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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음 세대를 위한 오늘의 삶 (삿 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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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를 출판하여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스웨덴의 레나 마리아(Lena Maria)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968년 레나 마리아는 두 팔이 없고 한 쪽 다리마져 짧은 중증 장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병원에서는 이 아이를 보호소에 맡길 것을 권했지만 그녀의 부모는 이 아이를 정상적인 아이와 똑같이 길렀습니다. 그녀는 수영, 요리, 피아노 운전, 지휘 등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수영실력은 세계장애자 수영선수권대회에서 스웨덴 대표로 출전해서 4개의 금메달을 따낼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스톡홀롬의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현재는 프로 가스펠싱어로서 전 세계를 다니면서 콘서트를 하고 있으며 얼마 전 우리나라에도 왔었습니다.

레나 마리아의 책은 9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레나 마리아가 이토록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오늘의 행복한 삶이 있기까지 어떻게 교육을 받았을까요?

레나마리아의 자서전에 의하면 그녀의 부모에 의해서 3가지의 훈련과 삶의 자세를 배웠다고  합니다

첫째, 긍정적으로 삶을 대하는 사고방식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어려운 측면보다는 가능성의 측면을 생각하는 훈련이었습니다. 그녀는 부모의 삶을 통해서 어떤 상황을 비판적이고 비관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고 가능성과 유익한 면을 먼저 보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둘째, 사랑과 격려를 항상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부모는 동정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혼자 해결하도록 하고, 꼭 도움이 필요한 일 외에는 도움을 주지 않도록 주위사람에게도 부탁했다고 합니다. 스스로 자기 자리에 설 수 있도록 배려와 격려를 받았고 무엇이 사랑인지를 알게 되면서 용기를 갖고 인생을 자신 있게 살게 되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삶이란 스스로 만든 것도,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늘 생각하도록 배웠습니다. 고난 속에 하나님의 깊고 아름다운 뜻이 있음을 굳게 믿는 믿음이 레나 마리아의 어두운 미래를 밝게 만들어 나갔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둡고 혼란한 사사시대의 도래를 예견해주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광야생활을 하게 되고 가나안정복이라는 사명을 어느 정도 완성하고 다음세대로 넘어가는 시기입니다. 6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반면에 10절 이후에는 그 세대들이 죽고 난 후 그 다음 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하기 시작하므로  절망적인 역사로 이어질 것을 암시하는 내용들과 사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두 절 사이에 성경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은 가나안 정복 후 그 세대들이 다음세대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임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즉 지금 이 세대가 다음 세대에 분명히 가르쳐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그 다음 세대는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레나 마리아가 어두운 미래를 살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부모로부터 받은 바른 교훈, 교육들이 그녀의 삶을 더 밝게 만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자녀들에게  밝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지혜와 교훈을 주지 못하면 그들은 혼란과 어두운 미래를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내 삶이 나의 자녀의 미래를 결정하고, 내 신앙생활이 미래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조건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원리와 원칙이 무엇인가를,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사사기를 통해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첫째, 잃어버린 비전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노예생활을 하면서 고생했으니 가나안 땅에 가서 그 땅 족속들을 다 몰아내고  편안하게 잘 먹고 살길을 원하셨을까요? 주님께서 그것 때문에 그들을 가나안 땅에 보냈을까요? 그렇다면 굳이 가나안 땅을 택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을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에 보내신 이유는 하나님백성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광야생활을 하게 한 것과 가나안에서 그 거민을 몰아내며 땅을 기업으로 받는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땅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땅임을 선포하고, 이러한 삶을 통해서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가나안땅에 인도하신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이 가나안땅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자녀답게 살 때 세상은 정죄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이 비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나안 정복이라는 안심할 수 있는 현실적인 만족을 얻게 되었습니다. 끝까지 싸우면서 쫒아내기에는 자신들에게도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유목생활에서 가나안의 농경문화로 들어가면서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깨닫고 터득하는 것보다는 가나안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정착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연스럽게 가나안의 문화가 이스라엘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인간이 만든 문화는 일시적으로 인간을 편하고 즐겁게 합니다. 그러면서 차차 하나님이 주신 참된 축복의 삶에서 점점 멀어지게 하기도 합니다. 결국은 죄의 삯인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가나안의 왕들은 포주였고, 우상숭배 제사장이었다고 합니다. 이 땅의 문화란 인간이 적응하지 않으면 불편하고 고통스럽도록 만들어져있습니다. 정복사업의 피곤함, 비전의 부담감, 동시에 새로운 문화에 적응과정에서 서서히 편안하게 안주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밀려왔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저들을 가나안땅에 보내신 목적에 대한 관심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생활과 모든 관계 속에서 비전을 상실하며 현실안주에 빠지게 되었고 이미 현실만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한 눈과 귀가 닫혀져 가게 되었습니다. 적응은 잘 하게 되었지만 사명과 비전을 현실과 타협하거나 혹은 상실한 채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복하라고 말씀하신 가나안 족속에게 동화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목표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은 서서히 삶의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습니다. 더 이상 그것은 우선순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일평생의 라이프싸이클 중에 신앙의 감격과 기쁨을 잃어버리기 쉬운 시기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구원의 감격과 사명의 열정을 현실에 적응하기위해서 세상과 쉽게 타협하며 마음의 갈등이 가장 심한 시기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바로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갈 때입니다. 그리고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생활을 하는 그때부터 사회에 조금 적응이 되는 20대 중반부터 30대 후반까지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제가가장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연령대가 청년부에서 직장이나 결혼을 통해서 삶의 현장이 변하는 그 시기에 처한 사람들입니다.

