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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조도(照度)를 올려라 (롬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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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오늘 이 시간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과 헌신예배를 드리며 충성을 다짐하는 기관장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과 은혜가 가득하게 넘쳐나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라는 말씀은 ‘아무에게 대해서 바른 의견을 가지고 명예롭게 한다.’는 의미로서 쓰인 말입니다.

‘아, 우리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구나, 그분은 정말 하나님이 되시구나, 그분만이 진정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야!’라고 하는 이런 의견을 만민에게 제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께 바른 의견, 바른 영광을 돌려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라는 말씀은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돌려드린다’는 것입니다(to glorify Him as God).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욥1:21). 관과 역경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신앙! 욥과 같은 신앙이 바로 우리 기관장들과 성도 여러분들의 신앙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홍해를 건너고, 새 출발하는 출애굽 운동으로 민족을 구원시키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이 국가의 위기에서, 환난에서, 죄에서, 좌절에서 반드시 욥과 같이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소망의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위기와 관과 고통과 역경과 실패 속에서 오히려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시고, 높여 드리시기 바랍니다.

때때로 우리의 답답한 환경이나 어려운 역경이나 위기나 나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절망적인 고난에서 나의 심령과 마음이 어두워지고 믿음이 흔들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감사한 마음과 긍정적인 마음보다는 사탄처럼 나 자신이 영광을 차지하려는 허망한 마음과 눈앞에 현혹된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며 살고 있기 때문 아닙니까? 이 시간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사상을 바꾸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헌신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미스바교회 기관장 여러분들과 성도 여러분들께서 참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헌신자로 살기 위해서 회복해야 할 참된 신앙은 무엇입니까?

1. 감사한 마음의 조도를 올려야 합니다.

옛날 우리나라 변소를 뒷간이라고 했습니다. 측간이란 말을 중국식 표현이고 화장실은 일본식 표현이라고 합니다. 순수한 우리나라 말로는 뒷간이랍니다. 뒷간, 시골에 가면 흙 담으로 쌓아서 벽을 만들고 짚으로 지붕을 덮고 문도 없이 바람이 나부껴서 속 이 훤히 들어다 보이는 변소가 있었습니다. 밑으로 큰 항아리를 묻어놓고, 그 위에 판자 두 개를 걸쳐 놓고 그리고 앉아서 일을 보는 그 옛날 뒷간을 아십니까?

처음 들어갈 때는 얼마나 냄새가 납니까? 코를 막고 들어가야 할 정도이지요. 그런데 막상 들어가서 앉아 있으면 있을 만합니다. 그러다가 익숙해지면 신문지를 들고 들어가서 편안히 앉아 신문까지 읽기도 합니다. 그 속에 온갖 더러운 것이 다 있는 데도요. 함석헌 선생은 이것이 죄의 근성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두렵고 무섭기까지 하지만 익숙해지면 죄의 냄새 가 안 난다는 겁니다. 도리어 죄를 즐길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속에 묻혀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란 것을 모릅니다.

에덴동산에 사람이 처음 만들어져 살 때에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으니 얼굴에 광채가 났던 것 같습니다. 시내산을 내려 올 때 모세의 얼굴에서 낫던 광채가 났듯이 말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의 형상을 다시 회복한 것이 그의 얼굴의 광채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타락하지만 않았고 하면 우 리에게도 얼굴의 광채가 있었을 것인데요. 화장을 안 해도 미남 미인이 되고 아마도 얼굴의 주름도 없을 것입니다. 그 모습을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보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들이 타락하고 쫓겨날 때 인간이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 의 영광의 광채를 잃어버렸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기쁨과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저절로 터질듯이 익어 단맛을 내는 탐스런 감사의 열매를 잃어버렸습니다.

가지고 나온 것은 오직 한 가지 양심의 가책만 가지고 나왔습니다. 아담이 사람들이 우리를 죽이면 어떻게 합니까? 한 것을 보면 양심의 두려움만 극대화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 속에 오래 살아온 사람들 은 이제는 양심의 가책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빈 마음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우든지 아니면 사단의 것을 채우든지 채워져 있습니다. 본래는 하나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평화가 있었고, 진정한 행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잃어버린 마음에는 더러운 것들이 채워졌습니다.

그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불의, 추악함, 탐욕, 악독 입니다. 이런 것이 가득하게 된 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불의란 공정한 태도의 결핍을 말합니다.

추악함은 살인한다는 단어에서 나온 무뢰한과 같은 악행을 말합니다.

탐욕은 타인의 권리에는 도무지 무관하고 자기 욕망만 채우려는 것을 말합니다.

