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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의 보답(1) (시 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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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예배의 자리에 함께 하신 구도자 여러분, 추석인데도 불구하고 본 교회당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부여한 성도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 저는 감사의 절기 추석에 주님 앞에 나아온 여러분과 함께 “은혜의 보답”이란 제목으로 시편 116편을 살피려고 합니다. 시편 116편은 추석과 같은 감사의 절기에 살펴보기 합당한 시입니다. 신앙의 시인이 노래한 이 감사의 시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처음 두절은 서론이면서도 이 시 전체의 결론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3절에서 7절까지 그 결심에 도달한 구체적인 사연을 풀고 있습니다. 세 번째 부분은 8절에서 12절로 다시 한 번 자신이 받은 구원을 회상하며 은혜의 보답을 어떻게 할 것인지 스스로 자문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 부분은 구체적인 서원의 이행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보에는 본문을 12절에서 19절로 잡았는데 본문을 따라서 가려니까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무래도 제대로 되는 것 같아서 첫 부분만 살피겠습니다. 하지만 처음 두 부분을 살피는 것으로 추석날 드리는 감사절의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기를 바랍니다. 

첫 부분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1, 2절)

시편 116편은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시편 18편에도 비슷한 고백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신앙인은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보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이 여러분을 이 자리로 인도하셨는지 살펴보셔야 합니다. 사람의 눈이 무서워서도 나오는 사람이 가끔은 있고요, 또 자기의 관습에 따라서 올 수도 있습니다만 정말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 사랑에 강권 받아서 나오는 예배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신앙의 시인은 더 나아가서 현재의 고백뿐 아니라 미래의 결심까지도 밝힙니다.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그렇습니다.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드리되 쉬지 않고 평생 동안 그 분께 기도하리라고 각오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면서 언제나 여러분을 가장 환영하는 곳을 찾으십시오. 고향의 부모형제도 여러분을 환영하지만 하늘 아버지만큼 반갑게 여러분을 맞이하는 분은 없습니다. 명절일수록 더 격차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갖지 못한 사람들과 가진 사람들, 물질 뿐만 아니고 가족이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 돌아 갈 고향을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 그래서 어쩌면 축제가 더 쓸쓸한 절기가 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성도들 가운데서 많은 분들이 돌아갈 고향이 없는 분들도 있고요, 또 자식들이 있기는 하지만 올 추석에 과연 올 것인지에 대해서 부모로서 확신이 서지 않는 그런 쓸쓸한 추석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반갑게 맞이해 주실 뿐 아니라 여러분을 제대로 대접해주실 분은 하늘 아버지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 하셔야 합니다. 달리말해서 돌아갈 고향이 없고 찾아올 자식이 없다 하더라도 오늘 여기 예배하는 여러분을 맞이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감사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위에 넘치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모여서 진동하는” 때에도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는 것을 중시합니다. 민족고유의 절기, 감사절에 좋으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를 먼저 찾는다는 것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예배의 자리를 귀히 여기는, 평생을 기도하는 일에 헌신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주님께 기도하는 복된 자리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세상에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사람들 마다 이 추석날까지 하나님을 찾지는 않거든요? 하나님께 평생에 기도 하겠다, 이런 소원 갖지 않고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성도들은 그런 소원을 갖게 되었을까요? 

흔히 사랑은 맹목적이라고 합니다.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고 이야기를 하죠. 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 때에 더 깊게, 더 강하게, 더 풍성한 사랑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눈이 멀어서가 아니라 분명한 이유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누구나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이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를 신약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깨달음으로서 우리도 그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시인은 여기서“내 음성과 내 간구를”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새벽에도 나와서 기도할 때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한 큰 소리로 기도 하는 게 도움이 됩니다. 그러면 오는 잠을 쫓을 수가 있고, 생각을 정리를 해서 아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때로는 음성을 높여도, 너무도 큰 고통 속에서는 제대로 된 말로 기도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다만 신음처럼 읊조리기도 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신음소리조차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말로서 분명히 또박또박 말해야만 듣는 것이 아니라 미처 말을 못 찾고 있는지에 대해서 주님은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하기를 즐겨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주만 바라볼찌라”고 우리는 찬양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가 언제나 신음일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분명한 내용으로 힘 있게 부르짖기도 합니다. 최선을 다한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아보신 분들은 자주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자주 하나님께서 영접해 주십니다. 상한 부르짖음도 들으시고 균형 잡힌 간구에도 귀를 기울이십니다.

