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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한가지 소원은 (시 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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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님이 여러분에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 줄 것이니 말해 보라고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의 한 가지 소원은 무엇입니까?
로또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잘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입니까?
사람마다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어거스터스라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때 한 노인이 산모에게 말했습니다.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오. 내가 이 아이를 위해 한 가지 소원을 들어 줄 테니 말해보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아이의 어머니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이가 되도록 해 주십시오.” 그 소원대로 어거스터스는 성장하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을 받기만 할 뿐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교만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결국 그의 노년은 비참하고 쓸쓸했습니다. 그때 노인이 다시 어거스터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소원을 더 말하시오.” 그러자 어거스터스가 대답했습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7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의 27편을 기록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한가지의 소원을 청하였습니다.
그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소원은 왕권이 하나님으로부터 보장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그의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그의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이 다윗의 소원이었고, 그곳에서 하나님만을 사모하는 것이 다윗의 한 가지 소원이었습니다.
다윗은 시편 84편의 말씀처럼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악인의 장막에서 호화롭게 거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집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신앙이고 다윗의 삶의 이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다윗과 같은 소원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누가 이 아름다운 교회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소원함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전도사로 섬기던 초대교회에 백병설 장로님이라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머리가 허여신 나이가 많으신 장로님이십니다. 제가 초대교회에서 지휘자를 할 때 그분이 성가대 베이스로 섬기셨는데 그분은 늘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건강주시고 성가대에서 쫓아내지만 않는다면 저는 죽을 때까지 성가대에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님들이 그분이 허여신 머리를 가지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서 은혜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장로님의 소원은 건강이 허락될 때까지 하나님의 집에서 성가대로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집에서 평생을 거하면서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내 몸처럼 사랑하고 섬기는 소원함이 여러분 안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소원은 무엇이었습니까?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감동하셨습니다.
그래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이 말은  “네 한 가지 소원이 무엇이냐?”물으신 것입니다.
그때 솔로몬은 하나님께 솔로몬은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열왕기상 3장 10절과 11절의 말씀을 보시면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 3:10-13)

솔로몬은 자기를 위하여 먼저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부함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빼내어 세우신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잘 다스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올바른 곳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 백성을 위한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그 소원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구한 지혜와 총명한 마음을 주신 것 뿐 아니라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을 주셔서 평생에 열왕 중에 솔로몬과 같이 지혜로운 왕이 없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구하여도 얻지 못합니까?
야고보 선생님은 야고보 4장 3절에서 정답을 말씀하십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많은 소원을 아뢰지만 얻지 못하는 이유는 나의 욕심을 채우려고 구하기 때문입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십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 돕기를 원하고 베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은 더 많은 재정들을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2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막 10:21)

우리가 잘 아는 원종수 권사님은 분명하게 복을 받은 비결에 대해서 간증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길에서 거지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도 가난하였지만 데리고 와서 씻기고 옷 입혀서 잘 대접하여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서울대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또 의사로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기를 원하고, 베풀기를 원하고, 연약한 사람을 돕기를 원하는 소원함이 있을 때 솔로몬에게 주셨던 그 축복을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에게 강렬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소원은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맞을 시간이 임박하였을 때 마지막으로 기도하신 기도의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1절의 말씀을 보시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첫 마디입니다. 즉 예수님의 마지막 소원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조금 쉬운 말로 바꾸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하는 소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지막 소원이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을 최고의 소원으로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라고 바울사도는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려면 어떻게 먹어야 합니까? 어떻게 마셔야 합니까?  '주님, 굶주리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조금 덜 먹고 그들을 도울 수가 있다면,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만 있다면, 주여 내 것을 나누어 먹기를  원합니다.'하는 심정을 가지고 먹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마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만 먹고, 즐기고, 배를 두들기면서 사는 것은 절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인가?' 만일 '나는 적당하게 먹으면 돼. 하나님이 주신 귀한 물질인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 아직도 영생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주의 복음이 증거 되기 위해서 내가 좀더 내게  있는 것을 나눌 수가 없을까?'하면서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이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가정의 행복을 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자녀를 잘 키우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버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회사에서 승진하고, 또 인정받으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일 이러한 모습 가운데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소원이 담겨 있지 않다면 다 헛된 것입니다. 헛되고 헛된 것에 매달려서 아우성치다가 헛되게 죽는 것 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되길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이되길 위해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간절한 소원이 있는 사람은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여러분 가나안 여인에게는 자기의 딸이 흉한 귀신에 들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드렸나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시당했습니다. 외면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더 예수님께 가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절하면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멸시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얼마나 멸시를 당하였습니까?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이 말합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외면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멸시를 당하였지만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정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외에 자기의 소원을 풀어 줄 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존심이 완전히 무너졌지만 끝까지 예수님께 나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소원이 있으면 예수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소원이 있으면서도 주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소원을 들어주셔도 좋고 안 들어 주셔도 좋다는 간절한 소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는 하나님께서는 내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예수님을 끝까지 붙들었던 가나안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8)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진정한 소원, 간절한 소원을 아뢰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래서 시편 37편 4절에서는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라고 말씀하셨고
또 시편 103편 5절에서는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나의 한 가지 소원 예수님을 닮고 싶어요.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전에 거하는 여러분의 거룩한 소원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만 잘 먹고 잘살려는 욕심에서 비록 된 소원된 소원이 아니라 돕고, 베풀고, 나누어 주기를 원하는 넉넉한 마음의 소원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리라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소원이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을 책임지시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할 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축복을 누리실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 함께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한 가지 소원 주님의 기쁨 되는 것” 찬양하며 나아가십시다.
(이 덕 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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