청년 때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명자로 살겠다는 열정에 불이 탑니다. 단기선교를 가거나 선교단체의 간사로도 지원하면서 돈 한푼 없이도 사역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갖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기쁨입니다. 사람들이 새롭게 인생을 결단하며 축복의 통로로서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비전입니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 자신이 꿈꾸었던 것과 세상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그 조직사회에 적응하기위해서 치루어야 할 일들과 갈등이 너무 많습니다. 신앙생활, 비전, 사명을 돌아볼 틈이 없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업을 통해서 세상을 봅니다. 사람을 만나면서 이 사회의 권력과 돈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경험합니다. 신앙과 사업, 직장생활과 교회생활 너무나 고통스러운 갈등이 됩니다.

어떤 분들은 직장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들어가서 얼마 있다가 사업도 그만두고, 직장도 포기합니다. 그러면서 신앙의 회의가 찾아옵니다. 반대로 자신이 시작한 사업과 직장생활을 하면서 사회생활에 대한 매력을 느낍니다. 이 사업을 위해서 이미 시작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배웁니다. 그들의 방법이 좋아 보이고 성공의 지름길처럼 보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배우다 보면 왜 사업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 다음부터는 돈이 자연스러운 목표와 비전으로 자리 잡고 더 나아가면 자기즐거움과 만족에 이르게 됩니다.

믿음과 사명 그리고 비전에 따라 살겠다고 결단했지만 형제와 자매의 육체적 욕망 앞에서 한 장의 휴지조각과 같은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결혼을 합니다. 첫째 아이를 낳고나서 타협, 둘째 아이를 낳고나서는 변질, 그리고 아이를 하나 더 나으면 절망하게 된다고 합니다. 결혼 전 생각 했던 환상적인 결혼생활이 아닙니다. 비전을 성취하기위한 수단으로 결혼과 직장생활이라는 의식이 깨어져 버립니다. 단지 현실가운데 생존과 적응이라는 것에 매이게 됩니다. 사명을 생각하기에는 현실의 여유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비전과 사명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는것 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다가 40이 넘어 중년이 되면서 갈등을 겪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에게 죄악이 많은 가나안을 주셨고, 그 가나안 거민을 쫒아내고 그곳에 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해야 할 일입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드러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악을 정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항상 긴장이 따르며 영적전쟁을 치루어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자체가 긴장과 모순 그리고 도전과 영적갈등이 있는 곳임을 잊어버리고 적응과 안주를 하므로 스스로 긴장을 풀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혼전순결이 어렵습니다. 십일조 생활 쉽지 않습니다. 술 먹지 않고 믿음생활하며 바르게 사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육신과 현실이 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스스로 피하고 포기합니다. 적응이라고 말하는데 결국은 비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비전을 잃어버린 삶의 끝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다음세대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지금 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고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희망과 미래가 없는 하루살이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잃어버린 하나님의 비전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붙들어야 됩니다. 잃어버린 비전, 여러분 가슴속에 처음 은혜 받았을 때 하나님께 드렸던 그 헌신의 믿음을 다시 세워서 자신을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비전을 찾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주신 삶의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이때에 다음 세대들이 살아납니다. 희망의 길이 열립니다.