우리의 음성, 우리의 간구 모두를 들어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기도응답을 받을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믿으므로 기도의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입을 여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들으시는 분입니다. 마치 아이의 부르는 소리를 그 어머니가 귀를 기울이듯이 예수 믿고 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신음소리 조차도 하나님께서는 귀를 기울이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여러분은 믿으셔야 합니다. 기도의 문이 열려있기에 그 문이 닫히지 않도록 자주 드나드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매일 기도응답을 받을 때에 지속적인 사랑이 넘쳐 납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싶은 소원을 가진 여러분, 자주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사람과의 관계에도 더 우정이 돈독해지려면 만나야 됩니다. 친척도 자주 만나지 않으면 남처럼 점점 멀어지는 것을 여러분은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명절에 고향을 찾는다는 것은 정말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자주 하나님과 만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더 새로워 질 것입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여기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라는 표현을 눈여겨보십시오.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으시려고 몸을 굽힌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친절한 의사가, 사랑하는 친구가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희미한 음성이나마 들어보려고 아픈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의 기도가 너무도 약해져서 우리 자신도 그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시며 우리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하나님의 절친한 도움을 받아봤으니까 내가 평생에 기도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람 사이에서 생각해보면 다릅니다. 누가 이번 추석에 이웃에 어려운 사람이 있어서 여러분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좀 도왔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너무 감사해서 “김 선생님, 내가 앞으로 어려울 때 마다 당신을 늘 기억 하겠습니다”이러면 우리가 어떤 기분을 가질까요? 전혀 우리는 고마운 느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야 착한마음 먹고 좋은 일 한번 하다가 이제는 악연이네 악연” 이렇게 생각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평생 하나님만 찾아서 하나님께 구하기로 결심을 하면 하나님은 너무 행복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내 평생에 찾으리라 그렇게 결심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마치 여러분의 부모님이 여러분을 평생 사랑하기로 결심 한 것과 같습니다. 아마 부모들도 마찬가지로 자녀들이 부모에게 바랄 때에 행복해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무궁하신 하나님을 지금 여러분은 예배하고 있습니다. 이제 평생토록 그 분께 기도하며 그분을 찬양하기로 결단합시다.

주를 사랑하기로 결단한 자들은 노래합니다. “내 평생 사는 동안 주 찬양 하리 여호와 하나님 내 주를 찬양 하리 주님을 묵상함이 즐겁도다 내 영혼 주안에서 참 기쁘리 내 영혼아 주님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 내 영혼아 주님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 ”

평생토록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기도하기로 결단하면 일생토록 우리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일생토록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와 찬양의 습관은 여러분을 영적으로 성숙시키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부분으로 갑시다. 왜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만 기도하기로 결심했습니까? 그것은 고통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받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을 돌아보며 그 때 드린 기도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시절은 기도하기에 좋은 때입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쓸쓸한 명절입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우리 대부분은 평안할 때에 기도하는 것은 오히려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어려워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기댈 언덕이 사라져야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시인의 처지는 어떠했습니까? 죽음에 던져진 자신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3-4)

마치 죽음이 저승사자처럼 포승으로 자신을 묶으려고 하는 것 같고 사냥꾼들이 사냥개와 더불어 사슴을 에워싸서 달아날 길을 막아버리듯이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사망의 줄뿐 아니라 음부의 고통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사망의 줄에 매여 음부로 끌려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죽음의 장소를, 죽은 자가 가는 곳을 음부라고 생각했고 거긴 고통스런 곳으로 이해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시는 희망이라고는 바랄 수 없는 곳입니다. 단테가 신곡을 쓰면서 지옥문 앞에 그렇게 새겨진 글자가 있다고 그랬죠? “여기 들어서는 자는 희망을 버릴지어다”

죽음 앞에서 한 많은 사연들이 우리를 도 한번 고통스럽게 합니다. 뒤를 돌아보아도 위로를 찾을 수도 없고 현재를 보아도 희망은 없습니다. 아내와 자식들과 사랑하는 친구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합니다.

