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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석] 더 나은 고향을 찾아서 (히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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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민속의 대명절이 추석입니다.
추석은 한해의 농사를 결실하고 다함께 기쁨으로 지키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명절입니다. 이 명절날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들은 떠났던 육신의 고향을 찾아갑니다. 해마다 추석과 같은 명절이되면 고향을 찾는 사람들로 고속도로는 말할 수 없는 몸살을 겪습니다. 오고가고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사람들은 고향을 찾습니다.

특히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고향에 대한 향수가 더 짙어져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희 아버님은 8년전에 지병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저희 아버님의 고향은 평안도 신의주입니다. 늘 생전에 고향 신의주를 한번 가보고 싶다고 고향을 그리워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 북한에 고향을 두신 실향민들이 북한 금강산을 방문하여서 감동의 가족 상봉을 하는 뉴스를 본적이 있습니다.그 반백이 넘으신 노인들이 고향이야기를 하면서 눈물흘리고 서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함깨 눈시울이 붉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향에 관한 그리움과 추억을 담은 노래 시 소설 영화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대감을 갖고 우리가 고향을 찾고 고향을 노래하지만 막상 고향을 가보면 그냥 추억으로 남았을 때와 실제는 차이가 많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원한 고향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 고향은 이땅의 고향보다 더 나은 곳이라고 합니다. 그곳은 본문 히브리서 11장 16절에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친히 만드시고 예비하신 그 영원한 고향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가서는 우리의 영원한 고향 하늘에 있는 그곳은 열두가지 실과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그곳은 생명수가 풍성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곳은 다시 저주가 없고 다시 아픔과 질병이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백성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한 삶을 행복하게 누리면서 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언제부천가 그리스도인들은 자꾸 이땅을 너무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영원한 본향 천국의 백성으로서 이땅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영원한 고향 그 곳을 우리가 이땅에서 기다리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땅에서 영원한 고향을 향해 살아야 합니까?

1. 언제나 이땅에서 믿음을 따라 살아갑니다.

13절에 보십시오.
여기 더나은 본향을 찾아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원칙은 오직 믿음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 아벨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사라도 삶을 살았습니다. 본향을 찾아가는 길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심지어 믿음을 따라 고난을 받기도 합니다. 믿음을 따라 죽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 필요한 믿음은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믿는 개인믿음이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천국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다른 이로서는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본향을 가는 유일한 길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국의 길 안에 들어온 천국백성들에게 또 하나 중요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바로 천국을 믿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합니다. 여기 믿음이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게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라고 합니다.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라고 합니다.
실상이란 “아래로부터 받쳐주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믿음은 소망을 받쳐주는 힘입니다. 믿음은 희망의 기초입니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게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랍니다.
믿음은 바라게 합니다.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자기가 기대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믿습니다.나에게 좋은 직장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나의 기대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믿음은 바로 하나님이 바라는 것들에 대해서 내가 바라는 것입니다. 때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바랄 수 없는 중에 있지만 내가 바라면서 믿는 것입니다.

성경의 아브라함을 보십시오.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 살고있는 나이가 75세인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미지의 땅으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정확하게 목적지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구체적으로 정보를 주지 않았습니다. 단지 “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 아브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합니다. 여기 바보스러울만큼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믿음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뜻으로는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뜻을 바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불확실한 미래를 보게 합니다 믿음은 어두운 미래를 보게 합니다. 미래의 것들이지만 현재에 바라는 실상을 보게 하고 확신하게 해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에  반드시 볼 수 있는 한가지 확신이 있습니다.저도 볼 수 있고 여러분도 볼 수 있는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천국입니다.

여기 믿음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곳에 들어가는 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것은 하나님이 주실 본향 가나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가나안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오늘 우릭의 가나안이 어디있습니까? 우리의 가나안은 바로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천국입니다. 그 천국은 오직 믿음으로만 갈 수 있고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바라볼 수 있는 곳입니다. 이제 그곳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음 믿음이란 볼수 없는 것들을 보게 합니다. 히브리서11장 1절에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여기 “증거”라는 말은 “확신”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하는 확신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남이 못본 것을 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남이 못본 것을 믿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실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노아가 살던 그 당대에 아무런 징조는 없었습니다. 여전히 햇볕은 비쳐지고 세상은 잘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믿음의 눈으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매일같이 돈도 되지 않는 그 일,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그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120년동안 그 일을 할 수 있엇던 것은 바로 장차 세상이 물로 잠길 그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12명이 가나안땅을 정탐하였습니다. 그러나 10명은 그 땅에서 거대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사람들에 비해서 메뚜기 같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가나안땅을 주실 것을 보았습니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된다고 하였지만 여호수아 갈렙은 본 것이 있기 때문에 도전하였습니다. 믿음은 보게 합니다. 믿음은 볼수 없는 것을 봅니다. 믿음은 할 수 없는 것들을 할 수 있다고 보게 합니다. 눈이 바뀐 성도는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합니다. 비관하고 부정하는 삶이 꿈과 비젼의 삶으로 나가게 합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눈이 열려야 합니다. 눈이 열리면 앞이 열립니다.사람은 본대로 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눈이 열리면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본 사람은 다른 삶 다른 행동을 할 수 박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에게 보여 주고 모세에게 보여주고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때로는 꿈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때로는 환상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때로는 성령님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기도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말씀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환경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그런데 누가 볼 수 있습니까? 믿음의 사람만이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가나안땅이 보여집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이 보여집니다. 홍해가 갈라기는 것이 보여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여지는 것들은 우리를 실망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소개되는 믿음의 인물 시대에도 육신의 눈으로 보기에는 실망스러운 현실이었습니다.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여준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보여준 것을 붙잡고 나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땅에서 보고 또 보고 해야 할 믿음의 비젼이 무엇입니까? 바로 영원한 본향 즉 천국입니다.