악의란 가능한 악하게만 해석하는 성격을 말합니다. 죄가 결국 이런 감사를 잃어버림으로 가득하게 되었다고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29절). 가득이란 충만하다는 말입 니다. 이런 죄로 가득차서 철철 넘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행복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감사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흔히 물질, 명예, 지위, 권세 등을 소유하는 것이 행복의 조건인 줄 알고 그런 것들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행복을 위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그보다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조건이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신학, 의학, 음악 박사)로 유명한 알버트 슈바이쩌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환경이든지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늘 행복할 수 있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요함에도 처해 보았고, 아프리카 정글의 열악한 환경에도 처해 보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인간의 행복이 환경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에 대한 인간의 마음에 달려 있음을 터득한 것입니다. 바로 감사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경의 많은 말씀들 중에서도 행복의 열쇠 구절(key verse for happiness)에 해당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살전 5:18절 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런데 문제는 이 구절의 문자 그대로 과연 범사에(=어떤 경우에라도, 항상) 감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 입니다. 고통이 찾아오고, 극한 시련이 닥쳐와도 그럴 수 있느냐? 이겁니다. 형통하고 편안할 때에야 가능하겠지만, 어렵고 힘들 때도 동일하게 감사할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1) 기도할 수 있으므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망할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답답한 상황에 처해도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사방팔방 다 막혀 있어도 하늘은 열려 있듯이, 아무리 극한 시련이 나를 가로막아도 최소한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본문 같은 상황이 생긴다고 가정할 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면 그럴 때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저 울고불고 하는 것뿐입니다. 발을 동동 구르는 것 외에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 효과도 없는 한탄만이 가능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액션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우주 만물을 다스리실 뿐 아니라 인생의 생사화복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확실한 행동(action)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어려운 일에 처할 때 막막할 때 그때조차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러면 하나님의 뜻 가운데 놀라운 기적의 역사도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약 5:16~18절 "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기도할 수 있다면 감사의 조도를 높이기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① 고난이 찾아와도 넉넉히 이기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을 보면 고난을 통해서 거룩한 인격과 위대한 인생으로 만들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지는 119:67절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고백 했습니다.

롬 5:3~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사 48:10 고난의 풀무

하나님은 연단을 통해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 참나무를 기르려고 100년을 잡았지만 호박을 위해서는 6개월 잡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인생을 호박으로 만들지 않고, 참나무로 만들려는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힘들지만 그대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욥이 만난 고난 중에 한 가지라도 보통 사람들이 만났다면 좌절하여 낙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열 자녀가 죽었을 때, 전 재산을 잃은 잿더미 속에서 믿음으로 일어났습니다.

욥은 무엇이라고 자기 신앙을 고백합니까?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0-22)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건강을 모두 잃어 버렸을 때 아내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럴 수는 없다. 설사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를 저주하고 죽어 버리라고 울부짖습니다. 그 때 욥은 또 어떻게 말합니까?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 하니라."(욥2:10)

견딜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 욥은 여섯 가지 태도를 취했습니다.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인생이 무엇인가를 바로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찬송을 돌렸습니다. 이 모든 일에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원망하고 죽으라는 아내를 어리석다고 말했습니다. 입술로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에게 자랑거리였습니다. 사단에게 마저 자랑하고 싶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1:8)

욥을 유의하여 보았습니까? 말년에 갑절의 복을 받았고, 인내를 통해 그의 믿음이 오히려 인정받았습니다. 고난이 찾아와도 넉넉히 이기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선하신 인도하심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저와 여러분들을 자신의 거룩한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 외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죄를 구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도록 이 땅에 보내시고, 죄 값을 대신 지불하기위해 십자가형을 받도록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귀한 사랑과 세상 끝날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 구원받은 성도를 지금부터 영원까지 인생을 주관하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천국가기까지 부모는 자식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어도 우리 인생길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인도해 주시며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미스바교회 성도여러분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과 구원에 이탈되지 않도록 강권하여 붙들고 계시는 은혜와 섭리 안에 구속 받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근시안적 안목으로는 고통이요. 아픔인 것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는 복선을 깔아놓는 것일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 맨 처음에 의미 없이 등장인물이 나오지만 나중에 절묘하게 꼭 필요하기에 등장시킨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이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필요하셔서 이 땅에 보내시고, 선택해 주셨으며, 자신의 위대한 구원 계획에 아름다운 작품처럼 세밀하게 맞추어 주역으로 쓰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치 수용소 체험기로 유명한 코리텐 붐은 감방에 벼룩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수용소에 있을 때 열악한 환경에 벼룩까지 득실거려 불평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간수가 중얼거리며 지나감. "벼룩 때문에 이 감방은 들여다보기도 싫다." 이렇게 해서 오히려 감시를 덜 받고, 성경을 열심히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예배하고 기도하면서 신앙으로 수용소 감옥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답니다.