둘째, 우리가 다음세대를 위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그들에게 직접 가르쳐야 합니다.

본문에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하였더라’라고  말씀합니다. 다음 세대가 하나님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신앙체험을 하지 못한 것 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무관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환경이 안정되고 모든 것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모든 것이 저절로 된 것처럼, 그리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출애굽의 은혜와 가나안 정복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주신 축복이었고, 이 백성을 사랑한 자비와 긍휼의 결과였음을 알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 부모들이 자기들의 신앙의 체험을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이 이 자녀들에게 자신들이 체험한 하나님을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가르치라고 하나님은 명령하고 계십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성경에 어떻게 표현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역시 가르쳐야 됨을 뜻합니다. 신앙교육을 학교나 교회에 맡겨 두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본 세상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그 사역을 하셔야 됩니다.

모세오경에 신명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다시 반복하여 가르친다’ 혹은 ‘말한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출애굽하여 광야의 40년이 지나고 이제 새로운 땅 가나안에 입성하기 위해서 꿈에 부풀어있는 저들에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과거의 역사를 가르치라고 말씀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저들에게 생활 속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가르치고 그들의 신앙고백이 자신들의 삶에 기초가 되도록 만들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역사를 말하지만 그 내용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영적인 원리를 정리한 것입니다.

신명기 6장 1-2절에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회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4-6절까지는 ‘쉐마’라고 해서 ‘들으라’ 는 의미의 교육내용과 방법을 말씀합니다. 언제나 어디든지 생활과 삶 가운데 그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가르쳐야할 분명한 신앙교육을 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돈이면 해결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부모들도 돈을 잘 벌기위해 공부를 시킵니다. 자기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합니다. 자기의 정욕을 위해서라면 자라나는 어린아이를 성매매하기도 합니다. 내가 부요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합니다. 돈과 자존심의 논리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너무나 쉽게 생각합니다. 자의적으로 해석합니다. 전에는 신비주의적 직통계시가 유행했는데 요즘은 실용주의적 직통계시가 유행합니다. 우리 생활 속에 신앙의 모습은 사라지고 돈이 어느새 주인임을 보게 됩니다.

한국갤럽이 20년간 한국인의 종교의식에 대해서 조사했는데, 특히 개신교들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건강 29.1%, 돈, 경제력 18.3% 순으로 중요하다고 대답했고 믿음과 신뢰는 11.4%, 신앙은 4.5%라고 대답했습니다. 두 가지를 동시에 택해보라고 했더니 건강이 50.1%, 가정생활 31.4%, 돈 많은것 29.8%, 마음평안 22.4% 순이었고 종교는 16.0 %였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 저와 여러분의 대답입니다. 하나님 찾는것 같지만 사실은 돈 ,건강, 편안하게 사는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가치관이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어머니들이 힘들어도 새벽기도를 통해서 어려워도 꼬깃꼬깃한 돈을 다리미에 다려서 주던 신앙의 우선순위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지난주일 한 성도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 분이 하나님께 건축 헌금을 약속했던 모양입니다. 그 편지에는 35년 전에 약속했던 헌금을 드린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하나님 앞에 감동과 은혜로 건축헌금을 작정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박봉의 생활을 하면서 자녀를 기르는 바쁜 와중에 그렇게 하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재 노년에 생활비가 얼만 안 되지만 그 생활비를 아껴 계를 들어 약속했던 헌금과 이자를 합쳐 천만원을 건축헌금 하셨습니다. 돈이 얼마인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해서 세웠던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가치관을 다시 찾은 것입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자녀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와,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우리 엄마 아빠가 돈만 바라보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정말 인생을 맡기고 사는 분들이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어떻습니까? 환경이 바뀌면 하나님과의 약속을 생각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해가 많으신 분이야. 내 상황을 이해하실 거야.’라고 생각하며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 약속을 가장 중요시 여기고 상황과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켜 나가는 그 가치관을 세워 나가지 않으면 신앙의 질서와 모습이 없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속에서 그런 부분들이 없습니까? ‘  우리 엄마 아빠를 보니 하나님과 약속을 해도 환경의 변화에 따라 마음대로 바꾸어도 되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보고 자란 자녀들이 신앙의 결단과 헌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자기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과 교회에 두고 믿음으로 살겠습니까? 주의 계명을 따라 부모를 공경하겠습니까? 그렇게 안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부모의 삶을 통해서 그 자녀들이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교육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가치관, 그것을 우리가 먼저 세우지 않으면 이 땅에는 물질의 흐름 앞에 교회도 휩쓸려 버립니다. 다음 세대도 물질이 주인이 된다는 사실을 다 아실 것입니다. 신앙의 가치관, 기도의 소중함, 하나님과의 언약의 소중함, 주님의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그 가치관들을 우리 생활 속에서 경험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나의 삶의 신앙의 간증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 삶을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셋째, 다음세대들에게  희생을 보여주고 그 희생으로 저들이 참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을 체험토록 합니다.