일제시대에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전한 최권능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전하는 메시지는 오로지 “예수천당”이었습니다.하루는 일본 경찰이 길을 지나는데 목사님이 큰 소리로 “예수천당”이라고 외치다가 경찰서로 붙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기에 이상한 소리를 외치고 다니는 거요” 라고 일본 경찰이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예수천당”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일본경찰이 약간 호기심이 생기는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예수천당이라고만 외치는데 진짜 천당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오? 만일 있다면 그것을 나에게 한번 보여주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자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지금 당장 천당 본점은 보여줄 수 없어도 천당지점은 언제든지 보여줄 수 있소. 바로 천당지점은 내 마음이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항상 믿음을 따라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항상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의 신분으로 살아갑니다.

1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 증거하엿으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땅에서 삶은 나그네의 삶이요 외국인의 삶입니다.
나그네와 외국인의 삶은 어떤 삶입니까? “떠남”에 익숙합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그였습니다. 어느날 아브라함에게 도전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브라함아 떠나라” 말씀하였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얼마나 고민이 되었겠습니까?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 고민을 아내 사라와 대화하지 않습니다. 친척들을 찾아다니면서 상담하지 않습니다. 그 문제를 놓고 금식기도를 한것도 아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그 음성을 듣고 즉시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떠나야 합니까? 이유를 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떠납니다.사람의 뜻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냥 떠납니다.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그네로 외국인으로 불러내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외국인으로 훈련하려고 불러내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이 세상에 두시고 우리를 나그네로 외국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오늘 내가 외국인이요 나그네인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땅에서 외국인와 나그네로 살아갈 때 우리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살아가기 위해서 많은 것을 다 갖고 다닐 수 없습니다.
나그네로 길을 떠날 때 버릴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무엇을 버릴 것인가? 무엇을 갖고 갈것인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길을 떠날 때 모든 것을 갖고 결코 나그네의 길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포기하고 떠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나은 본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들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나그네요 외국인이라고 하는 자기 신분을 망각하고 자꾸 세상의 것을 욕심부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처음 갔을때 일입니다. 생전 처음 가는 미국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욕심이 나는지 몰랐습니다. 처음 도착한 곳이 로스엔젤레스인데 처음 도착한 곳부터 좋은 것들을 사고 필요한 선물을 구입했습니다. 다음에 시카고에서도 뉴욕에서도 가는 도시마다 얼마나 좋은 것이 많은지 자꾸 구입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욕심내어서 구입하다보니까 얼마나 짐보따리가 많은지 굉장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2번째 갈때에는 첫 번째 실수를 거울삼아서 최대한 사지 않고 가볍게 하여서 기분좋은 여행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땅에서는 나그에요 외국인입니다.
그렇다면 너무 땅에 것들을 욕심내지 말아야 합니다.지금 살고 있는 집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으로 자족하셔야 합니다.입을 곳이 있고 먹을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이땅에서 좀 자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만의 구별된 아름다운 삶의 모습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땅투기를 합니까?
왜 그리스도인들이 집투기를 합니까?
왜 그리스도인들이 노름하고 도박을 합니까?
우리가 명심할 것은 하늘에 갈 때 땅에서 우리가 얻은 모든 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의 삶은 길어야 70-80입니다. 우리는 그 나그네의 순례를 하다가 이땅을 떠나야 합니다. 이땅을 떠날 때 우리가 소유하던 이땅의 모든 것들은 우리가 가져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적신으로 왓은즉 우리가 또한 적신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이세상에 삶을 허락하셨습니까?
왜 우리를 구원하셔셔 막바로 천국으로 우리를 이동하지 않고 이땅에 삶을 허락하셨을까요?나그네로서 외국인으로서 이땅에 우리를 남겨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돈벌어서 공부 잘해서 우리가 잘먹고 잘살라고 우리를 이땅에 두셨을까요?
이땅에서 삶을 살았던 모든 믿음의 선배들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되는 분들을 보십시오. 그리고 기독교2천년의 많은 큰 믿음의 좋은 선배들을 보시시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진정한 주님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땅에서 우리는 세상에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땅에서 우리가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대사요 하나님의 나라의 증인이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땅에 살지만 항상 이땅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땅에 오셔서 이땅에서 사명을 위하여 살지만 항상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떠날 것을 준비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땅에서 복음을 증거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하지만 그는 항상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우리에게 고백했습니다.