아무도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게 아니라 오고 싶어서 세상을 오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또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미래를 보아도 어둡습니다. 앞날은 깜깜합니다. 내세를 준비하지 못하고 죽음 앞에선 사람의 고통이란 살았을 때 당한 모든 고통을 뭉쳐놓은 것 이상의 고통입니다. 환난과 슬픔을 동시에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길이 다 막힌 상황이기에 시인은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

죽음과 음부의 세력에서 그를 건져줄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음 앞에 섰을 때 비로소 가장 진실한 기도를 드린다고 합니다. 언제나 기도할 수 있지만 가장 정망적인 순간에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극한 상황에서는 사람들의 도움이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럴때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조차도 무슨 유익이 있으랴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사단은 다 소용없는 짓이라고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하지만 그 때에 여러분의 믿음이 전면에 부각되어야 할 순간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순간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이 말은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이고 주님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달려갈 수 없을 때라도 여러분을 그 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불러서 아뢸 수가 있습니다. 궁핍한 처지를 호소할 수 있습니다. 지금 처지가 어렵습니까? 지금 처지가 고달픕니까? 한가위 명절이 더 이상 기쁜 명절이 아니라 여러분의 슬픔을 더 가중시키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여러분을 맞이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이름”을 통해서 주님이 어떤 분인지 더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그 선하신 이름을 통해서 주님을 더욱 잘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구약시대 성도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기도를 시작했으며 신약시대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끝맺습니다.

여기 시인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짧은 기도입니다. 짧은 기도이지만 간절하고 심오한 기도입니다. 죽음 앞에 선 사람은 상투적인 기도의 형식을 찾을 겨를이 없습니다. 공 예배의 대표기도를 하면 같이 앉아있는 사람을 의식하게 되고 기도가 길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기도 해보면 길게 기도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죽음 앞에 직면하게 되면 긴 기도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 영혼을 건지소서.”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때 주님은 “은혜롭고 의롭고 자비하신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분은 은혜와 의로 인해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죄인의 기도가 하늘에 미치는 것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 부르짖음에 외면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의가 가장 잘 나타난 곳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확정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또한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그리스도예수를 믿음으로 아버지로 부르는 자는 그분의 자비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아니하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비하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은혜와 자비 가운데 하나님의 의는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을 만난 자는 어질고 자비롭고 의로운 자로서 세상 사람들 사랑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명절에 가셔서도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그런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숙해 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모습과 행동이 여러분이 만난 하나님을 보여주는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바른 것을, 의로운 것을 주장할 수 있지마는 언제나 은혜와 자비가 함께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사람들이 아무리 여러분들이 바른 것을 주장해도 감동을 안 합니다. “되게 딱딱 거리네” 그럽니다. “혼자 잘난 척 하네” 그러죠. 바른 것 이야기 할 때는 언제나 사랑을 잃지 않아야 됩니다.  언제나 친절한 행동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의 속성을 노래한 다음 그분의 사역을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6절)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은 자를 하나님은 보호하십니다. 너무나 순진하고 악의가 없어서 늘 당하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단순하기 때문에 속임수나 함정을 보지 못하고 빠지기도 합니다.