사랑의 비전에 따르는 대가를 어떻게 기쁨으로 치러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야 합니다. 희생이 없이는 비전이 성취될 수 없습니다. 희생위에 오늘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져 갑니다. 요즘 세상은 희생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회 각 계 각층을 보면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는지 모릅니다. 남에게 양보하지도 않고 희생하지도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형제 몇 사람이 그가 다니던 교회를 옮긴다고 해서 그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우리 교회는 희망이 없어요. 미래도 없어요. 우리 자녀들에게 보여 줄 것도 없고 나에게도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키기에는 치르는 대가가 너무 많아요.”라고 합니다. “목사님 사업할 때 굉장히 힘들면 차를 몰고 가다가 중앙선을 넘고 싶어요. 높은 곳을 보면 올라가서 뛰어 내리고 싶어요. 물을 보면 그 속에 들어가고 싶어요.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죽지 않고  살아야 됩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지친 마음을 안고 교회에 와보면 ‘네가 옳다. 내가 옳다. 네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이것이 맞다. 저것이 틀렸다.’란 소리로만 가득 합니다. 영혼과 생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능력을 전혀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죽은 교회예요. 저는 그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살기 위해서요.”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죽어야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결단하고 살아야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도와주고 격려해 주는 그런 예배와 그런 환경이 되어 있지 못한다면 어찌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주의 전에 모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서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서로 체험하고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합니다.

인기 작가인 최인호씨가 카톨릭의 신앙에 귀의하면서 그가 하나님 사랑을 깨닫고 쓴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 제목이 ‘사랑의 기쁨’입니다. 이 소설의 시작은 죽은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러 가는 딸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결혼하고 3년 만에 아버지가 외도를 해서 부모님이 이혼을 하게 됩니다. 어릴 적에 아이를 기르던 엄마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자 아빠를 너무 좋아하던 이 딸의 양육권을 아빠에게 맡깁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고 3 되었을 때 아빠가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맵니다. 이 딸이 엄마에게 가서  아빠를 용서하라고 했지만 결국 엄마는 남편에 대해서 외면합니다. 그 딸이 죽은 아빠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엄마에 대한 분노로 거식증, 자폐증, 우울증이 오면서 아이 인생이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엄마가 그 아이를 돌아봅니다. 정성껏 살펴줍니다. 따뜻하게 대해 줍니다. 그럴 수록 이 아이는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분노와 두려움과 병이 계속해서 진동합니다. 조금 회복되었을 때는 아빠 닮은 유부남과 사귀면서 엄마를 고의적으로 괴롭히고 엄마가 반대하는 남자만 찾아다니면서 결혼하고 이혼하고 엄마의 삶을 철저히 파괴하는 일들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엄마가 고통스러워서 병이 들어서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엄마가 살았던 집의 유품을 정리하러 가는 것이 이 소설의 첫 장면입니다. 가서 보니까 엄마 방에 오래된 수동 타자기에 편지가 하나 걸려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인데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가 있었습니다. 엄마가 사랑했던 그 남자가 교환교수로 미국에 있다는 것을 알고 미국까지 찾아갑니다. ‘엄마랑 그토록 아름다운 사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나요?’ 하고 묻자 그 교수님은 대답 대신에 엄마에게 받은 편지를 한 장 내어 놓습니다.  이 엄마가 영문학을 전공해서 번역을 해서 생활을 했는데 30대 중반에 번역을 하다가 40대 초반의 영문학자 노총각을 만났습니다. 두 사람이 너무 뜨겁게 사랑했고 이 교수는 교환교수로 가기 전에 청혼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엄마는 교수에게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합니다. 그러나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나는 살아야만 합니다. 당신에게 갈 수 없습니다.’