빌리보서 1장 21절에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것은 바울이 사는 것이 그리스도때문인데 만일 내가 죽는 것이 그리스도에게 유익함이라고 한다면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땅에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때문이고 이땅을 떠나는 것도 그리스도 때문에 떠날 수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 23절에 “내가 그 두사이에 끼엿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나그네요 순례자로 외국인입니다. 그날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얼마전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별세신앙 별세목회 별세신학을 주장하시던 이중표 목사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분이 주장하는 “별세”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목사님은 생전에 별세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분은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서 죽고 자기에 대해서 죽고 주님에 대해서 사니까 헛된 욕심부리지 않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 주님이 기뻐하시는 목회를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인정과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그네요 외국인으로 우리 모두가 세상에 대하여 죽고 자기에 대하여 죽고 죄악에 대하여 죽을때 예수님이 사시고 열매를 맺는다라고 주장하십니다.
여러분 나그네요 외국인으로 세상과 나에 대하여 죽고 예수님께 대하여 살고 천국에 대하여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3. 언제나 더 나은 고향을 마음에 사모하면서 살아갑니다.

16절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라고 합니다.
여기 저희는 누구입니까? 이땅을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땅에서 더 나은 본향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그곳을 사모하면서 살아갔습니까? 지하무덤에서 재대로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그들은 천국을 사모하였습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온간 고난과 핍박과 조롱을 당하면서 그곳을 바라보면서 사모하는 가운데 땅의 생활을 이길 수 있엇습니다.

과거 우리나라 기독교가 일본에 핍박을 받고 공산군에 의해서 핍박을 받을때 그 핍박을 이겨낸 가장 중요한 신앙은 바로 천국에 대한 사모함 소망의 신앙이었습니다. 비로 이땅에서 핍박받고 때로 죽음을 당하지만 천국에 들어갈 것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있었기에 그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고난 중에서도 소망중의 사모하는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왜 천국은 우리에게 사모가 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1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아니하시고라고 합니다. 여기 천국에서 우리가 가장 위로와 기쁨이 되는 것은 바로 우리아버지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땅에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복을 누립니다. 예배 속에서 기도 속에서 찬송 속에서도 지금 여기에서 만나는 하나님과 차원이 다릅니다. 영광 중에 그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그 임재와 능력을 경험하면서 환상적인 경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는 그림자를 보는 것같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더욱 분명한 하나님의 온전한 임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할 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아들아” 우리의 눈에 눈물을 닦아주고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싸매어주면서 우리를 맞아주실 것입니다.이땅을 살면서 받앗던 마음의 아픔 상처 돈벌이하느라 세상에서 당했던 모든 고통과 수모가 아버지 하나님의 따뜻한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받아줄 것입니다.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이땅에서 부자로 살던 사람은 지옥에 가고 거지로 살던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땅에서 부자로 살던 사람은 음부에서 얼마나 고통을 경험합니까?

어떤 분들은 누가 지옥을 가보았는가? 천국을 가보았는가? 그렇게 반문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하나님을 우리가 경험하면서 교회가 존재하고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만 보아도 천국은 실재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천국을 통하여 주님이 주실 위로와 소망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또 천국이 우리에게 사모함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성경을 통해서만 대면하였던 바울이나 아브라함이나 다윗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우리가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에서 다윗에 대해서 아브라함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겼던것들을 아마 물어보고 그 의혹이 다 풀리게 될 것입니다. 많은 믿음의 순교자들과 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만나면서 엄청난 간증거리로 땅의 추억들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면서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들을 갖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우리는 눈을 들어 주님을 사모하면서 주님을 소망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상에서는 이방인이요 포로며 영원한 천상의  고향을 향해 여행하는 순례자입니다.

이제 이땅에서 믿음을 따라 천국을 향한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이땅에서는 나그네요 외국인인 것을 아시고 땅의 것들에 대하여 너무 집착하고 욕심부리지 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그 나라를 사모하면서 소망 중에 우리 모두가 날마다 살아가시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박 춘 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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