우리 인생은 성숙한 인격과 믿음으로 만들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부족한 모습을 보고 아직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 실망하거나 원망할 때가 아닙니다. 합력하여 유익이 되도록 결국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선한 도구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인생을 결국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드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범사에 감사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너무나 치열한 경쟁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과 비교하면 늘 부족함과 무능한 모습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말해 보십시오, "그래도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 때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진짜 믿음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만은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해야 하고, 감사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입장에서도 다른 것은 다 빼앗겨도 믿음과 감사의 마음만큼은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문에 김춘근 교수의 신앙 간증이 연재되었습니다. 거기도 보면 암으로 고생하면서 산속에 올라가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기도였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자기 죄를 보여주시는데, 죄란 죄는 자기 속에 다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후 그의 기도의 내용이 바뀌었답니다.

이제는 암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잃어버리고,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와 함께 암이 나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산에서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 후에 죄를 자세히 적어서 회개했는데 무려 52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만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고 고백했습니다. 모든 죄가 자기 속에 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 땅에 죄인들 중에 내 가 가장 악한 죄인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발견한 모든 사람들은 자기 속에 모든 죄가 다 들어있다는 사실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 죄의 무서움을 체험한 후에 용서를 체험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일생동안 감사하며 살게 되었답니다.

뒷간 이야기를 했는데, 수세식 변소를 맛본 사람들은 뒷간에 갈수가 없습니다. 그전에는 몰랐는데, 이제 가보면 그 속에 더러 운 것이란 더러운 것은 다 있습니다. 죄도 마찬가집니다. 죄의 용서를 받고 죄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자기에게 얼마나 악한 것들이 가득 차 있었고, 그 죄가 얼마나 무서웠던가를 체험해 보아서 압니다. 그래서 다시 죄 속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기 속에 죄가 얼마나 가득한지, 죄의 결과 죄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생각해 보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이요, 자신을 어리석게 책임을 져야 할 심판이을 받을 때가 있는데 방치해 두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일입니까?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1:22절은 말씀 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자기들은 지혜롭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Professing the self to be wise, they became fools." 바울은 그런 죄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선고를 합니다.

욥은 전 재산이 날아가도, 열 자녀가 하루아침에 송장이 되어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어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과 환경을 초월해서 우리의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그토록 엄청난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욥의 신앙은 이상한 믿음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신앙입니다. 그게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정상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진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찬양하고 감사하며, 경배할 수 있는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큰 믿음입니까? 그 신앙도 욥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우리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셔도 가져 가셔도 우리가 하나님께 돌릴 것은 찬양과 영광밖에 없습니다.

영국의 세계적 문호 '섹스피어'란 사람은 말하기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은 독사의 입에 물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에 잊지 못할 가슴 아픈 일들을 당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가장 가슴 아픈 일은 감사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유명한 철학자 '키에케르고'은 말하기를 '행복은 감사 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서로 감사하는 부부간에 사랑이 싹트고 행복이 넘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자녀들은 부모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듭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인생의 참 행복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가장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 가운데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의 마지막 남은 자산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영원히 소망하는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 분에 대한 신앙마저 상실해 버린다면 우리에게 남는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성도에게 고난의 시련 가운데 감사하는 믿음마저 없다면 과연 무엇이 재산이 되겠습니까?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이 후일에 회복시켜도 시켜주실 것 아니겠습니까? 다 잃어버렸는데 하나님을 의지하며, 감사하는 믿음마저 없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근거로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재물 때문에, 자녀 때문에, 건강 때문에 늘 괴로워하십니까? 영혼과 육체, 무엇하나 성한 곳 없이 처절하게 상하셨던 주님의 고난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큰 어려움 가운데 있어도 오직 주님만 바라본다면 나에게 닥쳐온 모든 어려움들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니까 참고 넘어가셨지. 우리는 사람이잖아!"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혹시라도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그럴까봐 욥이 고난을 이긴 사례로 제시하셨습니다. 믿음의 영웅으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욥만큼 많은 재산을 잃으셨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욥만큼 자녀를 많이 잃어 보셨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욥만큼 질병 때문에 큰 고통을 겪어 보셨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십시오.