재주가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돌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세상적인 재치와 간교한 꾀를 갖지 못하고 단순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호하십니다. 세상적인 지혜를 가진 자들은 아무리 지혜롭게 처신해도 자기 꾀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록 어리석어 보이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의 대상인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내가 낮게 되었다”는 표현은 질병으로 비참하게 낮아지는 경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나와 사망 사이는 한걸음 되지 않는다”고 시인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사업의 실패로 인해 비천하게 되는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모함을 받아 명예가 실추된 경우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그런 처지에 빠지면 사람 사이에 천덕꾸러기가 되고 미움과 눈총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 주님은 우리의 구원자로서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십니다. 죽을 질병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사업의 실패에서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떨어진 명예를 다시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구원은 늘 우리가 낮아졌을 때 임하는 법입니다. 낮아진 자리에서 겸비하게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무서운 질병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치유자를 바라보십시오. 처참한 실패입니까? 하나님은 거기서 다시 일으키실 수 있는 분입니다. 아니면 실추된 명예입니까? 모든 세상이 여러분을 칭송할 수 있는 한 날이 다가오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처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은 낮아 졌을 때 거기서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구원을 경험한 시인은 이제 스스로를 달랩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7절) 시편에는 이와 같은 스스로를 타이르는 투가 자주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시편 42편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시42:5상) 신앙의 시인은 자주 자신에게 타이르곤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진리로 타이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로 자신을 타이르는 대신에 자기의 부정적인 소리를 듣고만 있습니다. 사탄의 파괴적인 음성에만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영적 침체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지금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아직도 여러분을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병든 자신만 바라보지 마십시오. 실패한 사업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실추한 명예에만 전전긍긍하지 마십시오.

잃어버린 것에만 연연해하지 마십시오. 아직도 남겨진 것들로 인해서 감사하십시오. 사랑하던 이가 떠난 것으로 괴로워하는 대신 아직도 당신의 사랑을 기다리는 이들을 기억하십시오.

제발 이제 스스로를 달래기를 바랍니다. 찾아 올 자식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도 이제는 이 명절에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외로움 속에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을 가까이 두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읽으셔야만 합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7절) 아직도 여전히 후대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스스로를 격려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위로하시길 기뻐하십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스스로를 격려합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7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전히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충만한 평안이 찾아올 것입니다. 근심 걱정으로 매몰된 자리에서부터 구출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릴 것이 아니라 이제는 편안한 주님의 품을 사모하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을 초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의심과 불안은 사라지고 놀라운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물론 불순종으로, 때로는 한눈을 팔면서 세상의 기쁨을 추구하다가 주님의 평안을 잃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지체 말고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품고 있는 알을 다 빼내어도 알지 못하고 그냥 앉아있는 암탉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도 여전히 예배의 자리에 와서 앉아있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어리석음은 벗어야 됩니다. 이 예배의 자리에 나왔을 때에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져야 여기가 복된 자리이지 앉아있다고 해서 이전에 사랑했던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알맹이 다 놓친 어리석은 자입니다.

저녁이 되면 새들이 둥지로 돌아가듯이 영혼의 피난처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도록 애쓰되 고향 집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기억 속에서가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앞에,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서 거기 평안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후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후대하시는 하나님을 회상하십시오. 언제나 찾아가도 언제나 반기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누구였으며 지금 누구인지를 기억하십시오.

올 한 해 살면서 힘들었던 순간마다 여러분이 드렸던 간구와 서원을 기억하면서 후대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만나보십시오. 감사의 절기에는 하나님의 후대하심을 기억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내 비록 세상이 가진 모든 것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건강 가지고 있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이 가진 명예를 갖고 있지 못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평안과 기쁨을 가진 사실로 인해서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후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자리에 나왔다는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증거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은 풍성한 은혜로 찾아와 주셨습니다. 한가위의 기쁨보다도 더 큰 기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땅의 어떤 열매보다 존귀한, 하늘의 최상의 선물인 아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쏟아부어주시는 그 분을 바라보시면 여러분은 언제나 찬양하며 감사하며 그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을 보내셨고 그 성령님을 통해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다 주셨습니다. 우리를 존귀한 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모든 하늘의 충만한 은사들을 허락하시며 그 충만한데서 우리는 날마다 필요한 것을 얻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은혜 위에 은혜의 삶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인색한 사람의 식탁에 함께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워하면서 이 옷 저 옷 가리다가 철 지난 옷 하나를 주면서 입으라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마지못해 대접하는 친척집을 여러분이 방문한 것이 아닙니다.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우리가 지금 나아왔습니다. 모든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그분 앞에 우리가 나아와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후대하시는 하나님을 회상하십시오. 이제 다른 이를 찾지 마십시오. 이제 다른 평안을 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부요케 하고자 친히 가난하게 되신 사랑의 하나님께로, 여러분을 후대하시는 하나님께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 때 시편 116편의 기자의 마음을 헤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1, 2절에서 터져 나오는 이 고백에 아멘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1, 2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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