딸은 엄마가 그 편지를 쓴 시점이 자신이 거식증에 걸리고 자폐증, 우울증이 걸려서 인생이 망가질 때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남자를 너무 사랑하는 것이 그 글속에 배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남자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난 엄마를 보복하기 위해서 엄마를 병들어 죽게 만들었는데 엄마는 나를 위해서 자기 행복을 포기하고 나를 끝까지 돌아봤구나.’라고 이 딸은 통곡합니다. 걷잡을 수 없는 격정이 그의 마음을 뒤집습니다. 그러나 한 줄기 빛이 그 속에 들어옵니다. ‘그렇지. 나는 그런 소중한 사랑을 받은 존재야. 나를 이토록 사랑한 사람이 이 땅에 있었어. 나를 사랑한 사람이 있었어.’라고 말입니다. 결국 그녀는 그 사랑 때문에 그 모든 어려움과 우울증을 극복할 힘을  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나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세상에 사랑할 사람이 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했던 그 사람이 있었다는 것, 그게 하나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영적으로 자폐증, 거식증, 우울증에 걸린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나를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주셨던 그 사랑, 그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믿음가지고 살아가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 사랑을 왜 우리가 나눌 수 없을까요? 인생이 그렇게 고독하고 외로운 것은 아니라고, 혼자 살아가는 것만은 아니라고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그 사랑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독과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야 되는 것인가요? 

서로 격려하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용기를 내라고, 당신이 살아야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 사랑으로 묶어 주고 다듬어 주고 안아주고 품어 줄 수 있는 그 교회 공동체가 있다면 이런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겠습니까? 절망과 좌절로 한숨의 세월을 보내겠습니까? 아닙니다. 자기 삶을 돌아보며 내가 살아야 될 이유를 다시 찾고 다시금 용기를 내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갈 힘을 여기서 얻게 될 것입니다. 그 힘이 미래를 뚫고 이겨나갈 수 있는 용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죽을 생각을 했다가도 교회만 나오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위로하심을 느끼고 만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바로 옆의 사람을 통해서, 속한 구역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 사랑을 느낄 때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느낄 것입니다.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싶고 그런 교회를 섬기고 싶습니다.

미래를 염려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가진 것을 다 내려놓으시고 다시금 비전을 붙잡으십시오.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붙들었던 그 주님의 사랑,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그 사랑 앞에 ‘주님 내가 등대되어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빛과 소금처럼 살겠습니다.’ 결심했던 그 결심, 생활 속에서 어느새 잃어버린 사명을 다시 붙들고 믿음 안에서 다시 걸어 나가십시다.

물질 앞에 너무나 쉽게 휩쓸려 버린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영적인 가치관들, 영적인 소중한 유산들, 그것을 우리는 다시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사는 삶을 통해서 다가오신 그 주님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증거 할 수 있는 믿음의 아름다운 사건들과 삶들을 만들어 가십시다. 더 나아가서 내게 주신 그 사랑을 오늘 내 가족과 이웃들과 나누어 줄 수 있는 그 삶이 된다면 우리 인생은 그렇게 힘들지만은 아닐 것입니다.  천국의 소망이 오늘 우리 가운데 넘치며 우리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볼 것입니다.  (김  형 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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