오늘 여러분 환경이 어렵다고 말하지 말고, 그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나의 믿음이 없다고 솔직하게 하나님께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하나님께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은 고난 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성장합니다. 신앙은 고난 속에 더 아름답게 빛납니다. 처절한 고통 속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감사하며 찬양할 때 하나님이 더욱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고난 속에서 욥을 더욱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관장 되신 여러분! 고난 속에서 감사하는 신앙의 모범을 모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께서 먼저 예수님을 더욱 깊이 생각해 보시고 교회에 덕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욥의 인내를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욥의 찬양과 감사를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찬양하며,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할 때 어찌하여 너희의 믿음이 이것밖에 되지 못하느냐? 슬퍼하십니다. 우리가 그래도 찬양하고 영광 돌릴 때 하나님은 네가 그래도 찬양하느냐? 그래도 영광을 돌리느냐? 그래도 감사하느냐? 하시면서 감격해 하시고,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인정해 주시고, 고난과 연단의 기간을 단축시켜 주실 것입니다.

행복은 감사에서 나옵니다. 감사가 곧 행복의 기초가 됩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환경과 조건이 맞아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가 시험을 잘 쳐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범사에 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면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 항상 기뻐하게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면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 진정한 기도, 진정한 감사는 조건을 초월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관장 여러분들과 성도 여러분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면, 기도할 수 있다면,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조도를 올릴 수 있다면 충분히 행복의 조건이 됨을 믿으시고 나의 환경과 조건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몸 된 미스바교회에 귀한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신앙의 본을 보이고, 헌신하는데 앞장서시기 바랍니다.

2. 긍정적인 믿음의 조도를 올려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긍정적으로 세상에 살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 기관장이라는 신앙 지도자의 위치에 있어도 초 신자들처럼 낙심하고,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 교회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다. 헬라파 유대인,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서로 세상말로 머리 터지게 싸웠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에 관심이 없었고, 선교의 열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박해를 통해서 땅 끝까지 선교하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집사 스데반을 돌로 쳐 순교를 당함을 허락하시고, 예루살렘교회가 박해를 당하자 이 때 비로소 흩어져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체험을 하고,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구원 받는 무리가 하루에 삼천 명이나 더하였지만 땅 끝까지 선교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은 기독교 박해라는 도구를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선교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그냥 박해의 고통만 보일 뿐이지만 긍정적인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성취하는 방법이 진행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상에는 완전함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완전해야 한다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완전하게 이루어지기 전까지 결코 이 지상 교회는 완전해 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지체이면서 완전한 성화, 거룩한 변화가 필요한 용서받은 죄인들의 모임이기에 조금 부족한 것, 허물 서로 잘 감싸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은 대충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법을 어겨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주어진 자리에서 교회를 통해 맡겨주신 직분에 대하여,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선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범사에 최선을 다해며, 충성해야 합니다. 세상 직업에도 주님에게 하듯이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장,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못하기에 대인관계에서 상대방의 연약함, 부족함을 용납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바로 여기에 참 평안과 안식이 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 2: 15-16절)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곧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유익하게 하는 사람은 사람을 유익하게 합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18). 진실한 행동을 통해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런데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더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 오니이까?" 그때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내가 예수 믿고 행동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 예수 믿고 무슨 변화가 있는가 어떤 사람은 수십 년 믿어도 전혀 행동이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살아있는 고기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살아있는 믿음은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한 장애자가 교회에 나와서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건강한 몸으로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데 자기는 장애자라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몸이 불편해서 봉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도 주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때 성령의 감동이 왔습니다.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건강한 얼굴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해라."

