청난 일에 대해서는 사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그래서 한편으로는 더욱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막대한 희생과 피해에 대해서 우리의 정성과 마음을 표해야 하겠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여기에 대한 특별헌금을 하고자 합니다. 어려운 살림이시지만 정성을 다하여 도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헌금을 통하여 그들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 사람들이 갖게 되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의 계속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두려워 말라”라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많은 핍박을 받을 터인데, 거기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요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워 말라”라는 가르침은 비단 여기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구약시대부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는 모든 종들에게 일을 맡기실 때마다 주시는 일관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 말씀은 약 400번 나온다고 합니다. 창 15:1에는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시고, 창 26:24에는 이삭에게 “두려워 말라”고 같은 말씀을 하시고, 그 외에도 모세나 여호수아,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등 모든 하나님의 종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두려워 말라”라는 말씀이 열 번 나옵니다. 이 중에서 네 번이 오늘 본문에 나오고,  세 번은 마 28장의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하여 나오고 있습니다.

1. “두려워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문자 그대로 무엇인가 무서워서 할 일을 제대로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일꾼에게는 두려움이란 것이 있으면 주어진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일꾼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두려움을 없애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대표적으로 예레미야의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는데, 공교롭게도 이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에는 거슬리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예레미야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향하여 ‘거짓 선지자’라 하여 돌로 치고, 온갖 핍박을 가하게 됩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예레미야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가 두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예레미야를 향해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여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두려움이란 사람들의 반응이 무서워서 뭔가 해야 할 일을 잘 하지 못하거나 끝까지 못하게 하는 요인인 것입니다.

이렇게 마귀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옳고 바른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반대하고 방해하여 그 하나님의 일꾼을 겁먹게 하여 스스로 그 일을 포기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에게도 적용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서 예수님은 “집 주인을 바알세불(마귀의 우두머리)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인 것입니다. 마귀들은 하나님을 잘 안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능력은 바로 마귀의 우두머리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거짓 선전을 하게 하였던 일을 압니다. 이렇게 예수에게까지도 마귀의 힘을 빌려 일을 한다고 하는데, 그 예수의 제자들에게 그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사명을 다 하고자 할 때에 주어지는 어려움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을 제시하는 예수님

첫째는 “진리는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바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26-27절,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이 예수님의 말씀에는 어떤 유래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핍박을 많이 받았던 민족입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부터 나라 잃고 여기저기 떠도는 유대인들에게 가는 곳곳마다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떠돌던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핍박이 주어질 상황이면, 당시 랍비들은 회중들에게 직접 큰소리로 말하지 않고 통역관에게 비밀스럽게 귓속말로 히브리말로 전하면, 후에 통역관들은 이를 다시 백성들이 알아듣는 아람 말로 백성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러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인용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사로이 전해주신 가르침들이 어떤 계기나 때가 되면 진실한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께 들은 바대로 전하는 것은 분명하게 이루어지고 드러나게 될 사실이라는 것을 무엇보다도 제자들로 하여금 확신하게 하심으로, 현재 어려움가운데에서 전하는 말씀에 자신감과 신뢰를 가지라는 격려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뜻은 꼭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가질 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여기서 “몸(body; soma)”이란 말을 쉽게 말해서 “영혼(soul, psyche)”을 담는 그릇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영혼”이란 그 사람의 본질적인 모습으로서 생명(life)의 근원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물론 이 둘은 모두 인간의 전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이라 함은 그릇에 불과한 육신을 죽이는 것으로 그 사람의 전부를 다 없애는 것이라고 믿는 세상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을 이와 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여기기에, 죽지 않으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사람의 몸은 파멸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나 삶 자체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영혼은 하나님만이 좌우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귀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을 두려워한다면, 자연히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잠 29:25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것만이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부심을 가질 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29-31절,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지닌다는 것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마귀는 무엇보다도 우리 크리스천의 주체성(identity)을 오해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에게도 마귀의 우두머리라고 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드러나는 모습으로 다른 사람이나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크리스천들마저도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이 세상에서 무조건 잘 되어야 하고, 복 받아야 하고, 형통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경우가 바로 그러한 경우일 수 있습니다. 이런 입장이라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려운 처지에 빠지거나 형통하지 못한 경우가 된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위험스러운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까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의 identity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요, 학자인 다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한번은 국무 장관으로 있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뉴욕의 어떤 호텔에서 저명한 사람 약 20명과 저녁을 함께 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서로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웹스터만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있더랍니다.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 “웹스터 씨, 일생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온 생각 가운데 제일 중요한 생각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다니엘 웹스터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지금 하는 모든 일을 이다음에 하늘나라에 가서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을 할 때 내 마음이 제일 엄숙해 집니다.”

우리들도 우리들의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평가가 하나님의 평가와는 아주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에 사데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계 3:1).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이렇게 사람이 보는 것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하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바클레이(William. Barclay) 목사는 이러한 가치관을 지니고 또 회복하기 위해서 세 가지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1) 참회 : 죄의식은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늘 참회의 마음과 기도를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말씀에의 순종 :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이를 늘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가 파괴되는 이유는 단 한가지인데, 이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래도 떳떳하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두려움을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예배 : 오늘날 인간의식의 쇠퇴는 과학의 발전이라기보다는 예배의 쇠퇴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위대하심을 체험할 때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부심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일꾼 된 자라면 반드시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행 4: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여기서 “기탄없이 말한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말하면 뻔뻔스럽다는 뜻(boldness)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자신의 체면이나 조건이 상관없다는 듯 그러한 체면이나 조건을 무시함으로 이를 극복하는 모습이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 얽매여 있는 한 두려움을 지닐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이러한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은 당연히 사람들의 평가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평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세에서 비롯된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스코틀랜드(Scotland)의 종교 개혁자인 존 녹스(John Knox)는 스코틀랜드의 교회개혁을 위해서 평생을 헌신하다가 개혁을 마치고 죽은 후에 사람들은 이 존 녹스의 비문에 이런 말을 썼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사람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않은 전도인이 여기 누워있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 사이의 긴장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두 관계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그러한 관계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거나, 반대로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그러한 관계라는 말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중립적인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도 두려워하고 사람도 두려워한다거나, 아니면 하나님도 사람도 다 두려워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모습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관계는 쌍방에 영향을 주는 상대적 긴장 관계라는 것을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관계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순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먼저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을 때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 사람과의 관계가 바르게 진행되지만, 사람을 먼저 두려워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파괴되어 결국 사람과의 관계도 망가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가 이 관계 설정을 바르게 하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만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마저도 복된 관계로 이어가게 되는 신실한 신앙인들이 다 되도록 하십시다. (노 강 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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