그 때부터 그는 휠체어에 앉아서 교회에 오는 사람들을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맞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는 고난당한 자 에게 말하기를??“산에서 길을 잃은 자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만 산다.”고 했습니다. 즉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마을을 볼 수 있고, 길을 볼 수 있고, 강줄기와 위치 그리고 길을 쁹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 혹자는 말하기를 - 이른 봄에 바람이 강하게 부는 이유는 한겨울에 잠자던 나무들을 흔들어 깨우므로 잎을 트게 하며 흔들리므로 물과 영양을 가지 끝까지 공급하여 봄에 잎이 나게 하고 꽃이 피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 하나님께서 그 아들 된 자를 십자가에 내어줌은 무의미함이 아니라 그 고난을 인류의 구원역사를 이루심같이 성도의 고난도 장차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18절)에서 말하기를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긍정적인 신앙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셔서 충성하고, 헌신하고, 예수 열심히 믿고, 새벽 기도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더욱 귀히 사용하시려고 훈련하시고 계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니엘은 청년 때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모세는 40년간 광야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요셉은 어릴 때 형들의 질투와 미움으로 미디안 상인들한테 팔렸고,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장군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들어갔고,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 주었지만 2년이나 더 감옥에 갇혀 억울한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하였고, 가족을 7년간 흉년에서 살리게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상술 가운데 78:22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러한 법칙은 대 자연의 우주 법칙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공기의 성분은 질소 78에 산소 22의 비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균형이 깨지면 인간은 결코 생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몸도 수분이 78%, 그리고 다른 물질이 22%로 구성돼 있습니다. 가장 친 환경적인 것이 될 때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돈벌이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흔히들 돈을 빌려 쓰고 싶은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꾸어주고 싶은 사람이 단연코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행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꾸어주는 사람이 78%요, 꾸어가는 사람이 22% 정도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완벽한 것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따라합시다. 100점 만점에서 78점 맞으면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100점 만점을 좋아합니다.

올림픽 때 양궁 김경욱 양 10점 gold를 맞추어서 카메라 렌즈를 깼다고 좋아하는데 사실 80점 정도만 맞으면 박수를 쳐 주어야 마땅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대학 들어갈 때 성적 중하위권이었습니다. 물론 대학원 졸업 땐 2등인가 하기는 했습니다만.

어떠한 사람도 22% 정도는 다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점을 볼 것이 아니라 장점을 보아야 합니다. 단점을 극소화하고,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 지혜자인 것입니다.

실제로 중국 사람들은 사람 칭찬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따라해 봅시다.

“ 뚱뚱하면 참 넉넉하겠다. 날씬하면 영리하겠다. 잘 생겼으면 보기 좋다. 좀 못났으면 건강하게 보인다. 개성이 있다.”고 말해 줍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무우를 자르듯이 너무 절대기준을 정해서 그 기준에 맞추어 자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웬만하면 은혜로 다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거절에 대한 표현을 잘 못합니다. 우리말은 안 된다고 하는 말을 너무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면 내 뜻대로 되어야 잘 되는 것입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죽어도 안 된다고 합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습니까?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는 말을 남용합니다.??절대라는 말은 하나님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내가 무엇이관데 감히 절대라는 단어를 사용하십니까? 그러니 조그마한 일로 '의'를 상해요.

일본 사람은 상대방의 제의 거절할 때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말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 성도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완전하신 분은 오직 한분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는 완전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게그 콘서트에서 하는 말처럼 대충 그까이꺼 뭐! 어지간하면 다 받아주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큰 하자 없으면 받아주는 마음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최후의 심판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내놓아야 할 착한 일이 있어야 됩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눅 6:32-33)

최후에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우리는 칭찬받는 행동으로 상급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가정에 돌아가면 칭찬받는 자녀가 되십시오. 칭찬받는 시어머니, 칭찬받는 며느리, 칭찬받는 기관장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살아있는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이요, 행동하는 믿음은 사랑으로 이웃들에게 선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 칭찬받는 존재로 서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1장 24-25절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 을 바라면 참으로 기다릴 지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기관장 여러분과 성도여러분 ! 하나님의 참 자녀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인 것입니다.

뉴질랜드에서 다른 나라로 팔려 가는 소들이 배를 타고 한 달씩 항해를 하는 데 배에서 마른풀 한줌을 가지고 서로 뿔을 대고 싸웁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소들이 마른풀을 먹지도 않고 서로 싸우지도 않는 것입니다. 내용인즉 300리 밖에 가까워진 육지의 풀 냄새를 맡는 것입니다 즉 이 소들에게는 풀과 육지가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냄새를 인하여 소망이 생겼고 그 소망을 인하여 마른풀을 가지고 싸울 마음이 없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는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소망 때문에 현재의 고난을 장차 올 영광을 생각하면서 넉넉히 기쁨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되기보다는 영의 인도를 받으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므로,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소망을 더 귀하게 여기므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아멘)

그렇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몸이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살아있는 영혼의 구체적인 증거가 칭찬받는 행동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께서 기쁘게 맞이할 것입니다.

웃음은 나를 위한 것이지만 미소는 상대방을 위한 배려입니다. 미스바교회의 기관장 여러분 먼저 사랑의 조도, 소망의 조도를 올립시다.

??삶속에서 감사와 긍정의 조도(照度)를 올려 미스바교회를 더욱 은혜롭고 부흥하는 교회가 되도록 헌신하시기 바라며, 모든 성도 여러분 역시 이런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황 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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